노비변정도감 ()

목차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초기 노비소송을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관서.
목차
정의
조선 초기 노비소송을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관서.
내용

1269년(원종 10)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 설치된 이후 충렬왕·공민왕·우왕 때에도 설치되었고, 1391년(공양왕 3) 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을 설치하여 불법으로 빼앗은 노비를 본주인에게 환원시키거나 노비의 신분·상속 관계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폐지되었고 담당 업무는 도관(都官)으로 이관되었다.

이러한 노비변정사업은 조선 초기에도 계속되어 1395년(태조 4)·1400년(정종 2)·1405년(태종 5)·1414년에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고 노비의 결송정한법(決訟定限法)·중분결절법(中分決絶法)·오결관리처벌법(誤決官吏處罰法)을 제정하는 한편, 오결사(誤決事)를 처리하였다.

소속 관원은 일정하지 않고 설치될 때마다 달랐는데, 1414년의 경우 호조판서 한상경(韓尙敬), 금천군(錦川君) 박은(朴訔), 호조판서 박신(朴信) 등 3인을 제조(提調)로 삼고 그 예하에 15방(房)을 두었다.

각 방에는 사(使 : 3품)·부사(副使 : 4품)·판관(判官 : 5·6품) 각 1인, 도합 45인과 별도로 도청(都廳) 12인을 두어 소송사건을 처리하여 매일 승정원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태종 말년까지 노비변정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지어졌으며, 이후 형조의 도관(都官)에서 이를 맡았다가 1467년(세조 13)에 전담관서로 장례원(掌隷院)을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조선초기양반연구(朝鮮初期兩班硏究)』(이성무, 일조각, 1980)
「鮮初に於ける奴婢の辨正と推刷について」(周藤吉之, 『靑丘學叢』22, 1935)
집필자
이재룡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