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신 ()

소재집
소재집
유교
인물
조선 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과회(寡悔)
소재(蘇齋), 이재(伊齋), 암실(暗室), 여봉노인(茹峰老人)
시호
문의(文懿), 문간(文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15년(중종 10)
사망 연도
1590년(선조 23)
본관
광주(光州)
내용 요약

노수신은 조선 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515년(중종 10)에 출생하여 1590년(선조 23)에 사망했다. 자는 과회, 호는 소재이다. 을사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언적에게 배우고, 이황, 김인후 등과도 학문을 논하였다. 경일(敬一) 공부를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다. 충주의 팔봉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소재집』이 있다.

정의
조선 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 · 이재(伊齋) · 암실(暗室) · 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노숭(盧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노홍(盧鴻)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31년(중종 26)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문인이 되었다. 27세 때인 1541년(중종 36) 당대 주1였던 이언적(李彦迪)에게 배우고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1543년 주2에 장원급제한 이후 전적(典籍) · 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주3의 편에 서서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주4 윤원형(尹元衡)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1547년(명종 2)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이황(李滉) · 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교하고 명확하여 사림 사이에 전해지고 암송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또한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 · 부제학 · 대사헌 · 이조판서 · 대제학 등을 지냈다.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 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으로 인해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여 왕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하여 마침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그는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大祥)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죄송하다고 생각하여 국상(國喪) 때와 같이 주5을 쓰고 다녔다. 그 뒤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申點)이 주청하여 담제(禫祭) 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학문세계와 저서

그는 시 · 문 · 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 · 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다. 한편 양명학(陽明學)을 깊이 연구한 탓에 주자학자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승려인 휴정(休靜) · 선수(善修) 등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경연에서 『서경』을 강론할 때에는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의 설명과 일치했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주6의 『곤지기(困知記)』를 보고 난 후에는 이전의 학설을 변경하여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蘇齋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 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소재집(蘇齋集)』
『율곡전서(栗谷全書)』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주석
주1

이름난 선비. 또는 유명한 유학자. 우리말샘

주2

식년마다 보던 식년과의 시험 가운데 문과를 이르는 말. 식년과에는 식년 문과, 식년 무과, 식년 잡과가 있었다.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를 이르던 말. 을사사화로 세력을 잃었다. 우리말샘

주4

조선 인종의 이복동생 경원 대군의 외숙인 윤원로, 윤원형 일파. 인종의 외숙인 윤임 일파와 세력 다툼을 벌였고, 이 때문에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우리말샘

주5

상중(喪中)에 종친이나 문무백관이 쓰는, 흰 베로 만든 갓. 우리말샘

주6

중국 명나라의 정치가ㆍ학자(1465~1547). 자는 윤승(允升). 호는 정암(整菴). 처음에는 불교를 배웠으나, 뒤에 주자학으로 돌아갔다. 격물치지를 주장하며 왕양명과 대립하였다. 저서에 ≪곤지기(困知記)≫, ≪정암존고(整菴存稿)≫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6)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