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자유대회 ()

근대사
사건
1919년과 1942년 미국에서 개최되었던 독립운동후원대회.
이칭
이칭
한인자유대회
정의
1919년과 1942년 미국에서 개최되었던 독립운동후원대회.
제1회 대회

첫번째 대회는 일명 ‘한인자유대회’라고도 한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선전하기 위해 열렸던 한국인의 대대적 모임이었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 통신부 외교고문인 서재필(徐載弼)의 주선으로 열렸다.

상업·교육·언론·종교 등 각계의 유력한 미국인사들을 초청해 독립운동의 진상과 일제의 탄압 사실을 낱낱이 선전하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첫째, 임시정부를 후원한다. 둘째, 구미에 외교사무소를 설치한다. 셋째,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독립선언과 국내 실정을 이해시킨다. 넷째, 일본의 실책을 깨닫게 한다. 다섯째, 임시정부의 승인을 미국과 국제연맹에 요구한다.” 등이었다.

대회가 끝날 무렵 의장 서재필의 지도로 140명이 한국국기의 행렬을 시도하였다. 이어 미국독립관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폐막하였다.

제2회 대회

두번째 대회는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3일간 미국 워싱턴에서 재미교포들이 국제지위를 제고하기 위해 열렸다. 주최자는 중국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한 주미외교위원부와 재미한족연합회, 그리고 한미협회였다. 참가자는 각 한인단체 대표와 애국지사였다.

개최목적은 우리 전민족의 자유독립을 위한 일치단결의 위력을 과시하고 3·1정신을 기념하는데 있었다. 이 대회는 미주 각 지방에서 교포 100여명이 참석하고, 워싱턴에 있는 저명한 정객들이 많이 출석해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 3일간 연설과 토의를 한 다음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결의문은 “첫째, 우리 대회 각 회원은 1919년 3월 1일 당시의 독립선언서를 선언하고 자유와 자주를 우리 것으로 만들 때까지 계속 투쟁하기로 선언한다. 둘째,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봉대하기로 선언한다.

셋째, 1942년 1월 1일워싱턴에서 26개국이 조인한 연합국선언서를 찬성하기로 다시금 선언, 승인한다. 넷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적인 승인과 연합국선언서의 일원으로 활동할 자격부여를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하도록 위임·요구·제의한다.

다섯째,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건을 미국 국회에 청원하도록 위임·요구·제의한다.” 등이었다. 이 대회의 회장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장 김호(金乎)였으며, 개회사는 주미외교위원부장인 이승만(李承晩)이 하였다. 연사는 워싱턴주 대의사 코피와 공인애, 아메리칸대학총장 더글라스 등이었다.

참고문헌

『3·1독립운동(獨立運動)과 임시정부(臨時政府)의 법통성(法統性)』(이현희, 동방도서, 1987)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3(국사편찬위원회, 1967)
『재미한인오십년사(在美韓人五十年史)』(김원용, 1959)
『신한민보(新韓民報)』(1942.3.12., 3.19., 3.26., 4.2.)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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