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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문헌
조선 후기의 학자, 이재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54년에 간행한 시문집.
정의
조선 후기의 학자, 이재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54년에 간행한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854년(철종 5) 이재의 후손들이 편집·간행하였다. 서문과 발문은 없다.

서지적 사항

50권 25책. 활자본. 규장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

권1∼4에 시 851수, 권5∼7에 소 49편, 계(啓) 2편, 권8에 서계(書啓)·강의(講義), 권9∼23에 서(書) 883편, 권24에 서(序) 7편, 기 9편, 발 19편, 권25에 잡저 25편, 권26에 교서 1편, 상량문 1편, 잠(箴)·명(銘) 6편, 고축문(告祝文) 22편, 제문 19편, 애사 3편, 권27∼30에 신도비(神道碑) 32편, 비 9편, 권31∼37에 묘갈 146편, 권38∼46에 묘표 65편, 묘지 111편, 권47∼50에 시장(諡狀) 1편, 행장 2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각 체의 시를 썼는데, 기개와 청흥(淸興)이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절구(絶句)에 그의 시재를 보인 작품이 많은데, 「죽교청동가(竹橋聽童歌)」·「만흥(漫興)」·「억형로(憶衡老)」 등은 청흥과 감회를 잘 나타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율시에서도 기개를 잘 표현한 작품이 적지 않은데, 「경고전장감회(經古戰場感懷)」·「독좌(獨坐)」 등은 그 한 예이다.

4언·5언·7언의 고체(古體) 작품, 「화후경절국화병시견기운(和厚卿折菊花幷詩見寄韻)」 등은 대체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송(松)·죽(竹)·매(梅)·국(菊)을 소재로 삼았는데, 그 중에도 ‘송’을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교학을 소재로 한 작품이 상당수에 달하며, 은거할 때 한적한 경관을 읊기도 하고, 산수를 찾을 때마다 시를 남겼다. 시상은 형식과 내용을 겸비하였으며, 기상과 격조가 높았다. 고답적 표현을 버리고, 진솔한 표현으로 기발한 시상을 표현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소는 사직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 가운데 「사부제학균전사서(辭副提學均田使書)」는 39세 때 균전사로 영남지방에 내려가 농촌의 문란한 토지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을 상소하다가 파직당한 내용이다. 「겸설서진소회소(兼說書陳所懷疏)」는 동궁의 보도(輔導)에 관한 교육대책을 말한 것이다.

「헌납논사소(獻納論事疏)」는 1709년(숙종 35)에 올린 것으로, 조세·재정정책의 개혁을 지적하고, 관료사회의 분열억제와 탕평에만 지나치게 열중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대사헌진계소(大司憲陳戒疏)」와 「입성후진소회소(入城後陳所懷疏)」는 임금의 도리와 시무(時務)를 논한 명저이다. 서계에는 28세 때 관서지방을 순회하면서 보고 들은 민폐와 변방의 사회상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서(書)는 대부분 학문적 입장과 업적을 알 수 있는 기본 자료로써, 안부나 의례적인 수미(首尾)의 번거로운 수식을 하지 않고 학문과 시사(時事)에 관한 요점만 진술하는 데 주력하였다. 서한의 대상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兪拓基)에게 보낸 30여 통을 비롯해 그의 외숙 민진후(閔鎭厚)에게 20여 통, 그리고 제자 민우수(閔遇洙)·박성원(朴聖源)·이인석(李仁錫)·최우(崔祐)·임성주(任聖周) 등에게 보낸 서한인데,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에 대한 질의와 답변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더욱 특기할 것은 「석담원유(石潭院儒)」 등 24개 서원의 유생들에게 보낸 서한문을 수록하고 있어, 그의 교육적 열의와 실천의 모습을 알게 한다.

서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 후기 유학사에서 하나의 큰 계기를 이룬 윤봉구(尹鳳九)와의 인물성(人物性) 논의와 심체미발선악유무(心體未發善惡有無)에 대한 이론을 전개한 서한문이다. 윤봉구의 심설(心說)에 대한 질의에 답한 서한에서는 심(心)을 기(氣)로만 지적하지 말고, 성(性)과 기(氣)를 합해 파악할 것을 주장하였다. 서(序)·발(跋) 중에는 선조 때 부제학을 지낸 이해수(李海壽)의 문집 서문을 비롯해, 좌의정을 지낸 민정중(閔鼎重)의 문집 서문, 이이(李珥)의 문집인 『율곡전서(栗谷全書)』의 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 가운데 「율곡선생문집수정범례(栗谷先生文集修正凡例)」는 그가 직접 수정하고 분류한 『율곡전서』의 범례로서, 이 문집의 서지학적 이해를 돕는 자료가 된다. 「인불가이불학설(人不可以不學說)」에서는 사람의 행동이 금수와 다른 것은 학문을 닦아 덕성을 함양하는 데 있다는 교훈적인 논설을 문답식으로 문항을 제시한 점이 특징이다. 「심곡서원학규(深谷書院學規)」·「유도봉원유(諭道峯院儒)」 등 수십 편은 후진 교육에 대한 열의를 보인 것으로, 여러 서원의 학규와 유생들에게 보내는 권유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수백 편의 묘도문자(墓道文字)와 시장(諡狀)·행장 등은 당시의 저명인사를 다룬 것이 많아, 그의 사우 관계와 학문의 계통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350여 편의 묘도문자와 850여 편의 시가 수록된 것을 보면, 시문 저작에 많은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이지만, 학문적 논의를 중심으로 저작된 890편의 서한문의 내용과 비교하면 그의 학자로서의 진지한 태도를 다시금 발견하게 된다.

참고문헌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4)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현상윤, 민중서관, 1949)
「호락논쟁(虎洛論爭)의 철학사적(哲學史的) 의의(意義)」(이남영, 『동양문화국제학술회의논집』,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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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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