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요 ()

지순탁요
지순탁요
공예
개념
10° 이상의 경사면에 터널형 구조로 축조한 가마. 오름가마 · 굴가마.
이칭
이칭
오름가마, 굴가마
내용 요약

등요는 10° 이상의 경사면에 터널형 구조로 축조한 가마이다. 가마는 형태나 축조 방식, 구조, 열의 흐름, 재료, 사용 연료에 따라 분류한다. 등요는 평면 형태와 경사도에 따라 입요와 구분된다. 대부분 진흙으로 축조되었으나 고려 초기에 일부 벽돌로 축조되기도 했다. 고려·조선시대에 길이 20m 내외, 경사도 15∼20° 가량으로 정형화되었다. 등요 유적은 초기 철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등요의 축조와 발전은 도자기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하였다. 또한 고려청자·조선백자 같은 찬란한 도자문화의 기반이 되었다.

정의
10° 이상의 경사면에 터널형 구조로 축조한 가마. 오름가마 · 굴가마.
개설

가마를 분류하는 기준은, 형태에 따라 등요(登窯) · 입요(立窯), 축조방식에 따라 노천요(露天窯) · 수혈요(竪穴窯) · 주1, 구조에 따라 단실요(單室窯) · 다실요(多室窯), 열의 흐름에 따라 승염식요(昇焰式窯) · 횡염식요(橫焰式窯) · 도염식요(倒焰式窯), 가마를 짓는 재료에 따라 전축요(塼築窯) · 토축요(土築窯), 사용하는 연료에 따라 장작 · 석탄 · 가스 가마 등 다양하다.

등요는 형태를 기준으로 분류한 것으로, 가마의 평면 형태와 경사도에 따라 입요와 구분된다. 즉 평면이 (장)타원형 또는 (세)장방형 등으로 길고, 깊게 파낸 연소실[아궁이] 위로 한 단의 턱을 두고 10° 이상의 경사면에 번조실(燔造室), 배연부[굴뚝시설]로 이어지는 터널형 구조로 축조되었다.

등요는 대부분 진흙으로 축조되었으나 고려 초기 중국 남방지역에서 벽돌가마 기술이 유입되어 일부 벽돌로 축조되기도 하였다. 초기의 등요는 길이 2∼7m, 경사도는 10∼15° 가량이었으나 삼국시대에는 길이 5∼10m, 경사도 15∼30° 가량으로 변화되었으며, 고려 · 조선시대에는 길이 20m 내외, 경사도 15∼20° 가량으로 정형화되었다. 등요의 발전은 번조온도를 상승시켜, 도자의 생산 및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오를 등(登), 가마 요(窯)로 조합된 등요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형태의 가마를 의미하여 오름가마라고도 불리며, 지표면을 파내어 가마를 축조한 경우가 있어 굴가마라고도 한다. 이러한 유형의 가마를 중국에서는 세장방형의 평면 형태가 용(龍)의 몸통과 닮았다 하여 용요(龍窯)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지표면을 굴착하여 경사면을 만들어서 아나가마[穴窯]라고 한다.

가마의 축조방식은 가마의 발전 단계를 반영한다. 최초의 가마인 노천요는 지표면에 토제품을 놓고 그 위에 연료를 태워 번조하는 형태로 신석기시대에 등장하였다. 이후 지표면을 동그랗게 파낸 뒤, 그 안에 토제품을 넣고 연료를 덮어 소성하는 수혈요가 등장하였으나 가마의 천장이 없어 일정 온도 이상 올릴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초기 철기시대에 접어들어 확실한 형태의 벽체와 천장 시설을 갖춘 실요가 등장하면서 원삼국시대에 이르러 장타원형의 평면을 갖추고 경사면에 축조한 등요가 본격적으로 운영되었다.

등요의 출현은 중국의 제도(製陶) 기술이 유입되면서 가마 축조방법도 함께 들어왔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자세한 과정과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원삼국시대에 정착된 등요는 삼국시대로 계승되었고, 이후 남북국 · 고려 · 조선시대에 이르러 변화 · 발전을 거듭하여 대표적인 도자기 제작용 가마로 자리 잡았다.

등요의 역사
  1. 고대의 등요

초기 철기시대∼원삼국시대의 등요는 지표면을 파내어 할석 등을 이용하여 가마 바닥면을 정리한 뒤, 진흙과 돌멩이를 혼합하여 축조한 지하식 등요이다. 평면은 타원형을 띠며, 경사도는 10∼15° 가량으로 확인된다. 가마의 길이는 2∼7m, 너비 70∼150㎝, 깊이 20∼50㎝로 등요 중 가장 작은 규모이다. 아궁이와 1칸의 번조실, 배연부로 구성된 단실요로, 내부에 별도의 시설이 없는 단순한 구조이다. 원삼국시대 등요의 최고 소성온도는 700∼800℃ 가량으로 추정된다.

삼국∼남북국시대의 등요는 원삼국시대보다 한층 발전되어, 이전 시기에 축조된 지하식 가마 외에도 가마의 형태가 점차 지표면 위로 올라와 반지하식, 지상식 가마도 만들어졌다. 이 시기의 등요는 진흙과 볏짚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평면의 형태는 타원형에서 장타원형, 장방형으로 변화한다. 가마의 길이는 5∼10m 내외, 너비는 70∼200㎝, 깊이 20∼120㎝로 이전 시기보다 규모가 커졌으며 경사도는 15∼30°로 상당히 급해졌다. 아궁이와 번조실, 배연부로 구성된 단실요이며, 내부에 별도의 시설이 없다. 삼국∼남북국시대 등요의 최고 소성온도는 800∼1000℃로 추정된다.

  1. 고려시대의 등요

고려시대의 등요는 벽돌로 축조한 전축요와 진흙으로 축조한 토축요가 있다. 전축요는 고려 초기인 10세기 중반∼11세기 중반경에 등장하는 가마로, 중국의 저장성(浙江省)을 비롯한 남방지역에서 유행하던 가마 제작방법이 고려로 유입된 것이다. 전축요는 고려 초기 청자백자의 제작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가마의 평면은 장타원형 또는 세장방형으로 중국 용요의 형태와 유사하며, 경사도는 13∼20° 가량이다.

전축요는 길이 40m, 너비 2m, 높이 1m 가량의 대형 전축요에서 길이 20m, 너비 1.0∼1.7m, 높이 80㎝ 가량의 소형 전축요로 크기가 변화하면서 점차 쇠퇴 · 소멸한다. 토축요의 경우, 길이 10∼25m, 너비 1.2∼1.7m, 높이 80㎝로 삼국∼남북국시대보다 규격이 커지며, 고려 중기 이후 길이 20m 내외, 경사도 15∼20° 정도로 규격화된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한 번 축조된 가마를 3∼4차례 이상 개 · 보수하여 사용하는 등 가마를 축조 · 유지할 수 있는 가마운영 능력이 발전되었다. 이 시대의 등요는 아궁이와 번조실, 배연부로 구성된 단실요이며, 내부에 별도의 시설은 없지만 주2 또는 원반형(圓盤形) 받침을 사용하여 가마 내부 경사도의 한계를 딛고 생산량 증대에 노력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가마의 길이가 이전보다 길어짐에 따라 곁붙을 넣기 위한 측면 출입구를 별도로 만들어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등요의 최고 소성온도는 1200∼1250℃ 가량으로 추정된다.

  1. 조선시대의 등요

조선시대의 등요는 진흙을 이용한 가마가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전기에는 가마의 평면이 세장방형에서 역사다리꼴로 변화하며, 조선 후기에는 마지막 번조실의 너비가 상당히 넓은 과장된 역사다리꼴로 바뀌게 된다. 가마의 규격은 길이 20∼30m, 너비 1.5∼2.5m(조선 후기 3.5∼4.0m), 높이 80㎝ 가량으로 점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길이 20m 내외의 규격으로 정형화된다.

조선시대의 등요는 아궁이, 번조실, 배연부로 구성되며, 번조실의 마지막 칸을 깊이 30㎝ 가량으로 파내어 초벌칸으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9-3호 백자가마, 경남 산청군 방목리 백자가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번조실의 중앙에 원주형 또는 삼각뿔 모양의 불기둥을 등간격으로 놓아 열이 번조실 안에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하는 별도의 장치를 마련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기둥의 수가 증가되었고, 이후 그 위로 격벽을 설치하여 분실(分室)의 형태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가마의 바닥은 고려시대 이전까지 직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번조실에 따라 가마의 바닥면을 달리한 계단식 구조를 취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활용된 측면 출입구는 물론, 불창구멍, 불보기창 등 효율적인 주3을 위한 가마시설이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등요의 최고 소성온도는 1300℃ 가량으로 추정된다.

현황

초기 철기시대∼원삼국시대의 등요는 경남 합천 영창리유적, 충북 진천 삼룡리 · 삼수리 유적(사진 1, 도면 1), 전남 해남 군곡리 유적 등이 있다. 삼국시대의 등요는 전남 순천 대곡리, 전북 고창 운곡리, 익산 신용리, 충북 청주 가경동(사진 2, 도면 2) 등의 백제지역 가마터와 경북 경주 손곡동, 성주 마월리 등의 신라지역 가마터, 경남 창녕 여초리, 함안 묘사리 · 우거리 등의 가야지역 가마터 등이 조사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등요는 경북 경주 망성리 · 화산리 · 덕산리, 서울 사당동, 부산 두구동, 충남 보령 진죽리, 전남 영암 구림리 등지에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등요는 경기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사진 3, 도면 3), 여주 중암리, 전북 고창 용계리, 진안 도통리 등의 전축요 계열과 전남 강진군 대구면 일대(사진 4, 도면 4)와 전북 부안 유천리 · 진서리 일대의 토축요 계열의 가마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는 광주 충효동, 충남 공주시 학봉리 분청사기 가마터 등이 존재하며,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퇴촌면 일대에 분포하는 백자가마(사진 5, 도면 5)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많은 지방 백자가마가 조사되었다.

의의와 평가

등요의 축조와 발전은 넓은 번조실을 이용한 대량생산을 가능케 하였으며, 터널 모양의 구조는 가마 안의 온도를 쉽게 올리고 내릴 수 있어 환원소성에 유리하여 토기, 기와 제작뿐만 아니라 자기 제작에도 탁월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즉 등요의 정착과 발전은 점차 높은 수준의 도자기 생산으로 이어져 고려청자 및 조선백자와 같은 찬란한 도자문화의 기반이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도자사전』(서현주‧전승창‧최종택 외, 경인문화사, 2015)
『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강경숙, 시공아트, 2005)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학연문화사, 2001)
『中國古陶瓷圖典』(《中國古陶瓷圖典》編輯委員會 編, 馮先銘 主編, 北京: 文物出版社, 2002)
주석
주1

공간 내부가 밀폐되어 1000℃ 이상의 고온으로 단단한 토기를 구울 수 있는 가마. 우리말샘

주2

‘원기둥꼴’의 전 용어. 우리말샘

주3

도자기를 소성하는 방법의 하나. 가마 속에 공급하는 산소를 억제하여, 소지나 유약에 포함되어 있는 산소를 연소시키는 방법이다. 이를 통하여 색 변화를 일으키며, 청자가 이러한 방법으로 소성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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