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부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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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봉호(封號)가 있는 상류계급 부녀인 명부의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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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봉호(封號)가 있는 상류계급 부녀인 명부의 복식.
내용

즉 왕족을 제외한 최상급의 궁중 여복(女服)과 유직(有職)의 상층 반가(班家) 여복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명부복이라고 해서 명부라는 신분이나 품계에 따른 각별한 제식(制式)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부의 차림을 따로 떼어보면, 우리 나라 왕조시대 여복의 극치라고 할 만큼 매우 화려하고 세련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기본구조는 치마·저고리의 전통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예장의 포(袍)에서 중국 복식의 영향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 나름의 것이어서 왕과 왕비의 법복(法服)과 면복(冕服), 문무관의 관복(冠服)이 중국 복식을 그대로 습용(襲用)하였던 것과는 다르다.

이 점은 우리 나라 여자 복식의 보수성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하겠다. 우리 나라 고유의 복식이 지닌 끈질긴 생명력과 전통성의 한 예증이기도 하다.

명부복은 일반적인 궁중·반가복식과 마찬가지로 예복과 상복(常服)으로 대별해 볼 수가 있다. 이 가운데 예복은 원삼(圓衫)과 당의(唐衣), 대란(大襴) 또는 스란[膝襴]치마로 구성된다. 원삼은 궁중과 반가에 공통된 예복이나 빛깔과 문양(紋樣)에 계급 차가 있다.

왕비의 홍원삼·용문에 대하여 명부의 것은 초록원삼에 화문(花紋)이며, 색실로 수놓은 봉(鳳) 흉배를 신분에 맞게 단다. 조선 말기 발기에서는 외명부인 군부인(郡夫人)의 원삼은 초록사 직금(織金)을 쓰고, 분홍색 생수 갑사와 부금 저고리 두벌과 1작(作)을 이룬 예를 볼 수가 있다.

당의는 반가에서 궁중 출입 때 입던 약식 예복이며, 대례복인 원삼의 받침옷으로도 착용되었다. 궁중에서는 처음에는 일상복으로 쓰이다가 후대에는 명부 등의 소례복으로 승격되고 있다. 당의에도 빛깔의 계급 차가 있어 명부는 대개 초록당의를 입었고 철에 따라 여름에는 홑당의를 입었다.

대란과 스란치마는 한가지로 무지기와 대슘치마를 받쳐 입지만 대례복과 소례복 치마로 구별된다. 대란치마는 스란단을 둘 이상, 스란치마는 하나만을 덧붙인 것이다. 왕비의 용문, 공주와 옹주의 봉문에 대하여 명부는 문자문(文字紋)과 화문을 썼다. 빛깔은 스란단의 바탕과 치마가 한가지로 남색 또는 홍색이었다.

이밖에 ≪상방정례 尙方定例≫와 ≪국혼정례 國婚定例≫에 내명부의 가례(嘉禮) 때 예복으로, 왕비 가례 때의 의대(衣襨)와 같은 노의(露衣)와 대장삼(大長衫)이 보이나, 그 형제(形制)는 자세하지 않다. 전반적으로 보면 왕비에게 법복이 따로 있는 것을 빼고는 명부의 예복은 왕비옷에서 체감한 격식이며 기본적인 형제에는 큰 차이가 없다.

명부의 상복은 치마·저고리의 전통양식을 기본으로 한 점에서 서민 예복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 감과 빛·형체·착장풍습에서 서민 예복과 엄격하게 구별되고 이들 중 어떤 것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금제(禁制)를 엄벌로 시행하였다. 귀족 예복의 전형인 명부복은 비단과 명주 등의 고급 옷감을 썼다.

그 빛깔은 오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 나이가 젊은 경우는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즐겨 입었다. 이 차림은 치마폭과 길이를 넓고 길게 잡은 것과 저고리가 곁마기인 것, 여러 겹의 옷을 끼어 입은 것 등이 특징이다. 즉, 저고리는 속옷인 속적삼과 당의를 합쳐 ‘저고리 3작’이라 한다. 치마의 속옷은 속치마·단속곳·바지(고쟁이)·속속곳 등이 일습을 이룬다.

정장을 할 때는 단속곳 위에 또 한번 너른바지를 덧입는데, 치마가 풍성하게 보이도록 단(緞) 네폭을 써서 가랑이 너비가 70㎝쯤 되게 만들었다. 따라서 대례복인 원삼 차림일 때의 명부복의 윗도리는 네 겹이 되며 아랫도리는 여러 겹으로 구성된다. 속옷도 비단과 명주, 세모시 등 철에 따라 고급 옷감을 썼다.

빛깔은 속저고리가 분홍인 것을 빼고는 대개 흰색이었다. 이와 같은 명부복의 화려함은 머리모양과 두식·패물 등에서 극치에 이른다. 그들의 특징적인 머리 모양은 큰머리[巨頭味, 떠구지머리]·어여머리[於由味] 등이다.

조선시대 여인의 머리 모양은 중기 이후로 가체(加髢)가 성행하여 여러 차례 금령(禁令)이 내려졌다. 이로 인해 쪽머리가 일반화되지만 궁중의식 등과 관련하여서는 예장 때의 큰머리와 어여머리를 그대로 허용했다.

그래서 이 머리 모양이 궁중과 반가 명부의 특징적인 머리 모양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머리에는 귀금속과 칠보로 만든 첩지·떨잠·뒤꽂이·비녀 등을 꽂아서 거창한 머리모양의 화려함을 더했다.

쓰개[冠帽]는 머리모양에 따라 변천이 있으나 화관(花冠)·족두리를 쓰고, 외출 때에는 너울과 면사(面紗)·전모(氈毛)로 낯을 가렸다. 내외(內外)를 위한 가리개로는 또 장옷이 있었다. 장옷은 서민층의 여인들이 이용하였고, 반가에서는 주로 쓰개치마를 사용하였다. 패물로는 노리개와 향주머니 등이 있었다.

노리개는 왕비로부터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즐겨 패용하였으나 그 자재와 기교에 등급이 있었다. 귀금속과 보석으로 꾸미고 칠보로 장식한 삼작노리개는 궁중이나 상류층 반가에서나 쓸 수 있었다.

향주머니와 장도 등 장신구에도 절도와 등차가 있게 마련이었다. 이처럼 화사한 명부복과 장식은 철과 계제(階梯)에 따라 알맞게 가려서 차려 입었다.

이상과 같은 명부복 차림은 조선시대 내내 변함없이 우리 나라 여복의 전통양식을 지켜왔으며 세부의 유행만이 있었다. 초기에는 모든 것이 중국제도를 좇는데 여복만은 이속(夷俗 : 오랑캐 풍속)을 따른다 해서 조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 그대로 두어 고치지 않았다.

중·후기에 들어서는 복식이 사치에 흘러 잇따라 사치금령이 내리는 중에, 여복은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는 좁아지고 치마는 더욱 풍성해졌다. 유물은 원삼과 당의 등 예복이 여러 점 남아 있다.

참고문헌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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