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신학교 ()

단체
1898년 황해도 재령에 세웠던 중등학교.
정의
1898년 황해도 재령에 세웠던 중등학교.
연원 및 변천

1895년 재령에 기독교장로회의 재령읍 교회가 설립되어 장로 송정신을 중심으로 아동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으며, 이를 모태로 1898년에 남녀공학의 명신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06년에 당시 최광옥(崔光玉)이 조직한 면학회(勉學會) 활동은 명신학교에도 큰 활력소로 작용하여, 같은 해에 장로 김창일이 교회당을 신축하면서 교실을 넓게 확보하였다.

1912년에는 목사 김태로의 노력으로 재령 남산 기슭에 예배당을 신축하여 교실로 사용하였다. 그 뒤 남녀학교가 분리 운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1919년 3 · 1운동 때 명신학교의 남녀학생이 서당 생도들과 합세하여 군중을 지도하며 시위하였는데, 시위 양상이 격렬하여 이에 대한 수습책으로 명신여학교만을 임시 폐교하였다가 다시 개교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1921년에는 남산예배당에 보통과 과정을 남겨두고, 임택권(林澤權)이 신축한 서부예배당으로 남녀 고등과를 이전하였다. 이와 함께 학교 이름을 ‘明信學校’에서 ‘明新學校’로 바꾼 것으로 추정되며, 정규 중등학교로는 인가를 받지 못한 채 4년제 고등과로 운영을 계속했다.

그 뒤 1929년 고등과 남자부를 북산 기슭에 신축한 근대적 교육시설로 이전함으로써 실제적인 남녀학교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933년 말부터 산하 교회와 각 분야 유지들로부터 성금 약 1만 원을 모아 새로운 교사(校舍)를 신축하여 1934년 봄에 준공하였다. 이때 학생은 약 4백 명 정도였다.

이에 따라 남자학교는 정찬유(鄭讚裕)의 재산 희사 등으로 1938년 4월에 5년제 정규 중등학교인 명신중학교(明新中學校)로 인가받았으며, 1940년에는 9학급 재학생 477명으로 늘어났다. 여자학교는 1940년에 김응석(金應石) 등의 출자로 새 교사를 마련하여 1941년 정규 중등학교인 4년제 명신고등여학교(明新高等女學校)로 인가받았으며, 1940년에 4학급 재학생 218명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명신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이면서 재령의 민간인들이 함께 육성한 민족교육기관이었으며, 재령을 중심으로 한 해서지방(海西地方)의 인재 양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26년 12월 28일 일제의 최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도 한때 명신학교에서 수학한 적이 있으며, 한국교회 사상 최초의 여자 선교사 김순효도 명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김도태도 명신(明信)중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참고문헌

「재령명신중학교동창회수첩」(재령명신중학교 동창회, 1980)
『朝鮮諸學校一覽』(朝鮮總督府 學務局,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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