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제례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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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대제 / 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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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제례에 쓰이는 음악.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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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악|응안지악
내용 요약

문묘제례악은 문묘제례에 쓰이는 음악이다. 문묘악·문묘제향악·석전악·응안지악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상고시대에 기원을 둔 것으로, 고려 때 북송에서 들여왔고 지금도 성균관 대성전의 봄가을 석전의식에 쓰이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중국의 고대음악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으로, 본고장 중국에서는 없어진 지 오래이며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다. 세종대에 박연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옛 전적을 참고하여 옛 주나라의 제도에 가깝게 바로잡아 완성했다. 악기는 8종의 아악기를 사용하여 팔음을 고루 사용하고 당악기나 향악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목차
정의
문묘제례에 쓰이는 음악.
내용

문묘(文廟) 석전(釋奠)에 쓰이는 음악. 일명 문묘악 · 문묘제향악 · 석전악(釋奠樂) · 응안지악(凝安之樂)이라고도 한다. 중국 상고시대에 기원을 둔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들어왔고, 지금도 성균관 대성전(大成殿)에서 봄 · 가을 석전의식에 쓰이고 있다. 문묘악은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음악이 아니고 중국 고대음악, 즉 아악(雅樂)에 속하며, 중국 전례의 고악인 당악(唐樂)과도 다르다. 동양 최고의 음악으로 본고장 중국에서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이며 오직 우리나라에만 남아 전한다.

1116년(예종 11) 6월 하례사인 왕자지(王字之) · 문공미(文公美)가 돌아오는 길에 송나라의 휘종(徽宗)이 주는 대성아악(大晟雅樂)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 이 대성아악을 원구 · 사직 · 태묘(太廟)의 제향과 더불어 문선왕제(文宣王祭) 곧 문묘 석전에 썼다.

조선 초기인 1398년(태조 7)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지금의 성균관 자리에 문묘를 건축하였고, 악장은 고려조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음악은 고려 말기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지 못하다가 세종박연(朴堧) 등이 중심이 되어 『주례(周禮)』 · 『통전(通典)』 · 『악서(樂書)』 · 『석전악보(釋奠樂譜)』 등 중국의 옛 전적을 참고하여 아악을 만들고 팔음(八音)을 구비하여 『아악보(雅樂譜)』를 만들어서 옛 주(周)나라의 제도에 가깝게 바로잡았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문묘악은 다른 궁중음악과 더불어 흩어졌으며, 광해군『악학궤범』을 기준으로 복구하였지만 이어서 병자호란으로 일시 중단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아악 복구사업을 계속하다가 영조 때에 이르러 옛모습에 가깝게 바로잡았다. 그러나 성종 때보다 규모가 작았으며 이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악기만을 사용하고 당악기나 향악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아악기는 그 제작 재료에 따라 쇠[金] · 돌[石] · 실[絲] · 대[竹] · 바가지[匏] · 흙[土] · 가죽[革] · 나무[木] 등 모두 8종의 재료로 된 것인데, 문묘제례악에는 이 8종의 악기, 곧 팔음이 하나도 빠짐없이 고루 사용되는 것이 우선 다른 음악과 크게 다르다.

팔음이 구비되기 위해서는 생황이 들어가야 하고 순수한 아악기를 고수하려면 박이 제외되어야 하지만, 박은 악장격인 전악(典樂)이 들고 일종의 지휘봉에 해당하는 악기인만큼 함께 사용해도 무리가 없다. 이 박을 든 악관을 집박(執拍)이라고 한다.

연주형식은 당상(堂上)에 악기를 배치한 등가(登歌)와 당하(堂下)에 악기를 배치한 헌가(軒架) 두 곳에서 교대로 주악을 담당하는 형식이다. 등가는 금(琴)과 슬(瑟) 등의 현악기와 노래[歌:導唱]가 있어 섬세한 대신 헌가는 진고(晉鼓) · 노고(路鼓) · 노도(路鼗) 따위의 큰북과 여타의 북 종류들로 자못 웅대하다.

특히 악기 배치는 음양사상에 따르는데 동편에는 음악을 시작하는[樂作] 악기가 배치되고 서편에는 음악을 그치는[樂止] 악기가 배치된다. 음악의 시작과 끝이 이에 따라 행하여지는데 동편의 특종 · 축과 서편의 특경이 각각 시작과 종지에 관련된다.

현행 문묘제례악에 쓰이는 악기의 특징을 보면 12율(12반음)만 낼 수 있는 악기( · · · )와 12율4청성(16반음)을 낼 수 있는 악기( 편종 · 편경 · · )로 되어 있다.

문묘제례악은 『세종실록』 권137과 147, 그리고 『악학궤범』 권2에 악장과 함께 전해오며, 원나라 임우(林宇)의 『대성악보(大晟樂譜)』 가운데서 채택한 것이다. 다음은 현재 불리고 있는 악장과 곡의 일례이다.

황종궁(黃鐘宮)

黃南林姑 太姑南林 應南蕤姑 南林黃太

大哉先聖 道德尊崇 維持王化 斯民是宗

원래 문묘제향악은 위의 황종궁을 주1하여 얻은 11곡과 송신 협종궁, 송신 임종궁, 송신 황종궁 등 3곡을 더하여 15궁, 즉 15곡인데 오늘날 실제 제례에 사용되는 곡은 6궁, 즉 황종궁 · 중려궁 · 남려궁 · 이칙궁 · 고선궁 · 송신 황종궁이다. 음계는 7음계로 되어 있으며 음길이가 매 음마다 3초 정도로 일정하게 뻗은 다음 마디 끝은 1초 정도 위로 소리를 밀어올리며 끊는다.

한 마디는 4음이며 한 곡은 모두 8마디 32음으로 되어 있다. 또, 매마디 끝에는 북을 두 번 쳐서 그 북소리로 한 마디의 끝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음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악장(樂章)이라고 하는데, 한 음에 한 글자씩 4자 1구로 모두 32자로 되어 있다. 이 노래를 도창(導唱)이라고 하며, 부르는 악사를 도창악사(導唱樂士)라 한다.

이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주2으로 시작하여 주음으로 끝나는 것과 곡의 주3가 하행종지로 되어 있으며, 한음한음의 끝을 위로 밀어올린 다음 끝을 끊어서 일종의 선율선을 단절한다는 것, 또한 음역이 12율4청성(16반음)으로 제한되어 있고 농음(弄音:떨림)이나 식음새(장식음)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① 영신(迎神):당상의 집례(執禮)가 헌가에서 「응안지악」과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연주하라고 청하면 집사악사(執事樂師)는 ‘드오(擧麾:휘를 주4’를 불러 악작을 지휘한다. 그러면 집박이 박을 한번 치고 고축(鼓柷) 주5이 있은 다음 진고를 1통(通) 치는데 이것을 세번 반복한 뒤 박을 한번 치면 비로소 모든 악기가 영신악을 연주한다(헌가의 음악을 시작하는 절차는 모두 이와 같다).

영신악은 황종궁을 세 번, 중려궁을 두 번, 남려궁을 두 번, 이칙궁을 두 번씩 반복하여 모두 아홉번(九成) 연주하는데, 여덟번째 즉 이칙궁 1성 처음에 초헌관 이하가 함께 사배(四拜)한다. 곡이 다 끝나면 악사는 ‘지오(偃麾:휘를 주6’를 불러 악지(樂止)를 지휘하며 집박은 급히 박을 세 번 이상 치고 동시에 어(敔)를 세 번 긁은 뒤 음악이 모두 끝난다(헌가음악의 끝은 모두 이와 같다). 일무는 문무(文舞)를 춘다.

② 전폐례(奠幣禮):집례가 등가에서 「명안지악(明安之樂)」과 「열문지무」를 연주하라고 청하면 악사는 ‘드오’를 불러 악작을 지휘한다. 그러면 등가에서 남려궁을 연주하는데 그 행례의 느리고 빠름에 따라 주악과 일무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헌관이 예를 마치고 나오면 급히 박을 치고 동시에 특경을 한 번 치고 어를 세 번 긁은 뒤 음악이 끝난다.

음악을 시작할 때도 대개 영신의 경우와 같으나 첫째 박소리 다음에 특종을 한 번 치고 다음 박소리 앞에 특종을 또 한번 치는 것이 다르다. 일무는 문무를 춘다.

주7이 준소(樽所)에 가서 감작(監酌)을 끝내면 집례는 등가에서 「성안지악(成安之樂)」과 「열문지무」를 연주하라고 청하고 악사는 악작을 지휘한다. 그러면 남려궁이 연주되고 초헌관이 공자(大成至聖文宣王) 신위 앞에 나아가 술을 드린[獻爵] 뒤에 엎드렸다가 일어나 뒤로 물러나 꿇어앉으면 음악을

대축(大祝)주8이 축문을 다 읽고 나면 박소리와 동시에 절고를 세 번 쳐서 다시 음악이 남려궁을 연주한다. 헌관이 차례로 안자(顔子) · 증자(曾子) · 자사(子思) · 맹자(孟子) 등 신위 앞에 헌작하고 나오면 음악이 그친다. 그 행례의 지속(遲速:느리고 빠름)에 따라 주악과 일무에 정수(定數)는 없다.

④ 공악(空樂):초헌관이 예를 마치고 제자리에 돌아오면 집례는 헌가에서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하라고 청한다. 그러면 고선궁을 한 번 연주하고 그 사이에 문무가 나가고 무무(武舞)가 들어선다.

그러나 요즈음은 인원은 교체하지 않고 문무 때 쓰던 주9을 피변관(皮弁冠)으로 바꾸고 손에 든 약(籥)과 적(翟)을 무무의 간(干)척(戚)으로 바꾸어 들 뿐이다.

⑤ 아헌례(亞獻禮):아헌관이 준소에 가서 감작을 끝내면 집례는 헌가에서 「성안지악」과 「소무지무(昭武之舞)」를 연주하라고 청한다. 음악은 헌가에서 고선궁을 연주하고 아헌관이 공자와 그 주10의 신위 앞에 차례로 나아가 헌작하는 절차는 초헌례와 같다. 다 끝나면 음악이 그치는데 주악과 일무는 끝날 때까지 계속되고 일무는 무무를 춘다.

⑥ 종헌례(終獻禮):행례의 절차와 음악의 절도는 아헌례와 같고 예식이 끝나면 일무는 퇴장한다.

주11이 끝난 뒤 참배자들의 첨향례(添香禮)가 있고 다음에 초헌관이 음복(飮福)하는 곳에 나아가 술과 포(脯)를 음복하고 제자리에 돌아오면 헌관이 사배한다. 다음 집례가 등가에서 「오안지악(娛安之樂)」을 연주하라고 청하면 남려궁을 한 번 연주하고 이 사이 제관은 제기를 철수한다. 집사는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음악을 그치게 한다.

⑧ 송신(送神):집례가 헌가에서 「응안지악」을 연주하라고 청하면 송신 황종궁을 연주하고 초헌관 이하 사배한 뒤 집사는 그 곡이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음악을 그치게 한다.

⑨ 망료(望燎):초헌관이 망료하는 자리에 가면 집례는 헌가에서 「응안지악」을 연주하라고 청한다. 그러면 송신 황종궁을 연주한다. 축문과 폐백을 다 태우고 나면 음악을 그치게 하는데 예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제례 때 추는 춤을 일무라 한다. 일무는 무원의 수에 따라 팔일무(八佾舞) · 주12 · 주13 · 주14가 있는데, 현재 석전에서 추는 일무는 팔일무로 64명이 춘다. 춤의 내용은 문무 · 무무로 구분되고 문무는 오른손에 적, 왼손에 약을 들고, 무무는 왼손에 간, 오른손에 척을 들고 춘다. 이 일무는 중국 고대의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다.

참고문헌

『고려사』
『세종실록』
『증보문헌비고』
『악학궤범』
『국악감상』(성경린, 국민음악연구회, 1976)
『국악총론』(장사훈, 정음사, 1976)
『한국음악론고』(성경린, 동화출판공사, 1976)
『국악전집』 9(국립국악원, 1981)
「한국과 중국의 현행문묘악비교」(이혜구, 『한국음악논총』, 수문당, 1976)
주석
주1

악곡 전체를 다른 조로 바꿈. 전체를 높은 음정 또는 낮은 음정으로 옮기는 것으로, 조옮김 악기의 경우 필수적이며, 노래할 때 각자의 음역에 맞추기 위하여 쓰이기도 한다.    우리말샘

주2

음계의 첫째 음. 음계의 기초가 되는 음으로 장조에서는 ‘도’, 단조에서는 ‘라’이다.    우리말샘

주3

끝마쳐 그침. 또는 그치게 함.    우리말샘

주4

종묘 제례 따위에서,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휘(麾)를 들라고 지휘하는 구호. 휘를 듦과 동시에 박을 한 번 친 다음 연주가 시작된다.    우리말샘

주5

아악 연주에서, 축을 세 번 치고 이어 북을 한 번 치는 것을 세 번 되풀이하는 연주 방법.    우리말샘

주6

종묘 제례 따위에서, 음악의 끝을 알리는 신호로, 휘(麾)를 눕히라고 지휘하는 구호. 이에 따라 휘를 뉨과 동시에 박을 세 번 이상 치면서 음악은 끝난다.    우리말샘

주7

조선 시대에, 종묘 제향 때에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일을 맡아보던 제관.    우리말샘

주8

종묘나 문묘 제향 때에 초헌관(初獻官)이 술을 따르면 신위(神位) 옆에서 축문을 읽던 사람. 또는 그런 일을 맡아보던 벼슬.    우리말샘

주9

문관(文官)이나 유생(儒生)이 쓰던 관. 지위(地位)에 따라서 관량(冠梁)의 수가 달랐다.    우리말샘

주10

배향.

주11

제사를 지낼 때에, 술을 세 번 부어 올림. 또는 그때 쓰는 술잔.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2

일무(佾舞)의 하나. 36명 또는 48명이 여섯 줄을 지어서 추는 춤이다.    우리말샘

주13

일무(佾舞)의 하나. 16명 또는 32명이 네 줄을 지어서 추는 춤이다.    우리말샘

주14

일무(佾舞)의 하나. 4명 또는 16명이 두 줄을 지어서 추는 춤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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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성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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