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 ()

백마강
백마강
자연지리
지명
충청남도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명칭.
이칭
이칭
백강, 사하(泗河), 백촌강(白村江)
정의
충청남도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명칭.
개설

일반적으로 금강변 부여읍(扶餘邑) 정동리의 앞 범바위[虎岩]에서부터 부여읍 현북리파진산 모퉁이까지의 약 16㎞ 구간을 백마강이라 한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는 금강은 서쪽으로 꺾여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웅진(熊津) 또는 금강이 되고 유구천(維鳩川)을 합하여 남쪽으로 곡류하면서 부여군에 이르러 고성진(古省津) 또는 백마강이 된다. 금강은 백마강을 지나 논산천(論山川)을 합하고 강경을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황해로 들어간다.

명칭 유래

백마강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았던 바위를 조룡대(釣龍台)라 하고 강의 이름도 사하(泗河)에서 백마강(白馬江)으로 바뀌었다고하나, 백제 말기보다 1백 60여년 앞선 무녕왕시대의 기록에 이미 금강을 ‘白江(백강)’으로 표기했던 사실이 있고 역사적으로 말(馬)을 ‘크다’는 뜻으로 써온 것을 감안할 때 백마강은 곧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환경

우리나라 하천이 대부분 하류에서 곡류하고 있는데, 백마강 유역은 금강 하류 중에 곡류가 뚜렷한 곳이다. 백마강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공주를 지나 청양군 청남면, 부여군 부여읍 및 규암면에 인접한 지역이다. 이 일대에서 백마강은 서남류하는데, 북동으로부터 많은 강이 흘러들어 부여 부근에서 지천, 은산천(恩山川), 구룡천, 금천(金川)이 합류한다. 백마강과 이들 하천이 만나는 지역에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동남부 구릉지대는 백마강 연변의 부여읍 남부와 장암면, 석성면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해발 100m 정도의 낮은 저산성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다. 남동부 저지대는 동남부 구릉지대의 남쪽, 즉 양화면, 임천면, 세도면의 금강본류 유역과 석성면, 초촌면의 석성천 유역에 발달된 충적평야지대로서, 이 지대는 중앙부 저지대의 충적평야와 근본적으로 같은 발달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평야지대이다.

백마강의 기온분포는 평균 11.8℃이며, 최저 ­2.5℃(1월), 최고 25.3℃(8월) 정도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311㎜이며 강수량의 60%가량이 여름철인 6∼9월 사이에 집중되고 있으며 그 중 7월 강수량이 30%를 차지한다.

형성 및 변천

백마강의 지질은 부여군의 지질과 비슷하며 부여군의 지질은 대체로 가장 오래된 선캄브리아기 운모편암과 편마암과 중생대의 쥐라기에 나타난 남포층과 화강암류, 백악기에 나타나는 공주층군, 신생대 제4기에 나타난 충적층으로 확인되었다.

부여군 일대는 차령산맥의 여맥이 침식되어 산세가 온유하여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백마강은 부소산(扶蘇山)을 감돌아 크게 북동에서 남서로 돌아 흐르면서 부소산 동쪽을 침식하여 이른바 공격사면(攻擊斜面)의 절벽을 발달시키고 서쪽에는 넓은 퇴적사면(堆積斜面)을 발달시킨다.

백마강 동안(東岸)에는 인구 약 2만 6천 명이 사는 부여읍이 위치하며, 읍의 남반부는 서안(西岸)의 규암(窺巖)의 공격사면에 대한 넓은 퇴적사면이 위치하고 있다. 백마강의 공격사면은 수심이 깊어 규암나루와 같은 금강 하운의 요충이 되었다. 한편 백마강 일대의 퇴적사면은 범람원이 되어 하상의 퇴적 상승으로 하중도(河中島)나 배후습지(背後濕地)로 변한 곳이 많으며 곳곳에 하적호(河跡湖)도 남아 있다.

부여읍·규암면·장암면·세도면·양화면에는 백마강 양안에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평야가 넓게 분포한다. 이들 평야 지대는 논으로 개간되어 우리나라의 주요한 미곡 생산지가 되고 있다. 뒤쪽에 천연의 백마강을 끼고 앞으로 광활한 평야를 가지고 있는 부여는 백제 중흥의 웅지를 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백마강 일대는 538년(성왕 16)에 국도를 웅진에서 사비성(泗沘城)인 부여로 옮겨, 660년(의자왕 20)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의 심장부였다. 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에는 부소산성·군창지(軍倉址)·고란사(皐蘭寺) 등의 사적이 있으며, 동쪽 끝 약 100m 높이의 단애에는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의 낙화암(落花巖)이 있다.

이 지점이 바로 백마강 곡류의 공격사면이다. 백제 때의 요새로 660년에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당나라 군사가 쉽게 상륙하여 백제군을 치고 신라군과 연합하여 사비성을 공격하였던 곳이다.

663년(문무왕 3)에 백제 부흥을 꾀하는 백제와 일본의 수군(水軍)과 나당연합의 수군이 격전한 백촌강(白村江)의 싸움터도 여기이다.

현황

규암나루은 백마강의 주요 나루터였으나 백제대교의 건설로 나루터취락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다만 농업지역으로 남아 있다.

토사의 퇴적이 심하여 매년 하상(河床)이 높아지고 있으며 범람이 자주 일어나 홍수 상습지역이다. 백마강 유역의 넓고 저평한 평야를 유효하게 이용하려면 인공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고 경지화를 도모하는 한편, 부여 사적지와 더불어 백마강의 자연을 결합하여 관광자원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참고문헌

『백마강(상)』(부여군, 2008)
『부여통계연보』(부여군, 2007)
『한국지지(韓國地誌)·지방편Ⅱ·』(건설부국립지리원, 1984)
『한국지명요람(韓國地名要覽)』(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국가통계포탈(http://www.kosis.kr)
하천관리지리정보웹시스템(http://www.river.go.kr)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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