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동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벽동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벽동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중북부에 위치한 군.
정의
평안북도 중북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초산군, 남쪽과 서쪽은 창성군과 접하고, 북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만주지방인 안동성(安東省) 관전현(寬甸縣)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13′∼125°45′, 북위 40°20′∼40°46′에 위치하며, 면적 1,217.14㎢, 인구 5만 2924명(1943년 현재)이다. 7개 면 46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벽동면 이동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압록강 연안을 저면(底面)으로 하고 남단의 양령(兩嶺, 776m)을 정점으로 하는 삼각지형을 이룬다. 강남산맥이 남부에 동서로 뻗어 있고, 동부에는 증봉(甑峰, 1,093m)·사봉산(四峰山, 1,049m)·운제산(雲梯山, 1,006m), 서부에는 반덕산(盤德山, 1,159m)·비래봉(飛來峰, 1,470m)·입봉(笠峰, 1,191m)·단풍덕산(丹楓德山, 1,159m) 등이 군의 경계를 따라 잇달아 솟아 있으며, 북부에는 구봉산(九峰山, 395m)이 있어, 군 전체가 험준한 산악지대로 되어 있다.

벽동군과 초산군과의 경계를 대암산(大巖山)과 동림산(東林山)에서 발원한 충만강(忠滿江)이 북류하고, 군의 중앙을 동천·남천 등이 북류해 북부 경계를 서류하며, 벽동천은 신동천(新洞川)·성남천과 대덕산 아래에서 합류해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들 하천은 지류가 많고 곡류가 심해 유역 곳곳에 범람원을 발달시키며, 압록강 연안에 좁은 평야가 있다.

대체로 남부가 산악지대로 높고, 북쪽 압록강 연안을 향해 완경사로 되어 있다. 지질은 편마암과 현무암층이다. 만주와 접한 내륙지방이므로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 한서의 차이가 크다.

연평균기온 7.3℃, 1월 평균기온 -14.5℃, 8월 평균기온 24.3℃로 여름과 겨울의 연교차가 무려 39℃에 달한다. 연강수량은 802.6㎜로 비가 적은 편이다.

역사

[고 대]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된 적이 없으나 이웃의 의주군 미송리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유적이 발견되었으며, 송연리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청동기시대에는 이곳에 사람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고구려의 성장과 함께 고구려의 초기 도읍이었던 통구(通溝)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일찍이 그 지배하에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압록강을 따라 그 양쪽에 고구려고분이 산재해 있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발해시대에는 서경압록부(西經鴨淥府)에 속해 있었다.

[고 려]

발해가 망한 뒤 만주의 퉁자강(佟佳江) 일대와 압록강 중류지역의 초산·벽동·위원·강계·자성·후창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발해 유민이 열만화(烈萬華)를 추대해 정안국(定安國)을 세워 거란에 대항했으나 985년(성종 4)에 멸망한 뒤, 이 지역은 오랫동안 거란의 세력권에 들어가 있었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북진정책을 추진했으며 성종대에는 압록강변에 도달해 청천강 이북, 압록강 이남의 평안북도 서쪽 땅과 평안남도 지역에 이르는 곳을 수복하였다. 1044년(정종 10)에는 천리장성을 완성하면서, 장성 이북의 벽동·창성·초산·위원·강계·자성·후창 일대는 야인에게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군은 여진족의 지배 아래 오랫동안 임토(林土)·벽단(碧團)이라 불렸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강행하면서 이곳에 이르러 임토를 음동(陰潼)이라고 고치고 벽단을 여기에 속하게 하는 한편, 남쪽의 백성들을 이곳으로 많이 이주시켰다.

[조 선]

1403년(태종 3) 벽단과 음동을 합해 벽동으로 고치고 군으로 개편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432년(세종 14)의 호수는 416호, 인구는 2,726명이었고 세조 때 진(鎭)을 설치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의 호수는 8,228호, 인구는 3만 3918명이었다.

[근 대]

1895년의 지방관제 개혁 당시 벽동은 군으로 개편되어 의주부에 속하였다. 다시 1896년에는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평안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07년 19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수는 5,297호, 인구는 3만 3700명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8개 면으로 축소되었으며, 1940년 수풍발전소의 건설로 군의 일부가 수몰됨에 따라 다시 7개 면으로 줄어들었다. 1943년 당시의 호수는 9,304호, 인구는 5만 2924명이었다.

압록강에 면한 이곳은 만주와 쉽게 교통할 수 있어서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3·1운동 때는 천도교인이 주동이 되어 4월 1일 대덕산 기슭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고 읍내로 진출하다가 일본 수비대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집회인수는 4,600명, 사망자는 236명, 투옥자는 32명이었다고 한다.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가 조직되면서 초대군감에 김석항(金碩伉), 경감에 정석태(鄭錫台)가 임명되었다. 무장독립군의 활약도 치열하게 전개되어 1920∼1926년까지 44회에 걸쳐 이 군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유물·유적

벽동은 고구려 멸망 후 오랫동안 말갈족·거란족·여진족들이 살던 땅이어서 조선시대 이전의 유물과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 북방변경의 방비를 위해 설치한 벽단진성과 대파현진성지(大坡峴鎭城址)를 비롯해 1403년(태종 3)에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벽동을 신설하면서 쌓은 벽동성과 사방의 누곽이 남아 있다.

국경수비를 위해 설치했던 소길호보(小吉號堡)·추구비보(湫仇非堡)·광평보(廣坪堡) 등은 기록으로는 남아 있으나 폐허화되었다. 1940년 수풍댐 건설과 함께 약간 남아 있던 흔적조차 수몰되었다. 대파현진성지는 압록강 연안에 위치해 만주의 석주자(石柱子)를 마주보는 요새였다.

사찰로는 고려시대에 세운 청암산의 중흥사, 사봉산의 심원사, 오성봉의 오성암, 달각산의 상암사 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1397년(태조 6)에 세운 벽동향교가 동주봉 중턱에 남아 있으며, 압록강의 수몰로 인해 쪽배모양의 수중시가로 남은 읍내 남쪽에 위치하는 남장대 정상에 오사헌이 있다.

이 밖에 구봉산 중턱의 구봉정, 구봉산 아래 벽동천변의 옥천정, 군 북쪽 1㎞ 지점에 군사조련을 위해 세운 연무정(鍊武亭), 군 관아 앞의 세병루(洗兵樓) 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모두 철거되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벽동향교와 구봉서원(九峰書院)이 있다. 벽동면 이동의 구봉서원은 1697년(숙종 23)에 창건했으며 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 형제를 배향하고 있다.

벽동군은 벽지이지만 숙종대에 남인의 집권으로 인해 유배된 선비나 국가의 북진·이주정책으로 옮겨와 살게 된 인사들의 후손이 정착해 살았기 때문에 교육열이 높고 단결도 잘 되었다. 따라서 마을마다 서당이 설립되었고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강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7년 구봉서원터에 벽동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가은(李稼殷)이 1909년에 신명학교(新明學校), 1911년에 신명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20년대 이후 1면1교정책에 의해 1933년까지 8개의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34년에는 송삼간이학교(松三簡易學校)가 세워졌으며, 1936년까지 4개의 간이학교가 설립되었다.

1943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1개, 국민학교 8개교, 간이학교 4개교, 사립학교 11개교가 있다. 종교기관은 천도교종리원 1개, 개신교교회 15개가 있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명사또이야기〉와 〈천복에 관한 이야기〉 등이 전해 오는데, 〈명사또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고을에 서로 친한 두 사람이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오기로 하고 함께 떠났는데, 몇 년 후에 한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 돌아왔으나 다른 한 사람은 다시 오랜 세월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자, 그 부인이 사또에게 진상을 알아봐 달라고 호소하였다.

사또가 진상조사를 요청한 부인에게 돈을 벌어 온 사람이 처음에 무어라 하더냐고 물으니, 자기보다 먼저 돈을 벌어 떠났는데 이상하다고 하더라고 해, 다시 사또가 누구를 찾더냐고 물으니, “삼죽어머니, 삼죽어머니” 하고 부인을 찾았다고 하자, 다시 삼죽이 누구냐고 물으니 자기 아들 이름이라 하였다.

이에 사또는 돈 벌어 온 이웃 남정네를 붙잡아다가 문초를 하면서 “자기보다 친구가 먼저 온 것이 분명하면 친구를 찾을 일인데, 친구를 찾지 않고 삼죽어머니를 찾은 것은 친구와 함께 오다가 돈이 욕심나서 죽이고 왔기에 삼죽어머니를 찾은 것이 분명하다.” 하고 호통을 치자, 자기 죄가 탄로되었음을 짐작하고 사실대로 친구를 죽인 경위를 설명, 죄를 자백하였다. 그 뒤부터 벽동사또는 명사또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천복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두메산골에 한 부부가 자식도 없고 재산도 없이 살았는데, 가난이 지겨워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천복을 누릴 것이라 하였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 밤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 어느 곳에 가면 금덩이가 많으니 가서 땅을 파 보라고 하였다.

잠을 깬 두 사람은 신령이 꿈에 일러 준 곳에 가서 땅을 파 보니 과연 금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고지식한 부부는 이것은 지복(地福)이지 천복이 아니니 다시 묻어 두자고 하고 돌아왔다. 이것을 숨어서 본 이웃 욕심쟁이가 금을 다 캐서 자루에 넣어 집에 가지고 와 보니 모두 뱀이었다.

이웃 욕심쟁이는 화가 나 그 부부 때문에 공연히 뱀만 자기 집에 가져왔다고 그 분풀이로 이웃집 지붕에 버렸다. 그런데 이웃집 지붕을 통해 방바닥에 쏟아진 것은 금덩이였다. 가난한 부부는 지붕을 통해 금덩이가 생기자 이것이 천복이라 해 재산을 늘려 가면서 자식도 많이 낳고 잘살게 되었다.

이 고장의 민요로는 〈꼬리따기〉가 있다. 이것은 혼자 부르기도 하고 둘이 서로 주고받기도 하는데, 낭독조·문답조·회화조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른다. 남녀노소가 즐겨 부르나, 특히 남자아이들이 많이 부른다.

민속놀이 중에는 동줄다리기가 있는데, 동쪽마을과 서쪽마을이 서로 겨루는 놀이이다. 암줄과 수줄을 따로 만들어 두 줄을 머리부분에서 연결시켜 양편이 서로 자기편 쪽으로 잡아끄는데, 암줄·수줄의 길이와 크기는 모두 같으나 암줄의 머리는 수줄의 머리가 들어갈 만큼 크게 만든다.

이 줄다리기는 양편에 각기 1명의 도편장과 수십 명의 독전대원을 뽑는데, 인원수를 같게 해 군데군데 배치한다. 농악을 치기도 하고 작은 깃발을 흔들기도 해 자기편을 격려하고, 상대편을 향해 폭죽을 터뜨려 기세를 올리며 상대편의 기를 꺾기도 한다. 서로 줄을 끌어당기다가 끌려가게 되면 모두 줄 위에 올라타 끌려가는 것을 막기도 한다.

승부는 많이 끌어당긴 쪽이 이기게 되며, 이긴 마을은 여장한 소년들을 가마나 무등을 태우고 농악을 치면서 상대편 마을도 돌고, 동네 유지나 부잣집에 들어가 돈이나 음식을 얻어 마을 넓은 곳에 모여 즐겁게 논다. 이 놀이는 압록강 부근의 여러 군에서 행해지는 거군적인 놀이이다.

산업·교통

이 군은 산악지대이므로 논농사는 드물고 대부분이 밭농사이다. 1943년 현재 총농경지 99.79㎢로 경지율이 8.2%에 불과하다. 그 중 논은 5.16㎢로 총경지면적의 5%이며, 밭은 94.62㎢로 95%를 차지한다.

따라서 주요 농산물은 조·콩·옥수수·기장·메밀 등의 잡곡과 고구마·감자·무·배추 등의 소채류이다. 이 중 콩의 생산이 특별히 많으며, 송서면의 벽단벌에서 나는 쌀은 벽동미(碧潼米)라고 해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부업으로는 축우·양돈·양잠·양봉 등이 활발하며, 특히 소는 벽동우(碧潼牛)라고 해 군의 특산물이다. 임산물로는 삼송(杉松)·낙엽송 등의 압록강재와 단목(檀木) 등의 특수재 및 시탄용 활엽수 등이 생산된다.

광업으로는 금·은·흑연 등의 매장량이 비교적 많으나 가동률이 부진한 편이며, 발은·오북·금사 등의 광산에서는 금·은, 연수광산에서는 질이 좋은 형석이 채굴된다. 공업은 가내수공업이 중심이며, 생사·마포·면포·견직·주류 등을 생산한다.

상업활동은 5일정기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1830년대 우면에 3·8일장인 우장이 있었으며, 거래된 품목은 쌀·조·콩·팥·깨·개석잠풀·포목·쏘가리·잉어·소금·배·잣·놋그릇·철물·나무그릇·옹기·사기그릇·담배·돼지·닭·소 등이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902년에는 우장·읍내장·평장(平場)·동장(東場)·서장(西場) 등 5개의 장이 있었다.

1935년 현재 벽동면 이동에 벽동장, 우시면 우하동에 우시장, 가별면 별상동에 가별장, 송서면·사서면에 벽단장이 있으며, 우시장·가별장은 가축시장으로 유명하다. 이 중 우시장의 규모가 제일 크다. 주요 거래품은 농산물과 축산물이며, 벽동군의 콩과 소는 박천·신의주 등지로 많이 반출되었고, 포목·소금·석유 등의 생활필수품을 사들여 왔다.

도로망은 신의주∼혜산진간의 2등도로가 국경지대인 압록강 연안을 따라 동서로 통과한다. 또 벽동을 기점으로 해 남쪽으로 권회면을 지나 양령을 넘어 창성군 대유동에 이르는 지방도가 있다. 그러나 각 면 소재지에 이르는 도로가 잘 갖추어지지 않아 교통이 불편하다. 압록강 연안에서는 수운을 이용한 교통이 발달하였다.

명승지로는 국사령 기슭의 적수탕이라는 폭포가 유명하고, 가별면 가하동 연수리에는 약수가 있는데 위장병과 비뇨기 계통의 병에 효험이 있어 찾는 이가 많으며, 특히 추석 전후로 더욱 효능이 있다고 해 이 때 병약자가 더 많이 모여든다.

읍·면

[가별면 加別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224.32㎢, 인구 6,18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별하동이다. 본래 가면(加面)과 별면(別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 면이 합치면서 가별면이라고 개칭되었다.

동쪽에는 사봉산·고암령(高巖嶺, 833m)이 있고, 서쪽에 증봉·연목령(椽木嶺, 905m), 남쪽에 두릉령(杜陵嶺, 765m), 북쪽에 운제산·조골령(照骨嶺, 592m) 등이 연달아 솟아 있어 대부분이 산악지대이다.

두릉령과 고암산 방면에서 발원한 가막천(加幕川)이 면의 중앙을 북류해 흐르다가 동쪽으로 꺾어진 뒤 다시 북류해 초산군과의 경계를 흐르면서 충만강과 합류한다. 이 합류지점에 평지가 이루어져 있다.

내륙산간지역이므로 주요 농산물로 콩·조·수수·기장·감자·고구마 등이 생산되며, 양돈·양잠·양봉·축우 등도 활발하다. 산지에서는 삼송·낙엽송·단목 등의 목재생산이 많다. 가하동 연수리에 약수터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 사립학교 1개교가 있다. 별하(別下)·별상(別上)·가상(加上)·가중(加中)·가하(加下) 등 5개 동이 있다.

[권회면 鸛會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229㎢, 인구 6,19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권하동이다. 본래 권면(鸛面)과 회면(會面) 등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 면을 합해 권회면으로 개칭되었다.

동쪽은 재당산(在堂山, 919m)과 증봉의 능선이 뻗어 있고 연목령이 가별면과의 경계에 있다. 서쪽은 단풍덕산이 있어 그 맥이 면 전체에 뻗어 있고 남쪽에 양령이 있다. 면의 중앙을 서동천이 북으로 관류하고, 증봉에서 발원한 가막천의 지류가 사상동에서 이에 합류하며 이들 하천의 합류지점에 약간의 평지가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콩·조·수수·기장·감자·고구마 등이 생산되며 축우·양돈·양잠·양봉 등이 활발하다. 주변의 삼림에서 압록강재와 단목 등의 특수재가 생산된다.

도로는 벽동∼대유동간의 지방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난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사립학교 1개교가 있다. 권하(鸛下)·권상(鸛上)·회상(會上)·회하(會下)·사상(社上)·사하(社下) 등 6개 동이 있다.

[벽동면 碧潼面]

군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05.17㎢, 인구 1만 159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일동이다. 본래 군부면·평하면(平下面)·평상면(平上面) 등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벽동면과 대평면(大平面)으로 나뉘었고, 1940년 수풍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자 대평면의 일부 잔여지역이 벽동면에 병합되었다.

동쪽에 자당산(慈堂山, 929m)·재당산·운제산이 있고 서남쪽에 박리산(朴李山, 596m)이 있어 면을 둘러싸고 있으며, 중앙에 동주봉과 구봉산이 솟아 있다. 동주봉 서쪽으로 동남천·남천·신동천이 북류하며, 면 북쪽의 압록강으로 흘러들면서 주위에 평지가 전개된다. 면 전체는 비교적 저평한 분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로는 콩·팥·조·수수·고구마·감자 등이 생산되며, 쌀은 약간 산출된다. 부업으로 축우·양잠·양봉 등이 활발하다. 도로는 북부를 신의주∼혜산진간의 2등도로가 동서로 지나며, 중앙을 벽동∼대유동간의 지방도가 남북으로 통과한다.

명승고적으로는 벽동향교·남장대·적수탕·구봉산 등이 손꼽힌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1개, 국민학교 2개교, 사립학교 4개교가 있다. 일(一)·이(二)·상평(上平)·하평(下平)·평내(平內)·평외(平外)·동상(東上)·동하(東下)·상서(上西)·하서(下西) 등 10개 동이 있다.

[성남면 城南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172.64㎢, 인구 5,21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남상동이다. 본래 성면(城面)과 남면(南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 면을 합치면서 성남면으로 개칭되었다.

서북부 송서면과의 경계에 비래봉이 솟아 있고, 남부에 입봉·단풍덕산·연풍산(連豐山, 758m)이 연이어 있으며, 북부에는 박리산이 있어 면의 대부분이 산지로 되어 있다. 비래봉과 입봉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성상동에서 합류해 남천을 이루어 북류한다.

주요 농산물은 콩·조·수수·기장·감자·옥수수·고구마 등이며 양돈·축우·양잠 등이 활발하다. 산지에서는 압록강재와 단목 등의 특수재가 생산된다.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아 교통이 매우 불편하다. 명승지로는 비래봉이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 사립학교 1개교 등이 있다. 남상(南上)·성상(城上)·성중(城中)·성하(城下)·남중(南中)·남하(南下) 등 6개 동이 있다.

[송서면 松西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63.3㎢, 인구 7,34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일동이다. 본래 서상면(西上面)·서하면(西下面)·대상면(大上面)·대하면(大下面) 등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들 면을 합해 송서면으로 개칭되었다. 1940년 수풍댐 건설로 인해 창성군의 연수동이 편입되었고, 송사동에 있던 면사무소를 송일동으로 옮겨왔다.

서쪽에 반덕산, 남쪽에 비래봉과 오장산(吳壯山, 947m), 북부에 연가덕산(燕加德山, 566m)이 있어 남부는 산지이며 북부는 대체로 평지이다. 특히 비래봉과 반덕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벽단(碧團)에서 남동천에 합류해 면의 북부를 지나는 압록강으로 흘러들어 합류지점을 중심으로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콩·조·수수·감자·고구마 등이다. 예전에는 벽단벌에서 양질의 쌀이 생산되어 벽단미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유명했으나, 수풍댐의 건설로 벽단벌이 수몰되어 벽단쌀은 자취를 감추었다. 축우·양돈·양잠·양봉도 활발하며, 삼림지대에서는 목재의 생산량이 많다. 연수동의 연수광산은 형석이 많이 채굴된다.

벽단에 있는 벽단진은 고려시대에 설치한 진이었으나 수풍댐의 건설로 수몰되고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 사립학교 1개교가 있다. 송일(松一)·송이(松二)·송삼(松三)·송사(松四)·이서(二西)·연수(連水)·남(南) 등 7개 동이 있다.

[오북면 吾北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96.39㎢, 인구 5,21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북하동이다. 본래 북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북면으로 개칭되었다.

중앙에 삼박령(三箔嶺, 687m)이 있고 남쪽에 차봉(車峰, 670m)이 솟아 있으며, 북쪽에는 수풍호를 이루는 압록강이 흐르고 동쪽 경계를 충만강이 북류해 압록강으로 흘러든다. 따라서 중앙과 남부는 산지로 되어 있고 충만강과 압록강 유역에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콩·조·수수·기장·옥수수·감자·고구마 등이며, 축우·양돈·양잠 등이 활발하다. 압록강의 연안지역으로 특히 수풍호가 있어 민물고기인 은구어(銀口魚)·붕어·메기·쏘가리·장어 등이 많이 잡힌다. 원시림지대에서는 압록강재를 많이 벌채해 압록강을 통해 운반된다.

광업으로는 오북광산에서 금·은·동 등을 채굴한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 사립학교 1개교가 있다. 북하(北下)·북상(北上)·오상(吾上)·오하(吾下) 등 4개 동이 있다.

[우시면 雩時面]

군의 동부에 있는 면. 면적 123.8㎢, 인구 1만 249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우하동이다. 본래 우면(雩面)과 시면(時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 면이 합쳐져 우시면이라 개칭되었다. 1940년 초산군 남면 발은동이 편입되었다.

동부를 충만강이 심한 곡류를 이루면서 북류해 압록강으로 흘러들고, 충면천(忠面川)이 중앙을 북류한다. 동쪽에는 신평령(新平嶺, 931m), 서쪽에는 자당산·재당산·운제산 등이 인접지역과 경계를 이루면서 솟아 있다. 면의 대부분은 산지이며, 충만강 유역의 동북쪽에 평지가 조금 형성되어 있다.

밭농사 중심의 농경이 이루어지며 주요 농산물은 콩·조·수수·기장·고구마·감자 등이다. 이 밖에 농가부업으로 축우·양돈·양잠·양봉 등이 활발하다. 삼송·단목 등의 목재가 산출되어 충만강과 압록강을 이용한 수운으로 운반된다. 광업은 발은광산에서 금의 채굴이 많다.

도로는 북부를 신의주∼혜산진간의 2등도로가 동서로 통과한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사립학교 2개교가 있다. 우하(雩下)·우상(雩上)·우중(雩中)·시상(時上)·시하(時下)·성남(城南)·성북(城北)·발은(發銀) 등 8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평안북도 북부에 있는 군. 동쪽은 자강도 우시군, 서쪽은 창성군, 남쪽은 동창군, 북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접해 있다. 동경 125°11′∼125°37′, 북위 40°22′∼40°40′에 위치하며, 인구는 6만 70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광복 당시 벽동군은 벽동면·오북면·우시면·가별면·권회면·성남면·송서면의 7개 면으로 되어 있었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시 벽동군과 우시군으로 갈라지면서 우시면·오북면·가별면과 벽동면의 일부 지역이 우시군으로 변경되었다. 1954년 10월에는 회상리가 동창군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벽동읍과 동주(東州)·대동(大東)·영풍(永豊)·남서(南西)·마전(麻田)·동하(東下)·사창(社倉)·용평(龍坪)·권창(權倉)·대풍(大豊)·남하(南下)·남중(南中)·성하(城下)·성상(城上)·송2(松二)·송3(松三)·송4(松四)·송련(松連)·권상(權上) 등 19개 이로 되어 있다.

이 군은 중산성 산지가 우세한 지역으로, 서부와 남부에서 압록강 연안에 이르면서 점차 낮아지나 평야는 없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7.1℃, 1월 평균기온 -12.5℃, 8월 평균기온 23.0℃이며, 연평균강수량은 992㎜이다. 첫서리는 9월 중순, 마감서리는 5월 초순에 내린다.

산림은 군면적의 80%를 차지해 임산자원이 풍부하다. 옥수수·고추·잣 등이 많이 나고, 사과·배·포도 등의 과일도 생산된다. 공업은 소규모의 식료·일용품·피복·건재공업이 발달하였다. 교통은 육로(벽동∼대관, 88㎞)와 수로(동주리∼수풍항, 96㎞)가 잘 연결되어 비교적 원활하다. → 우시군

참고문헌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벽동군지』(벽동군지편찬위원회, 1981)
『북한행정구역 및 산천지세』(국토통일원, 1983)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노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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