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에 의하면, 369년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왜(倭)의 사신 천웅장언(千熊長彦)과 더불어 이곳에서 서로 맹약하고, 다시 고사산(古沙山)의 반석 위에서 맹서했다고 한다.
벽지산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마한의 한 국가인 벽비리국(辟卑離國), 《남제서 南齊書》 백제전에 보이는 벽중(辟中), 《삼국사기》에 보이는 벽성(辟城)·벽골(碧骨)과 같은 지명으로 짐작되며, 따라서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곳에서 맹약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369년에 왜국의 왕 신공이 장수인 황전별(荒田別)·녹아별(鹿我別)을 백제 사신과 함께 한반도로 보내어 탁순(卓淳)에 이르러 신라를 치게 했는데, 병력이 부족하므로 사신을 본국에 보내어 증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목라근자(木羅斤資)·사사노궤(沙沙奴跪) 등이 왜군을 끌고 와서 탁순에 집결, 신라를 치고 다시 가야 7국을 평정한 다음,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서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백제에 주니, 백제왕 초고(肖古 : 근초고왕)와 왕자 귀수(貴須 : 近仇首)가 군대를 끌고 와서 왜군과 회견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신공의 삼한(三韓) 정벌은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주요한 근거가 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로 믿을 수 없는 허구적인 기사이며, 아마도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을 그 주체가 마치 왜국인 양 바꿔치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가 이 때 마한의 전영역을 정복해 세력이 남해안에까지 미치게 되자, 왜국과도 국교를 맺어 사신의 내왕이 있었던 듯하다. 이것을 왜가 마한지역을 정복해 백제에게 준 것처럼 끌어마춘 것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