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려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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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언구와 6언구를 기본으로 하여 대구만으로 문장을 구성한 한문문체. 사륙문.
이칭
이칭
사륙문
내용 요약

변려문은 4언구와 6언구를 기본으로 하여 대구만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한문 문체이다. 또한 변려문은 전고를 사용하여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특징이다. 남조 시대 소통이 편찬한 『문선』은 변려문체의 교본으로서 중국과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변려문은 육조의 말기부터 서사나 서경 묘사에는 적합하지만, 뜻을 전달하거나 논리를 전달하는 문장에는 적합하지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말 최치원은 『계원필경집』 등에 변려문을 남겼다. 변려문은 고려 중기까지 유행하였다. 이후 한유, 구양수, 소식 등의 당송 문학을 배우면서 고문 운동이 일어났다.

목차
정의
4언구와 6언구를 기본으로 하여 대구만으로 문장을 구성한 한문문체. 사륙문.
내용

변려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주1를 존중했다. 이것은 한문에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변려문에는 특별히 대구의 사용이 두드러졌다. 둘째는 넉 자 또는 여섯 자의 구(句)를 많이 쓴다. 한문에는 원래 넉 자 · 여섯 자로 된 구가 많다. 그렇지만, 변려문에는 의식적으로 이것을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셋째는 주2주3을 존중한다. 넷째는 음조의 아름다움을 살린다. 다섯째는 주4 사용을 존중한다. 이렇게 해서 화려한 미문의식을 높이는 것이 변려문의 총체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변려문의 예로서 「등왕각서(滕王閣序)」를 들 수 있다. “南昌故郡 洪都新府 星分翼軫 地按衡廬 襟三江而帶五湖 控蠻荊而引甌越(남창고군 홍도신부 성분익진 지안형로 금삼강이대오호 공만형이인구월) ……”과 같이 질서정연한 대와 자수가 정비되어 있다.

변려문의 역사를 따지면 옛날로 소급할 수 있다. 상대(上代)의 문장은 모두 고문이다. 그 중에는 음조(音調)를 좋게 하고 뜻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숙어나 대구를 인용한 것이 있다. 『역경』의 「문언전(文言傳)」, 『서경』의 「전모(典謨)」, 『서경』의 「대서(大序)」, 그리고 『초사(楚辭)』에서도 많은 대를 찾아볼 수 있다. 주5의 이사(李斯)가 쓴 「간축객서(諫逐客書)」에도 변려문의 솜씨가 보인다. 이러한 흐름들은 주6에 들어오면 부(賦)의 발달로 인해서 더욱 촉진되었다.

전한 때 매승(枚乘) · 사마상여(司馬相如) · 양웅(楊雄) 등이 유명했고, 후한에서는 반고(班固)가 유명했다. 이러한 발달을 거쳐서 주7 조비(曹丕)의 「여오질서(與吳質書)」에 이르면 변려문으로서의 기틀이 잡히게 되며 이것이 주10에 이르면 변려문은 극성기를

진(陳)나라주8의 서릉(徐陵) · 유신(庾信)의 서유체(徐庾體)에 이르게 되면 변려문의 모범을 드리우게 된다. 남조시대에서 특별히 언급해 둘 것은 소통(蕭統)이 편수한 『문선(文選)』이다. 이 책은 과거의 변려적 형태를 띤 작품들을 집대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선』은 한국과 중국을 막론하고 변려문체의 교본으로서 오랫동안 군림해 왔다.

이러한 변려문이 주11 · 주15나라에 이르게 되면 전려장중(典麗莊重)하며 산문의 경향이 농후해진다. 주12 · 주13에 이르러서는 쇠퇴했으나 주14에 와서 다시 성행하였다.

중국의 변려문은 고문의 성쇠와 밀접한 함수관계를 가진다. 양자 사이에 그 성쇠가 엇바뀌면서 발달해왔기 때문이다. 고문은 주16의 작품들을 대표로 꼽는다. 『맹자』 · 『장자』 · 『한비자』 · 『좌전』 · 『국어』 · 『사기』 등이 모두 고문의 명문(名文)들이다.

고문은 주17의 제(齊) · 량(梁)간에 이르러 그 세가 꺾이고 변려문의 융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주18의 말기부터 변려문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주25서경(敍景)[^26]의 문에는 적합하지만, 주20나 논리의론의 문에는 적합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당나라에 이르게 되면서 고문운동이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한유(韓愈)는 공맹(孔孟)의 후계자로 자처하고 유교를 배경으로 하여 논문체의 고문을 많이 지었다. 친구 유종원(柳宗元)도 한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송대에 오게 되면 구양수(歐陽脩)가 고문의 장점을 인식하고 고문을 고취하였다. 고문운동은 증공(曾鞏) · 왕안석(王安石) · 소식(蘇軾) · 소철(蘇轍) 등의 대가의 등장으로 지위가 확고해졌다. 이러한 전통은 원 · 명 나라에 이어져서 당순지(唐順之) · 귀유광(歸有光) · 모곤(茅坤) 등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청대에는 방포(方苞) 등의 동성파(桐城派)의 세력이 일대를 휩쓸었다.

중국의 변려문과 고문의 굴곡이 우리 나라의 문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처럼 변려문의 운동이나 고문운동을 두드러지게 특징지을 만한 것은 없었다. 그래도 암암리에 중국의 영향을 입었던 것은 사실이다.

상대(上代)의 한문 학습의 실상을 보면 고문과 변려문을 함께 병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68년의 강수조(强首條)의 기록을 보면 강수가 『효경』 · 『곡례』 · 『이아(爾雅)』 · 『문선』을 배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구당서(舊唐書)』의 고구려조를 보면, 『시』 · 『서』 · 『역』 · 『예기』 · 『춘추』 · 『사기』 · 『한서』 · 『후한서』 · 『문선』 등을 고구려 경당(扃堂)에서 강론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신라에서도 『춘추좌씨전』 · 『곡례』 · 『논어』 · 『효경』 · 『사기』 · 『한서』 · 『후한서』 · 『문선』 등을 통해서 인재를 발탁했음이 드러나 있다. 여기서 경전이나 사서(史書) 같은 글은 고문이 위주가 되고, 『문선』은 사륙변문이 위주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는 7세기 이전에 벌써 고문과 변려문을 습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속에 얼마간 보인 삼국시대 주21들을 보면 변려문으로 쓴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변려문의 화려한 솜씨는 신라말 최치원(崔致遠)이 종횡무진한 솜씨로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 『중산복궤집(中山覆匱集)』 · 『사륙집』 등을 남겼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계원필경집』과 『동문선』에 약간의 시문이 전한다. 그러나 『계원필경집』만 보아도 최치원의 변려문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하다. 최치원의 이러한 솜씨는 아마도 변려문이 성황을 이루었던 주22 시기에 유학을 했던 덕분일 것이다.

변려문의 여세는 고려 광종 때까지도 여전히 유행하였다. 이것은 신라 말의 문풍(文風)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신라 말의 학자들이 고려 건국 이후에도 그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선문학(文選文學)의 영향도 그대로 상존하고 있었다.

고려 중기에는 변려문이 비판되고 고문이 숭상되었다. 그 이유로는 고려 중기에 오면서 문선문학을 버리고 당송문학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고려 문단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한유 · 구양수 · 소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문운동의 주역이자 대가였던 것이다.

고려 중기 이후에 고문이 숭상되었다고 해서 변려문이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과거의 문장이나 외교문서 · 주소류(奏疏類) · 조령류(詔令類) 같은 문장은 의례적으로 변려문을 썼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논변류 · 서독류(書牘類) · 서발류(序跋類) · 증서류(贈序類) · 잡기류 · 패설류와 같은 문예문은 일반적으로 고문을 썼던 것이다. 고려 일대의 문집을 일별해 보면 그러한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예사조적으로 보면, 조선 초기에는 주23에 바탕한 문학론이 대두되었다. 18세기에 이르게 되면 주24을 바탕한 고문운동이 야기된다. 그렇지만 고문이 변려문과 대립되어 특별한 논쟁거리로 부각되지는 못했다. 고려에서와 마찬가지로 과거지문과 외교 문서 그리고 주소류나 조령류 같은 실용문은 여전히 변려문으로 썼던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고, 기타의 문예문들은 고문으로 채워진 것이 실상이었다.

참고문헌

『문체명변(文體明辯)』(서사증)
『중국문학개론』(김학주, 신아사, 1977)
『한국한문학사』(이가원, 민중서관, 1979)
주석
주1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 지은 둘 이상의 글귀. 특히 한시를 비롯한 시가 문장에 많이 쓴다. 우리말샘

주2

평자(平字)와 측자(仄字)라는 뜻으로, 한문의 시ㆍ부 따위에서 음운의 높낮이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3

시가에서, 시행의 일정한 자리에 같은 운을 규칙적으로 다는 일. 또는 그 운. 우리말샘

주4

전례와 고사

주5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춘추 전국 시대, 지금의 간쑤(甘肅) 지방에서 일어나 기원전 221년 시황제가 주나라 및 육국(六國)을 멸망시키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였는데 기원전 207년 한나라 고조에게 멸망하였다. 우리말샘

주6

중국에서 역대로 존재하였던 전한, 후한, 촉한, 성한, 북한, 남한 따위를 두루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7

중국 삼국 시대에, 조조가 화북을 통일하고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후한의 마지막 임금인 헌제(獻帝)의 자리를 빼앗아 220년에 세운 나라. 뤄양(洛陽)에 도읍하고 세력을 키워 촉(蜀)ㆍ오(吳)를 제압하였으나, 265년 제5대 원제(元帝) 때 사마소(司馬昭)의 아들 사마염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8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의 마지막 나라. 557년 진패선(陳霸先)이 후경(侯景)의 난을 평정한 뒤, 양나라의 정권을 장악하여 제위에 올랐는데, 589년 수나라의 문제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9

중국에서, 후한(後漢)이 멸망한 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양쯔강(揚子江) 남쪽에 있었던 여섯 왕조. 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0

중국에서, 후한(後漢)이 멸망한 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양쯔강(揚子江) 남쪽에 있었던 여섯 왕조. 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1

618년에 중국의 이연(李淵)이 수나라 공제(恭帝)의 왕위를 물려받아 세운 통일 왕조. 도읍은 장안(長安)이며,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으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쇠퇴하여 907년에 주전충(朱全忠)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12

1271년에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가 대도(大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 1279년에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몽고, 티베트를 영유하여 몽고 지상주의 입장에서 민족적 신분제를 세웠으나 1368년에 주원장을 중심으로 한 한족의 봉기로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13

1368년에 주원장이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원(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세운 중국의 통일 왕조. 영락제 때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고 몽고와 남해에 원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뒤에 북로남왜에 시달리고 환관의 전횡과 당쟁, 농민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14

중국의 마지막 왕조(1616~1912).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국을 세우고, 그 아들 태종이 국호를 이것으로 고쳤으나 신해혁명으로 멸망하였다. 우리말샘

주15

중국의 송나라가 1127년 금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가 임안(臨安)으로 천도한 때부터 1279년 원나라에 망할 때까지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6

‘춘추 전국 시대’를 달리 이르는 말.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이전의 시대라는 뜻이다. 우리말샘

주17

위진 남북조 시대의 남조(南朝)와 북조(北朝)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8

중국에서, 후한(後漢)이 멸망한 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양쯔강(揚子江) 남쪽에 있었던 여섯 왕조. 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9

뜻이 상대에게 충분히 통하게 함.

주20

뜻이 상대에게 충분히 통하게 함.

주21

마음에 품은 생각을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 우리말샘

주22

사당(四唐)의 마지막 시기. 즉 836년에서 907년 사이의 시기를 이르는데, 이상은ㆍ두목ㆍ사마예ㆍ장교(張喬) 등이 활약하였다. 우리말샘

주23

문학은 도(道)를 내용으로 해야 한다는 문학관. 문학을 도덕 교육 목적의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보는 효용론적 문학관으로, 북송의 도학가들이 도학을 전제로 문학의 가치를 인정해야 함을 주창한 사상이다. 이 문학관으로 인해, 조선 후기 한문학은 경세파 문학과 실학파 문학에 영향을 주면서 경세의 문학을 주류로 삼게 되었다. 우리말샘

주24

중국 춘추 시대의 여섯 가지 경서(經書). ≪역경≫, ≪서경≫, ≪시경≫, ≪춘추≫, ≪예기≫, ≪악기≫를 이르는데 ≪악기≫ 대신 ≪주례≫를 넣기도 한다. 우리말샘

주25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음. 우리말샘

주26

자연의 경치를 글로 나타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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