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양 ()

불교
인물
고려전기 청도에서 운문사를 중창한 승려.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목차
정의
고려전기 청도에서 운문사를 중창한 승려.
생애 및 활동사항

초년 및 말년의 전기는 전래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불법(佛法)을 전해받고 돌아오다 서해의 용왕이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염송(念誦)하게 한 뒤 금라(金羅) 가사 한벌을 주며 용왕의 아들 이목(璃目)을 데리고 돌아가게 하였다.

이 때 용왕은 삼국이 소란하여 아직 불교에 귀의하는 임금이 없지만, 이목과 함께 작갑(鵲岬)으로 돌아가 절을 짓고 있으면 적을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 년이 못 되어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평정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귀국한 뒤 밀양의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는데, 고려의 태조가 때마침 동쪽으로 쳐들어가 청도(淸道)에 이르렀다. 그 때 산적들이 견성(犬城)에 모여 교만을 부리며 항복하지 않으므로 태조가 그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왔다.

이에 보양은 개[犬]가 밤에만 앞을 지키는 것을 상기시키며 낮에 그들의 북쪽을 치라고 가르쳤다. 태조가 보양의 말대로 하였더니 적이 패하여 항복하였다. 태조는 이를 고맙게 여겨 가까운 고을의 조세 50여 석을 주어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였다.

그리고 절에 보양과 태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절이름을 봉성사라 하였다. 그 뒤, 용왕의 말에 따라 작갑에 이르렀는데, 스스로를 원광(圓光)이라고 주장하는 한 늙은 승려가 인궤(印櫃)를 안고 나와 전해 주고는 사라졌다. 이어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기 위하여 북쪽 고개로 올라가 살펴보니 5층의 황색탑이 보였다.

그러나, 그곳에 이르러보니 아무런 흔적이 없었으므로 다시 올라가 그 자리를 살펴보니 까치가 떼지어 땅을 쪼고 있었다. 이에 서해 용왕이 작갑이라 한 말의 뜻을 깨닫고 그곳의 땅을 파니 오래된 벽돌이 무수히 있었다. 그것을 모아 탑을 만들었으며, 절을 완공한 뒤 작갑사라 하였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보양이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 때부터 청도에 있다가 전쟁 중에 소실된 소작갑(小鵲岬)·대작갑(大鵲岬)·소보갑(所寶岬)·천문갑(天門岬)·가서갑사(嘉西岬寺) 등 5갑사의 전지 500결을 합하여 이 절에 납부하였으며, 937년(태조 20)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였다.

또한 서해 용왕의 아들 이목은 항상 절 옆의 작은 못에 있으면서 남몰래 보양의 법화(法化)를 도왔는데, 어느해 몹시 가물어 야채까지 말라버리자 보양은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비가 흡족히 내려 가뭄을 면하였으나 천제(天帝)가 월권하였다고 하여 이목을 죽이려 하였다. 보양은 이목을 평상 밑으로 숨긴 뒤 이목을 내어놓으라는 천사들에게 뜰 앞의 배나무를 가리키자 천사들은 배나무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꺾어진 배나무는 이목이 어루만져 소생시켰다 한다. 보양은 이 절에서 생애를 마쳤는데 한 산봉우리를 두고 있는 봉성사·석굴사(石窟寺)를 자주 찾았으며, 석굴사의 비허(備虛)와는 형제라고 전한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조선선교사』(忽滑谷快天, 정호경 역, 보련각, 1978)
집필자
이종익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