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장경 ()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불교
개념
사찰에서 직접 시주를 받아 사찰 단위로 간행한 대장경에 해당하는 불교경전.
정의
사찰에서 직접 시주를 받아 사찰 단위로 간행한 대장경에 해당하는 불교경전.
개설

일반적으로 대장경이란, 모든 경전이 총망라된 개념으로 이해된다. 경전이라고 하면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만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장경이란 경·율·논 삼장, 즉 경전의 개념뿐만 아니라 삼장에 대한 소(疏)와 초(抄) 등 해석서나 고승전 등 불교관계 전적을 총괄하여 전부 또는 일부를 지칭하는 대명사이다.

우리 나라는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상과 경문이 들어왔다. 이때 어떤 경이 먼저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계속해서 경전이 수입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한정된 경전의 유통을 위해 차츰 인쇄술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대두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경전 간행이 신라 때부터 사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만 이 또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통하여 8세기에 이미 목판인쇄술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고려에 와서는 3차례나 방대한 대장경간행사업이 국가적인 사업으로 행해져 국제적으로 고려가 문화국으로서 그 면모를 과시하였으며, 사찰을 중심으로 사간장경 간행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배불숭유정책으로 고려 때의 판각인쇄술이 다소 침체된 감이 없지 않지만, 세종 때 최초의 불교성전이라 할 수 있는 한글 번역본인 ≪월인천강지곡≫·≪석보상절≫이 편찬되는 등 왕실을 중심으로 불경 간행사업이 성행하였다. 특히 세조 때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세워 많은 불경의 국역사업과 불경 간행이 이루어졌다.

또한, 사찰 단위로 왕실 또는 권력층에서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선조의 명복과 수복(壽福)을 빌기 위한 불경 간행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

이와 같이 사찰에서 간행된 경들을 일컬어 사간장경(寺刊藏經)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찰에서 간행된 것이라 하여 모두 사간장경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고려시대 흥왕사에서 판각한 의천의 속장경 등은 사간(寺刊)으로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판각된 것으로서 사간과는 달리 국간(國刊)이라고 한다.

이처럼 국가적인 차원에서 판각된 국간이 아닌 개인 또는 가문의 영달을 빌기 위해 시주자에 의해 사찰에서 판각된 판본을 총망라하여 사간장경이라고 한다.

신라의 경전 간행

우리 나라에서 인쇄술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신라시대 불교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 것은 불교 교리가 밑받침이 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불교 교리를 유포하기 위해서 경전 간행이 선행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경전 간행은 어디까지나 사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나 그 시기가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66년도에 석가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어 신라시대 인쇄술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 경은 목판인쇄본으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인쇄물로서 751년경의 간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지폭(紙幅)이 6.65㎝, 길이가 6㎝ 정도의 권자본(卷子本:두루마리 책)으로 상하단변(上下單邊)이며, 매행(每行) 8자 내외로 각입(刻入)되어 있는 목판본으로 납탑공양용(納塔供養用:탑에 봉인함)으로 간행된 것이다.

이 경은 측천무후 말년인 704년(長安 4)경에 법장(法藏) 등이 한역(漢譯)한 것인데, 번역된 지 2년 뒤인 706년(성덕왕 5)에 우리 나라에서 탑에 봉안(奉安)된 것이다. 이것은 경주 낭산 황복사(皇福寺)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함 뚜껑 내면의 명문(銘文) 중에 불사리(佛舍利)와 금미타상(金彌陀像)과 함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이 석탑 2층에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석가탑의 것과 동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간행 시기의 상한을 706년까지 올려볼 수 있게 되며, 하한은 석가탑의 건립연대인 751년(경덕왕 10)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판본은 신라시대에 간행된 유일본으로, 이 밖에는 신라시대 사간판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가 전무하다.

이 밖에 신라시대 인쇄술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것으로는 885년(헌강왕 11)에 최치원이 왕명으로 찬한 경주 초월산의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 중에 당나라 사신의 귀국보고서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신라인들이 아름다운 계림산수(鷄林山水)를 읊은 시를 인쇄하여 사신에게 주었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 시집은 신라 왕이 사신에게 하사한 것으로 당시 신라시대 인쇄술이 보급되어 온 것에 대한 기록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고려의 경전 간행

고려시대는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위로는 국왕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수복(壽福)을 비는 기원불사(祈願佛事)가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사찰에서의 간경사업이 경신앙(經信仰)으로서 빈번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려시대의 불교경전 간행사업은 신라의 인쇄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고려 초기는 송나라와 빈번한 교류로 새로운 경전이 수입되는 등 경전 간행에 있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송나라에서는 971년부터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板大藏經)을 조조(雕造)하였는데, 고려 초기부터 이것이 수입되기 시작하여 고려 불교계는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이리하여 고려에서도 문화국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1011년(현종 2)에는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판각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물론 거란족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고자 국가적인 차원에서 판각한 것이지만 이는 사간판 간행으로 축적된 인쇄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동시에 고려인의 문화적 자부심을 충족시킨 사업이다.

이 밖에도 의천(義天)의 속장경(續藏經)과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간행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뒤따랐다.

이러한 국간(國刊)이나 사간장경의 간행으로 많은 불교 전적이 유통되었을 것이나, 그 동안 인접국가의 침입 등으로 대부분 유실되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고려본만으로 고려시대의 사간장경을 살펴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

현존(現存)하고 있는 고려본을 보면 가장 오래된 것으로 김완섭(金完燮)이 소장하고 있었던 1007년(목종 10) 총지사에서 간행한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 一切如來心秘密全身舍利寶篋印陀羅尼經≫이 있다. 이 경은 목심축(木心軸)에 감긴 소형(小形)의 목판권자본(木板卷子本)으로 지폭(紙幅)은 7.8㎝, 전체 길이가 240㎝이다.

권수(卷首)에 ‘고려국총지사주 진념광제대사 석홍철 경조보협인경판 인시보안불탑중 공양시 총화 25년 정미세기(高麗國摠持寺主 眞念廣濟大師 釋弘哲 敬造寶篋印經板 印施普安佛塔中 供養時 總和二十五年 丁未歲記)’의 간기(刊記)가 명시되어 있어, 이 경은 불탑(佛塔)에 봉안하기 위해서 1007년에 총지사에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권수간기(卷首刊記)에 이어 10㎝ 길이의 변상도(變相圖)가 삽입되어 있으며, 자체(字體)가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본문 내용이 정확하여 중국 오월판(吳越板)보다 월등한 판본이다. 이는 고려 초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인쇄술이 발달했음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밖의 초기 간행본으로 금산사광교원(金山寺廣敎院)에서 1088년(선종 5)에 판각된 ≪아미타경통찬소 阿彌陀經通贊疏≫가 있다.

1089년 간본으로는 보제사(普濟寺)에서 요오사문(了悟沙門)이 ≪영가진각대사증도가 永嘉眞覺大師證道歌≫를 복각인시(覆刻印施)한 것이 있다. 이는 자체(字體)·판식(板式) 및 각자(刻字)의 형태로 보아 송본(宋本)의 복각(覆刻)으로 보고 있다.

같은 해 해인사에서는 ≪천태사교의 天台四敎儀≫가 중각(重刻)되었다. 이 책은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6·25전쟁 때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고려 초기 간행본으로는 현존하지는 않지만 현화사(玄化寺)와 금산사(金山寺)에서 판각한 사실이 문헌으로 전해 오고 있다.

현화사에서는 1020년(현종 11)부터 1022년 사이에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600권의 ≪대품반야경 大品般若經≫과 ≪삼본화엄경 三本華嚴經≫·≪금광명경 金光明經≫·≪묘법연화경≫을 판각하였다.

그리고 김제 금산사에서는 1083년(순종 1)부터 1097년까지 ≪법화현찬 法華玄贊≫·≪유식술기 唯識述記≫ 등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판각하였고, 1087년에는 ≪아미타경찬소 阿彌陀經贊疏≫ 1권을 판각하였다. 그리고 1125년(인종 3)에 건립한 원경왕사비명을 보면 원경왕사(元景王師)가 문인 각순(覺純) 등과 함께 편성한 ≪석원사림 釋苑詞林≫ 250권을 판각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권191∼195까지 5권 1책이 현존하고 있다.

고려 중기에 들어와서는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에서 1207년(희종 3)에 판각한 ≪육조대사법보단경 六祖大師法寶壇經≫과 1213년(강종 2)에 판각한 ≪종경촬요 宗鏡撮要≫가 있다. 그리고 부석사에서는 1250년(고종 37)에 판각한 ≪불설아미타경≫이 현존하고 있다.

고려 말기에 와서 판각된 현존본으로는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계룡산 동학사(東學社)에서 판각한 ≪지장보살본원경 地藏菩薩本願經≫과 만의사(萬義寺)에서 판각한 ≪법화영험전 法華靈驗傳≫, 1341년에 소백산 정각사(正覺社)에서 중각(重刻)한 ≪불조삼경 佛祖三經≫이 있다.

≪법화영험전≫에는 고려 진정국사(眞淨國師)의 ≪해동전홍록 海東傳弘錄≫ 일부를 비롯하여 다른 문헌에서 얻어 볼 수 없는 신라·고려 시대 승려들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불조삼경≫은 ≪불설사십이장경 佛說四十二章經≫·≪불유교경 佛遺敎經≫·≪위산경책 潙山警策≫을 합쳐 제명(題名)하고 개판한 것으로, 1361년(공민왕 10)에 전주의 원암사(圓巖寺)에서 중간하기도 하였다.

경사고려대성수경선사(京師高麗大聖壽慶禪寺)에서는 1357년(공민왕 6)에 ≪인천안목 人天眼目≫을 중간하였고, 1389년에는 ≪장승법수 藏乘法數≫를 간행하였다. 남원의 귀정선사(歸正禪寺)에서는 1370년(공민왕 19)에 ≪육조대사법보단경≫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안성의 청룡사(靑龍寺)에서는 1372년에 ≪수능엄경 首楞嚴經≫을 간행하였으며, 역시 같은 해에 ≪전등록 傳燈錄≫을 광명사(廣明寺)·개천사(開天寺)·굴산사(掘山寺)·복암사(伏巖寺)에서 공동으로 간행하였다.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는 1377년(우왕 3)에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을 주자(鑄字)로 찍어냈으며, 1378년에는 천령(川寧)취암사(鷲巖寺)에서 이를 목판본으로 중간(重刊)하였고, 또 ≪백운화상어록 白雲和尙語錄≫도 간행하였다.

그리고 충주의 청룡사(靑龍寺)에서는 1378년에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 金剛般若經疏論纂要助顯錄≫과 ≪선림보훈 禪林寶訓≫을 간행하였고, 1379년에는 ≪호법론 護法論≫, 1381년에는 ≪선종영가집 禪宗永嘉集≫을 간행하였다.

고달산 고달사(高達寺)에서는 1387년에 ≪대혜보각선사서 大慧普覺禪師書≫를 간행하였고, 그 밖에 간행연대는 알 수 있으나 개판처(開板處)를 알 수 없는 것도 상당수 전하고 있다. 1290년(충렬왕 16)에 간행된 ≪인천보감 人天寶鑑≫, 1350년의 ≪원각유해 圓覺類解≫, 1378년의 ≪부모은중경 父母恩重經≫, 1379년의 ≪나옹화상어록병가송 懶翁和尙語錄並歌頌≫, 1384년의 ≪불조삼경≫, 1387년의 ≪금강반야바라밀경≫, 1389년의 ≪장승법수≫ 등이 간행되었다.

또한, 간행년을 간지년(干支年)으로 표시하여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판본도 있고, 고려본이 틀림없으나 간행년이나 간행처 등이 미상인 사찰본이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사찰판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해인사(海印寺)와 부석사(浮石寺)에 소장되어 있는 판들밖에 없는 실정이다. 특히 이들 판들에 대한 판본 또한 거의 현존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들 판에 대한 중요성은 한결 돋보이고 있다. 이들 사찰판은 해인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판이 54종이고, 부석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판이 3종으로 모두 57종에 달하고 있다.

조선의 경전 간행

조선시대는 배불정책(排佛政策)에 의해서 사찰경제가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신라 때부터 뿌리박혀 내려온 불교문화가 정책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특히 각종 불교서적 출판에서는 그 동안의 잦은 전란에 비추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보존되어 내려온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왕 또는 대비(大妃)를 중심으로 왕실불교(王室佛敎)가 성행하여 이들이 불교계의 비호세력으로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왕실불교는 불교경전 간행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세조 때의 간경도감(刊經都監) 설치와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불교경전 간행사업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왕실불교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조선 초기부터 왕실과 일반 평민들이 그들 선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행한 경판(經板) 간행불사(佛事)는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셈이다.

왕실이 시주하여 간행한 불교 전적은 상당히 정성을 들인 것들이라 볼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불전 간행은 고려시대에 비해 그 질이 떨어짐을 면할 수 없다. 판식(板式)에서 고려시대는 권자본(卷子本)이 주류를 이루었음에 비해 조선시대는 거의 방책(方冊)에 판심(板心)이 생기게 되었으며, 판각(板刻) 또한 복각본(覆刻本)이 상당히 유행하였다.

사찰은 시주자의 경판불사에 응하기 위한 각수(刻手)는 물론이고, 인쇄에 필요한 종이 또는 먹의 제작부터 연판(鍊板) 등을 간행하기 위해 필요한 기능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사찰에서 보존하고 있는 책판(冊板)을 보면 불교관계 서적판(書籍板)만이 아닌 ≪천자문 千字文≫·≪명심보감 明心寶鑑≫ 등과 일반 개인 문집 및 경(經)·사(史)·자(子)·집(集) 등의 일반 유가판(儒家板)을 소장하고 있는 곳도 있다.

≪천자문≫ 등은 나이 어린 사미승(沙彌僧)의 학습용으로 출판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 밖에 당시 유학자나 문인 또는 자손이 이미 인쇄에 필요한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찰에 부탁하여 판각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 이때 사찰은 자체의 인쇄기능을 사찰경제를 위하여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다른 곳에서 판각한 것일 경우에는 사찰이 보관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사찰은 한국 인쇄문화의 요람지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의 사찰이 산 속 깊이 위치하고 있어 잦은 전란에 안전하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아울러 이러한 전적문화재(典籍文化財) 보존에 필요한 기능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찰에서 간행된 불교서적은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은 우리 나라 문화사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특히 전적(典籍)에 있어 임진왜란 이전의 판본은 귀중하게 취급되고 있다. 그 뒤에도 정유재란·병자호란과 6·25전쟁 등 잦은 전란으로 많은 양이 유실되었으나 그 동안 일반 신도나 승려들에 의해 끊임없이 판각되어 왔기 때문에 아직까지 상당량이 현존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등 공공도서관과 목록이 발간된 몇 개의 대학도서관 고서 목록에 수록된 각 사찰별 불서(佛書)의 판각을 조사하여 도별(道別)로 정리해 본 결과, 경기도가 임진왜란 전에는 10개 사찰에서 16종, 임진왜란 후에는 24개 사찰에서 81종을 판각하였다. 이 가운데 3개 사찰은 전후기에 걸쳐서 판각하여 모두 13개 사찰에서 97종의 불서를 간행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충청도는 전기가 14개 사찰에서 31종, 후기가 10개 사찰에서 25종을 판각하였고, 이 중 5개 사찰이 전후기에 걸쳐 판각하였으며, 모두 19개 사찰에서 56종을 간행하였다. 전라도는 전기 32개 사찰에서 87종, 후기 46개 사찰에서 158종으로 모두(이 중 전후기에 걸쳐 간행한 사찰이 9개 사찰) 67개 사찰에서 245종을 간행하였다.

경상도는 전기 28개 사찰에서 70종, 후기가 45개 사찰에서 157종(전후기에 걸친 사찰이 7개 사찰)으로 모두 66개 사찰에서 227종을 간행하였다. 강원도는 전기가 7개 사찰에서 11종, 후기가 9개 사찰에서 19종(2개 사찰이 전후기에 걸쳤음)으로 모두 14개 사찰에서 30종을 간행하였다. 황해도는 전기에 14개 사찰에서 34종, 후기에 5개 사찰에서 10종(전후기에 걸친 사찰이 2개 사찰)으로 모두 17개 사찰에서 44종을 간행하였다.

평안도는 전기가 12개 사찰에서 19종, 후기가 15개 사찰에서 52종(전후기에 걸친 사찰이 3개 사찰)으로 모두 24개 사찰에서 71종을 간행하였다. 함경도는 전기가 3개 사찰에서 5종, 후기가 5개 사찰에서 19종(전후기에 걸쳐 판각한 곳이 1개 사찰)으로 모두 7개 사찰에서 24종을 간행하였다. 결국 조선시대에 245개 사찰에서 794종의 불교서적을 간행하였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불교서적 가운데 ≪법화경≫은 임진왜란 전에 27종 간행되었고 임진왜란 후에 57종 등, 모두 84종으로 가장 많이 간행되었다. 그 다음이 ≪금강경≫으로 43종(전기 15종, 후기 28종)이며, ≪부모은중경≫이 28종(전기 15종, 후기 13종)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 불교강원에서 필수교과목인 ≪절요 節要≫·≪도서 都序≫·≪서장 書狀≫·≪선요 禪要≫의 4집(集)이 많이 간행되었다. ≪절요≫가 17종, ≪도서≫가 22종, ≪서장≫이 18종, ≪선요≫가 18종에 달하고 있다.

그 밖에 ≪원각경≫·≪능엄경≫·≪지장경≫·≪아미타경≫ 등이 많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선종영가집 禪宗永嘉集≫이 조선 전기에는 10종이나 간행되었는 데 비해 조선 후기에는 1건도 간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승려 문집은 전기에 4종, 후기에는 15종이나 간행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불교계의 양상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사찰에서의 경전 간행불사가 매우 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찰판본

참고문헌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고려불서전관목록』(불교문화연구소,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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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적조사보고서』(박상국, 문화재관리국, 1982)
「경주불국사석가탑발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홍직, 『백산학보』 4호, 1968)
「경남사찰경판고」(박상국, 『문화재』 15집, 1982)
집필자
박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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