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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史官)

조선시대사제도

 고려·조선시대 역사의 초고(草稿)를 작성하던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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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 역사의 초고(草稿)를 작성하던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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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의미로는 고려·조선시대에 사초(史草)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찬술하는 사관(史館)·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또는 춘추관)에 소속된 수찬관(修撰官) 이하의 모든 관원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사초의 작성과 시정기의 찬술에 전념한 예문춘추관(또는 춘추관)에 소속된 고려시대의 공봉(供奉)·수찬(修撰)·직관(直館=直史館)이나, 조선시대에 기사관(記事官)을 겸대한 예문관의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관이라 할 때는 협의의 사관을 의미하였다.
사관제는 중국에서는 황제(黃帝) 때에 천자와 신하의 좌우에 위치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기록하는 좌사(左史)와 말을 기록하는 우사(右史)에서 연원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는 고려 광종 때에 당(唐)의 사관제도(史館制度)를 받아들여 궁내에 사관(史館)을 설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이전의 고구려·백제·신라에서도 『유기(留記)』·『신집(新集)』·『서기 書記』·『백제본기(百濟本紀)』·『백제신찬(百濟新撰)』·『국사(國史)』가 편찬되었음에 미루어 사관의 존재가 상정되나, 그 구체적인 관직과 기능 및 고려와의 연관이 분명하지 못하여 여기에서는 제외한다.
고려 광종 때에 설치된 사관(史館)은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계승되면서 수 차례에 걸쳐 그 명칭이 개칭되면서 운영되었다. 고려시대에는 1308년(충렬왕 34)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1325년(충숙왕 12)에 춘추관(春秋館), 1356년(공민왕 5)에 사관(史館), 1362년에 춘추관, 1392년(태조 1)에 예문춘추관, 1401년(태종 1)에 춘추관으로 개칭된 뒤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관제개혁에 따라 의정부 소속의 편사국(編史局)으로 개편되었다.
사관 등에 소속된 관직은 고려 광종 때에는 겸직의 감수국사(監修國史, 문하시중)·수국사(修國史, 2품 이상)·수찬관(3품 이상)과 전임의 직사관(直史館, 참외, 4인「2인은 權務」) 등이 있었다. 이후 광의의 사관인 수찬관 이하의 사관은 1478년(성종 9)까지 13차에 걸쳐 변개되면서 춘추관의 수찬관·편수관·기주관(記注官)·기사관(記事官)으로 정립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면서 조선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수찬관 이하는 모두 승정원·사헌부·홍문관 등의 정3품 당상관 이하의 관원이 겸하는 겸직이었는데, 수찬관은 정3품 당상관직인 6승지(도·좌·우·좌부·우부·동부 승지)·홍문관부제학·대사간 등이 겸하였다. 편수관은 정3품 당하관직으로부터 종4품직까지의 홍문관직제학·승문원판교·종부시정(당하관)과 종3품인 홍문관전한·집의·사간·참교와 종4품인 홍문관부응교·교감·종부시첨정 등이 겸하였다.
그리고 기주관은 정5품직인 검상·정랑·홍문관교리·지평·헌납과 종5품직인 홍문관부교리, 승문원교리 등이 겸하였다. 끝으로 기사관은 정6품직인 홍문관수찬·세자시강원사서·정언·승문원교검(정6)과 종6품인 홍문관수찬·종부시주부, 정7품인 주서·홍문관박사·봉교·시강원설서·승문원박사와 종7품인 종부시직장, 정8품인 홍문관저작·대교·승문원저작과 정9품인 홍문관정자·검열·승문원정자 등 정6품직으로부터 정9품직이 겸하였다.
협의의 사관은 고려 초기에 설치된 직사관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개변되면서 춘추관의 실무를 전장한 참외기사관, 즉 전임사관인 예문관의 봉교(정7품 2인)·대교(정8, 2)·검열(정9, 4)로 정립되면서 운영되었다.
고려시대의 사관은 사관(예문춘추관 또는 춘추관)에 상사(常仕)하면서 궁중에 입직(늦어도 고종 4년 이전)하여, ① 국왕의 언동을 기록(늦어도 의종 11년 이전)하고, ② 견문한 바의 국왕의 언동과 국가 전반에 걸친 정사 및 백관의 시비득실을 토대로 견문사와 논평을 곁들인 사초를 작성하고, ③ 관내에 보관된 실록과 각종 문적(文籍)을 보관, 관리하며, ④ 지방 사고(史庫)에 보관된 문적의 포쇄(曝曬) 등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기능으로 인해서 사관(史館)은 궁내에 둔 여섯 문한관아 중에서도 한림원(翰林院)과 더불어 가장 존숭되면서 유학자들이 입관하기를 선망하는 관아가 되었다. 사관의 관원에 결원이 생기면 가문이 좋고 문학·문장에 뛰어난 문과급제자를 엄선, 상천(相薦)한 뒤 합의를 보아 제수하였다. 사관은 대개 상위의 수찬관 등에 승진하면서 체직되었다. 사관은 국초 이래로 『춘추(春秋)』의 필법을 역사서술의 모범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전기에는 이러한 정신이 표방되고 준수되었으나, 무신집권기에는 당시의 무단적인 분위기와 관련되어 집정자에게 아부·굴종하여 사실을 삭제하고 곡필하였으며, 원나라 간섭기에는 이전의 분위기가 계승되었다. 고려 말에는 성리학의 수용·보급을 통한 의리·지조의 강조와 함께 직필의 분위기가 진작되기는 하였으나, 우왕이 “(자신의) 과실을 기록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위화도회군·전제개혁·왕조개창 등의 혼란으로 크게 개선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의 사관은 봉교의 지휘하에 승정원·춘추관에 입직하고(검열 4인이 2교대로 각 1인) 춘추관에 상사(常仕 :입직하는 검열 이외의 봉교·대교·검열 2인)하면서 항례로 국사가 논의되는 조회(朝會)·조참(朝參)·상참(常參)·윤대(輪對), 경연·중신회의·백관회의·의정부·중추원·육조 등의 대신이나 삼사 관원이 국왕을 면대하는 장소, 국왕의 각종 행차 등에 입시·호종하였다.
그리하여 ① 국왕의 언동, ② 대신·삼사 관원 등이 논의한 제반정사, ③ 중앙과 지방의 각 관아·관원이 국왕이나 의정부·육조에 보고한 정사, ④ 각종 견문사·비밀사·정치득실·백관의 인물평 등을 모두 기록하였다. 또 수찬관 이하가 제출한 사초를 종합하여 춘추관시정기(春秋館時政記, 시정기)를 찬술하였고, 실록청(實錄廳)의 기사관으로서 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춘추관과 외방사고에 보관된 문적을 포쇄하였다.
그 외에도 궐내에서의 입직과 관련하여 입시한 사관은 단독으로나 주서·홍문관관·환관과 함께 왕명을 받아, ① 소격서·봉상시 등 관아의 제사·기우제·전세수납상황·군영훼손상황·종묘와 문소전 및 연은전의 방화(防火) 및 장빙사 등의 일을 심찰하고, ② 옥수(獄囚)를 구휼하며, ③ 5부의 진폐(陳弊)를 방구(訪求)하고, ④ 춘추관에 보관된 실록 이하 모든 문적을 관리하는 등의 일을 수행하였다.
사관은 참하관으로 그 직위는 낮았으나 직필의 고유한 기능과 국왕의 측근에서 근무하였기에 1417년(태종 17) 이전에는 사관이 상천한 인물을 이조에서 계문(啓聞)하여 제수하였지만, 그 이후에는 엄격한 절차를 거쳐 제수되었다.
즉, 춘추관의 당상관인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영의정이 겸임)에서부터 수찬관이 문과 출신인 참하관 중에서 선발하고자 하는 사관의 직품과 상등(相等)한 자를 대상으로 ① 경사와 문장이 뛰어나고(시험에 통한 자), ② 내·외 4조(증조·조·부·외조)에 흠이 없고, ③ 인품이 공정한 자를 3배수로 뽑아 이조에 관문(關文)을 보내면 이조에서 계문하여 제수하였다.
또 그 기능과 관련되어 상위의 사관이 다른 관아로 전출되면 차하위자를 재직기간과 관품을 논하지 아니하고 차례로 승진시켰으며(차차천전 次次遷轉), 타관사로 체직될 때에는 대개 가자(加資·陞職)되었다. 입시한 사관은 승지·주서·홍문관관원과 함께 시신(侍臣) 반열에 동참하면서 사후(射候) 참여, 시문제진, 서적과 각종 재화를 자주 하사받는 등 국왕의 권고(眷顧)를 받았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실록을 편찬하였다. 조선에서도 국왕이 죽으면 실록이 편찬되었는데, 춘추관에 임시로 실록청을 개설하고 총재관(總裁官) 이하의 수사관(修史官)을 두고 춘추관수찬관 이하가 재직시 견문한 정사·인물의 현부득실·비밀 등사를 기록하여 사적으로 보관하였다가 수납한 사초(史草, 家藏史草)와 춘추관시정기·각사등록(各司謄錄)·조보(朝報)·개인일기·소(疏)·초(草) 및 문집 등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후기에는 위의 자료에 『비변사등록』·『승정원일기』·『일성록』 등의 자료가 첨가되었다. 실록편찬의 주요 자료가 되는 것은 시정기와 수찬관 이하가 제출한 사초였다. 이에서 사초의 수납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수납자에게는 벌금(은 20냥)을 부과하고, 자손을 금고하거나(문종 이전) 또는 본인을 서용하지 아니하는(단종 이후) 등의 벌칙을 규정하여 실행하였다.
그런데 춘추관에 수납하는 사초와 실록청에 수납하는 가장사초의 작성 및 『승정원일기』를 등록하는(승정원에 입직한 검열) 것이었지만, 그 외의 6승지 이하는 본직에 분주함은 물론 춘추관수찬관 등 많은 관직을 겸대하였기 때문에 그 질과 양에서 사관의 사초와는 비교가 되지 못하였다. 이에 사초 중에서도 사관의 사초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사관이 기록하는 사초와 춘추관시정기의 질·양 및 직필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초 이래 점진적으로 ① 국정논의·국왕과 신하가 면대하는 모든 곳에 사관이 참여하도록 하고, ② 조계시에 참여하는 사관이 1인이고 또 사관이 가장 늦게 입시하였다가 가장 먼저 퇴출하는 까닭에 견문사의 추기(追記)가 요청되는 불편을, 입시사관수를 2인으로 늘리고 6승지의 뒤에 퇴출 및 즉석에서 견문사를 기술하도록 함으로써 시정하였다.
③ 모든 장계(狀啓)·하교(下敎)사는 필히 사관이 초록한 후에 육조·대간에게 하달하고, 외방사의 기술을 위해 각 도의 도사(都事, 1인, 종5품)와 부윤 이하 모든 수령을 외사(外史)에 제수하였으며, ④ 승정원 옆의 한 칸을 사관의 거처로 삼게 하였다.
또한 ⑤ 사초의 말소·누설·개작을 행한 자는 참수형 이하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⑥ 『태조실록』·『태종실록』의 수찬 때에는 당시에 생존한 집정대신의 박해를 염려하여 편찬을 연기할 것이 제의되고, 국왕의 사초·실록 열람 금지, 사초 작성자의 이름 불기재·명종 이후에는 기재· 등의 조치를 행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제반 규정에도 불구하고 ① 사관의 직필을 꺼린 국왕·대신·승지 등의 사관 탄압이 가해지고, ② 국왕이 “승지·주서도 사관직을 겸하고 국왕의 언동과 국사를 기록하니 사관은 입시하지 말라.”는 등의 탄압에서 간헐적으로 사관의 조참·정청·경연·궐내입시 등이 중지되거나, ③ 1393년(태조 2) 이행(李行)이 『고려사』의 편찬을 위한 사초 수납 시에 이성계가 죄 없는 우왕·창왕 및 변안렬(邊安烈)을 죽였다고 직필한 사초를 제출한 일로 화를 입는 일 등이 발생했다.
또한 ④ 1393년 태조가 우왕·창왕과 관련된 1388년(우왕 14) 이후의 사료를 수납받아 열람, ⑤ 1468년(예종 1) 민수(閔粹)가 『세조실록』의 편찬을 위한 사초 수납시에 작성자의 이름을 쓰라고 하자 악필한 당시 집정대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대신에 관계된 일을 개작하여 화를 입고, ⑥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이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 弔義帝文」이 포함된 사초를 납입한 일을 계기로 무오사화가 야기되었다.
그리고 ⑦ 1547년(명종 2) 안명세(安名世)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언급한 시정기로 피화되었고, ⑧ 당쟁과 관련되어 『선조실록』·『현종실록』·『경종실록』의 개수 등으로 사관이 탄압받고 직필하기가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관은 국초 이래로·특히 성종 이후· 유교정치의 진전과 함께 국왕·대신·국가의 모든 언동·정사·정치득실·인물평 및 비밀사 등을 직필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사관제는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국왕의 언동, 시정의 득실, 인물의 현·불초 및 비밀에 관한 사실 등을 견문한 바대로 직필하여 후세에 권계(勸誡)하기 위한 것이었던만큼, 간헐적으로 사관에 대한 강압과 정쟁 등에서 직필·공정성이 결여되기도 하였으나, 국왕·집권관료의 전자(專恣)·비리를 은연중에 견제하여 유교가 표방한 덕치구현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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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5년)
한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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