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보장 ()

경국대전 / 예전의 혜율조
경국대전 / 예전의 혜율조
사회구조
개념
국민의 기본적 욕구 중에서 주로 빈곤 · 실업 · 질병과 같은 사회적 위험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정부의 입법과 조직적 행정.
정의
국민의 기본적 욕구 중에서 주로 빈곤 · 실업 · 질병과 같은 사회적 위험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정부의 입법과 조직적 행정.
개설

사회보장제도는 옛날에도 존재했지만 보편적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그러한 제도를 1945년 이전에는 주로 사회봉사라 했고, 그 이후 사회보장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독일에서는 19세기 말 질병보험을 비롯한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했으며, 미국에서는 1935년 사회보장이라는 말이 실증법상에 최초로 나타났다.

따라서 사회보장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사회보장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각종 사업들은 이미 여러 나라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것이 빈곤과 재해를 구제하기 위한 구빈사업(救貧事業)이었다. 구빈사업은 오늘날의 사회보장, 특히 공적부조의 원초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사회보장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점차 확대되어 왔다. 영국의 사회보장제도를 발달시키는 데 공이 컸던 베버리지(Beveridge,W.)는 사회보장을 실업·질병·사고·정년퇴직 등으로 인한 생계의 위협을 예방하고, 출생·사망·혼인 등으로 인한 예외적 지출을 해결하기 위하여 소득을 보장하는 활동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소득보장 이외에도 의료보장을 사회보장의 개념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북구의 사회보장 개념은 더욱 광범위하여 ① 보건, ② 직업 재해와 노동자 보호, ③ 노령과 장애, ④ 고용과 실업, ⑤ 가족복지, ⑥ 공적부조, ⑦ 군사 원호 등에 대한 정부의 활동을 총칭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사회보장의 내용을 사회보험과 공적부조의 두 가지로 나누고 있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사회보험과 공적부조·사회복지 서비스로 나누고 있다.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의 역사는 매우 짧지만, 전통사회에서 널리 시행되었던 구빈정책, 또는 구황사업(救荒事業)도 넓은 의미의 사회보장, 특히 공적부조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구빈정책과 구황사업은 광복 이후에도 1950년대 말까지는 국가에 의한 공적부조의 주종을 이루었으며, 사회보험과 사회복지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였다. 이러한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역사를 광복 전과 광복 후, 그리고 현대로 나누어 개괄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광복 이전의 사회보장

삼국시대의 사회보장

삼국시대의 구빈정책은 유민(流民: 집을 떠나 방랑하는 사람)을 막고 기민(饑民: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구휼사업(救恤事業)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구휼사업의 내용은 천재지변으로 인한 흉작으로 백성들이 기아상태에 놓여 있을 때, 국가가 비축한 양곡을 풀어서 기아를 면하게 하고, 종곡(種穀: 씨앗으로 쓸 곡식)을 배급하여 새해 양곡생산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천재지변 중에서도 당시에 가장 심각한 기근을 야기시킨 것은 가뭄이었고, 홍수는 피해의 크기로 보면 가뭄보다 덜했지만 그 빈도는 더욱 잦았다. 이러한 천재지변에 대해서 삼국시대의 각국이 어떠한 대책을 강구하였는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국가가 관리하는 창고에 비축했던 미곡을 풀어서 기민에게 주었다. ② 종자 또는 양곡을 이재민의 수요에 따라 적절히 배급 또는 대부하였다. ③ 여유가 있는 지방의 미곡을 재해지역에 대부하였다. ④ 지세(地稅)와 부역을 이재(罹災) 기간 동안 감면해 주었다. ⑤ 이재민 중에서도 홀아비·과부·고아, 자식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각별히 배려하였다.

⑥ 국가적인 공사를 이재 기간 동안 중지하였다. ⑦ 국왕은 재해의 원인이 자신의 부덕(不德)에 있다고 여기고 늘 거주하던 곳을 피하여 반성의 뜻을 표시하였다. ⑧ 죄수를 석방하거나 형량을 감하여 민원(民怨)을 풀어 주었다. ⑨ 재난을 막기 위해 국가적으로 기우제를 지내거나 국왕이 절에 가서 기원하였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의 진대항식(賑貸恒式)과 신라 문무왕 8년(668)의 대곡환상(貸穀還償: 빌린 곡식을 돌려 줌) 및 백제 다루왕 11년(38)의 사양주금(私釀酒禁: 개인이 술 빚는 것을 금함)을 들 수 있다. 또한 백제 기루왕 40년(116)에 수재를 당하여 손상된 논밭을 관비로 보수해 준 것 등은 그 당시 구황정책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이러한 삼국시대의 구빈·구황 정책은 단순한 사회정책의 의미뿐만 아니라 경제적·정치적 의미도 담고 있었다. 즉, 당시 삼국의 주요한 과제는 국토를 넓혀서 많은 백성을 국민으로 포용하는 일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재해에 시달리는 농민을 보호하고 이들의 유민화(流民化)를 방지하는 구빈사업이 불가결한 요소였다.

고려시대의 사회보장

고려시대는 비황기관(備荒機關)이 점차 정리됨에 따라 구황사업이 보다 보편화·전문화되어 갔다. 삼국시대의 재해대책은 대부분 임시조치적인 것으로서 항구적인 대책은 드물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와서는 각종 창제도(倉制度)와 구빈정책·구빈기관이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고려시대의 창제도로는 의창(義倉)과 상평창(常平倉)이 있었다. 의창은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과 같이 평상시에 곡물을 비축하였다가 흉년·전란 등의 비상시에 이재민들에게 대여하는 빈민구제기관이었다. 상평창은 곡물·포목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저렴할 때 매입해 두었다가 그 값이 오를 때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창제도의 운영에서 생기는 재원은 홀아비·고아·과부 등을 위한 구빈사업과 천재지변으로 인한 이재민을 구재하는 구빈사업의 두 가지 용도로 활용되었다. 창제도 이외에도 다양한 구빈정책이 시행되었다. 『고려사』를 보면, 은면지제(恩免之制)·재면지제(災免之制)·환과고독구휼지제(鰥寡孤獨救恤之制)·수한역려진대지제(水旱疫癘賑貸之制)·납속보관지제(納粟補官之制)와 같은 다양한 구빈정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은면지제는 세납과 형죄(刑罪)를 면제해주는 제도로, 개국·즉위·불사(佛事)·경사·난후(亂後) 등 적당한 시기에 백성을 위하여 시행되었다. 재면지제는 이재민에게 조세조역(租稅調役)과 형벌을 면제해 주는 제도였고, 환과고독구휼지제는 구휼할 때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사람 등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제도였다. 수한역려진대지제는 이재민에게 의·식·주·의약 등을 급여해 주는 제도였다.

이러한 진대사업은 고려시대 진휼5조(賑恤五條) 중에서 가장 활발히 시행되었다. 예컨대, 문종 재위시 사료에 나타난 크고 작은 진대사업은 20회나 되었다.

납속보관지제는 고려시대에 황정(荒政: 흉년 기근에 백성을 구조하는 정책)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 곡식을 바치는 이에게 벼슬을 주고, 이 곡식으로 구황사업을 전개하였다.

고려시대의 주요한 구빈기관으로는 제위보(濟危寶)·구제도감(救濟都監)·진대도감(賑貸都監)·진제색(賑濟色)·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혜민국(惠民局)·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등을 들 수 있다.

제위보는 특정한 재원을 기초로 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이식(利息: 이자)을 구빈사업에 사용하는 것으로, 963년(광종 14)에 설립되어 고려 말까지 존속되었다. 구제도감과 진대도감은 각각 1109년(예종 4)과 1348년(충목왕 8)에 설치된 것으로, 곡물·소채·의류 등으로 기아·빈궁 상태에 있는 백성을 구제해 주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동서대비원은 빈민 중 질병이 있는 이를 구호·요양하는 기관이고, 혜민국은 시약(施藥)을 담당하는 구제기관이었다.

조선시대의 사회보장

조선시대의 구빈정책은 고려시대에 비해 그 제도와 운영이 더욱 체계화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자비정신이 구빈정책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주로 유교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구빈정책이 추구되었다. 즉, 구빈은 군주의 책임이라는 유교의 왕도적 관념에서 구빈정책이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주요한 구빈정책은 대부분 입법화되어 사회제도적으로 정착되어 갔다. 먼저 『경국대전』에 실려 있는 구빈제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전(吏典) 경관직(京官職)에는 의료구제기관으로서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둔다는 규정이 있다. 노인직(老人職)에는 80세가 넘는 관리에게는 1계급 승진, 70세 이상의 당상관(堂上官) 중 공신의 부모와 처에게는 술·고기 등의 특선이 주어졌다.

호전(戶典) 상평창조에는 서울과 지방에 상평창을 두어 백성의 경제 안정을 도모하는 규정이 있고, 비황조(備荒條)에는 지방 관료에게 흉년에 대비하여 소금과 해초를 마련해 둘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있다.

예전(禮典) 혜휼조(惠恤條)에는 노인·고아에 대한 수양(收養: 남의 자식을 기름) 및 의료지급과 의약구제에 관한 규정이 있고, 병전(兵典)에는 면역(免役)과 구휼의 제도를 규정했으며, 형전(刑典)에도 휼수조(恤囚條)의 규정이 있다.

1492년(성종 23)에 나온 『대전속록(大典續錄)』을 보면, 이전 구임조(久任條)에 혜민서의 장기 근속자에 대한 승진 규정이 있고, 호전 지공조(支供條)에 각 도 신당(神堂)에서 버린 물건을 활인서로 수납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예전(禮典) 혜휼(惠恤)에는 각 도 사족녀(士族女)의 혼인 장려에 관한 규정과 궁핍자에 대한 지방관의 장비보조(葬費補助) 책임에 관한 규정이 있다.

1746년(영조 22)에 나온 『속대전』에는 이전 경관직조에 대동미(大同米) 등의 출납을 관장하는 선혜청을 둘 것을 규정하였으며, 노인직조에는 각종 경로·양로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있다.

호전 창고(倉庫)에는 관의 양곡을 백성에게 춘대추납(春貸秋納)하는 환곡(還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규정되어 있으며, 비황조에는 곡식을 미리 준비하기 위한 창비(倉備)·비곡(備穀)에 관한 제도가 새로이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예전 혜휼조에는 버려진 아이를 기르는 데 관한 임시사목(臨時事目)이 규정되어 있고, 지방관의 진휼 책임, 전염병으로 가족이 모두 사망했을 때의 장의(葬儀) 책임 등이 규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수양임시사목(收養臨時事目)이나 자휼전칙(字恤典則)에는 흉년 등으로 버려진 부랑 걸식하는 아동과 갓난아이들을 위하여 수양 또는 유양(乳養)해서 보호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의 호전 비황조에는 진휼곡(賑恤穀)을 기부한 자에 대한 시상제도와 지방 관리가 이렇게 기부한 곡식을 개인적으로 취하는 것을 엄금하는 규정이 있으며, 예전 혜휼조에 부랑아와 유기아(遺棄兒: 버려진 아이)에 대한 수양절목(收養節目)이 있다.

1865년(고종 2)에 간행된 『육전조례』에는 앞에서 언급한 구빈정책과 제도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몇 가지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전 의정부 혜휼조에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왕의 명령이나 관리의 품의에 의하여 환곡미 가운데 미납분을 감면해 줄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진휼청(賑恤廳)에는 혼인하지 못한 사람, 장례를 못 치른 사람, 풍수해로 인한 민가의 유실, 유기아의 양육비, 걸인의 천막 조성 등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주요한 구빈기관으로는 구황청(救荒廳: 세종 때 설립)·상평청(常平廳: 세조 때 설립)·선혜청(宣惠廳: 선조 때 설립)·진휼청(賑恤廳: 인조 때 설립)·혜민원(惠民院: 고종 때 설립)·총혜민사(總惠民社: 고종 때 설립)·분혜민사(分惠民社: 고종 때 설립)·이창(里倉)·의창(義倉)·상평창·사창(社倉) 등이 있었다.

구황청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보살피는 구빈기관으로 1626년(인조 4) 선혜청 소관으로 이관되었다가, 그 뒤 상평창과 통합되어 구호 양곡의 방출과 급식 등에 관한 진휼사업을 전담하였다. 진휼청이라고 개칭되어 불리다가 1677년(숙종 3) 선혜청에 합병되었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혜민원은 서민의 질병 치료와 여의사 교습을 담당한 기관으로, 몇 차례의 명칭 변경과 병합을 겪은 뒤 1882년에 폐지되었다.

총혜민사는 고종 때 개화 정부에 의해 경성에 설립되었고, 각 군에는 분혜민사를 두었다. 총혜민사는 전곡(錢穀)을 주관하여 각 분혜민사를 관할하고, 분혜민사는 해당 군의 전곡과 진휼 업무를 겸해서 주관하였다.

의창은 기민 구제를 목적으로 한 진휼기관이고, 상평창은 주로 곡가 조절을 목적으로 한 기관이다. 전자는 빈민에게 양곡 및 종자를 대부해 주었다가 추수기에 이를 돌려받는 기능을 담당했으며, 후자는 곡식 값이 올랐을 때 창고에 쌓아둔 곡식을 풀어 포목과 바꾸었다가 그 값이 떨어졌을 때 포목으로 다시 곡물을 구입했던 제도이다. 실제로는 두 기관 모두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창은 이민(里民)의 공동 저축과 공동 진대를 위한 기관이었다. 사창은 의창·상평창과 더불어 당시 창제도의 핵심이었으며, 그 기능은 의창과 매우 비슷하였다.

1684년에 제정된 사창전옥의 내용을 보면, ① 이민은 100호를 1사(社)로 하여 사창을 설립할 것, ② 사창은 사민(社民)의 공동 저곡(貯穀)으로 할 것, ③ 사민이 공동 출력하여 이내인(里內人)이 가장 많은 곳에 사창을 세울 것, ④ 사민은 매년 곡물을 갹출하여 사창에 저장하고, ⑤ 사곡(社穀)은 매년 그 반분은 사창에 거치하고 반분은 춘계에 환급하며 거치 곡물은 매년 신곡으로 바꿀 것,

⑥ 거치곡은 형편에 따라 사내(社內) 빈민에게 대부하되 이식은 연 2푼으로 할 것, ⑦ 대부받은 자가 이재·유망(遺忘) 등으로 회수할 길이 없을 때는 사민이 분담하여 이를 보충할 것, ⑧ 사에는 사수(社首)와 검교(檢校)를 두되 민선(民選)으로 하고, 사수는 사무를 관리하고 검교는 창사(倉舍) 보전과 서기업무를 맡을 것, ⑨ 사창은 지방관의 감독을 받고 호조에 관속된다는 등의 규정이 있다.

조선시대의 구빈정책은 주로 구황행정을 통하여 수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황방법은 돈이나 곡식으로 지급한 전곡진급(錢穀賑給)을 비롯하여 조세·요역·환곡의 감면, 곡가 조절, 기부금의 수집 등이었다.

황정(荒政)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진휼인데, 주로 식량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소금·장류·의류 등의 현품 또는 금전을 제공하여 이재민과 빈궁민을 구제하였다. 만약 이들 중 한 사람이라도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는 경우, 그것을 보고하지 않은 수령은 중벌에 처했다.

이러한 진휼사업의 실례는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1786년(정조 10)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국 인구가 735만 6783명인데 기민(饑民)은 327만 8034명이고, 진휼미곡은 21만 4962석이라고 되어 있다. 시식(施食)은 진휼사업 중 긴급 구호에 해당된다. 흉년과 춘궁기에 사원(寺院)·역원(驛院) 및 그 밖의 적당한 장소에 시음장을 설치하여 기민들에게 직접 음식물을 제공하였다.

1437년(세종 19) 진제소(賑濟所)를 모든 도에 설치했고, 특히 경상도와 충청도에는 각각 3개소, 경기도·전라도·강원도에는 2개소씩 설치하여 기민취식(饑民就食)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세종 때는 기민이 산초(山草)를 잘못 먹어 생명을 잃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용식물로 적당한 것을 선택·처방한 『구황방문 救荒方文』을 민간에 반포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진대·의창·환곡 등의 방법을 통한 구빈사업이 매우 활발하였음을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사회보장

조선시대에 활발하게 진행되던 구빈사업이 조선 말기에 이르러 왕정의 문란으로 점차 부실해지면서, 개항 이후 주로 신부·선교사·수녀 등에 의한 여러 가지 구호사업으로 시행되었다.

1890년대는 종교단체뿐만 아니라 일반 자선단체에 의한 구호사업이 전개되었고, 1900년대에는 맹아학교·행려병자 구호소 등 각종 사회사업기관이 설립되었다.

1907년 통감부 통계연보에 나타난 자선단체의 수는 모두 9개였다. 구한말의 구빈사업은 정부의 기능이 약화되어 민간의 자조적 사업과 외국의 종교단체들이 주도했으나, 일본의 식민통치하에서는 이들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형식적인, 새로운 형태의 구빈사업이 전개되었다.

한일합방 당시는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국 지방과에서 구휼 및 자선사업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다가, 1912년 3월 내무부 지방국에 제1과 및 제2과를 두고 제2과에서 사회사업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1919년 내무부 지방국이 내무국으로 바뀌고, 이어 1921년 7월 내무국 제2과가 사회과로 개칭되어 사회사업에 관한 모든 사무를 관장하였다.

그 뒤 1932년 행정 정리에 따라 사회과가 학무국으로 이관되어 사회사업에 관한 사무와 그때까지 학무과 소관이던 사회교육에 관한 사무, 그리고 종교과 소관이던 종교·고적 등에 관한 사무를 통합하여 관장하였다.

각 도에서는 1921년 총독부에 준해서 내무부에 사회과를 신설하여 도내 사회사업을 담당해오다가 1924년 행정 정리 때 그 사무가 다시 내무부 지방과에 귀속되었다.

사회과의 주요한 업무는 ① 사회교육사업(도서관 설립·사회교화 등), ② 임시 구제사업(소작료 감면·도로 개축·개간사업·관개사업 등의 취로사업, 식량·종곡의 급여, 대용 식량 공급 등), ③ 일반사회사업(갱생보호사업자금·행려병자 구호자금 조성) 등이었다.

이러한 행정조직을 통하여 구빈사업·사회사업을 관장하면서 총독부는 그때까지 민간단체가 운영하던 사회사업을 약화시키기 위해 제생원(濟生院)이라는 직영 시설을 발족시켰다.

제생원은 조선 총독의 감독 아래 고아 양육과 농아·맹아의 교육, 그리고 나환자 및 정신병자의 치료를 행하고, 필요에 따라 지방에 분원을 둘 수 있게 규정하였다.

그러나 1912년에서 1930년까지 총 직원 수는 20여 명 정도였고, 개원 이래 총 수용자 수는 232명에 불과하였다. 그 밖에 총독부가 경영한 의료기관으로는 총독부의원 1개소, 자혜의원 18개소가 있었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정책과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대공항은 한국인의 빈곤을 더욱 심화시켜 걸인·유민·부랑자 수가 급증하였다. 그런데도 조선총독부의 구빈 행정은 매우 미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비록 전국의 구제소 수가 1921년 86개소, 1925년 139개소, 1937년 393개소로 꾸준히 증가했으나, 이것은 긴급한 빈민·아동을 일시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었을 뿐 예방적인 차원의 방빈사업(防貧事業)은 아니었다.

구제시설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1925년 빈민시료소(貧民施療所)가 55개소, 출옥인 보호소가 27개소, 고아·빈아 교육소가 20개소, 행려병자 구호소가 11개소, 노동자 숙박소가 5개소, 나환자 구료소가 4개소, 맹아교육소가 2개소였다.

1921∼1934년 동안에는 21개소의 육아시설에 2,192명이 수용되었고, 그 밖에 빈궁아 교육시설(9개소)·유아건강 상담소(5개소)·탁아소(4개소)·임산부 상담소(2개소)·맹아·농아 보호시설(2개소)·육아협회(1개소)에 약 5,983명이 수용되었다.

그리고 1937년부터 이웃끼리 서로 돕는 인보(隣保)와 상부상조를 향상시킨다는 명목으로 서울 4개소에 인보관을 설치하였다. 또한 민간사회사업의 연락·조사·연구 기관으로 1921년 4월 조선사회사업연구회가 조직되었는데, 1929년 1월 재단법인 조선사회사업협회로 확대·개칭된 뒤 총독부 사회과에 소속되었다.

회장은 정무총감이었고, 부회장은 학무국장, 간사는 사회과장이었다. 이는 오늘날 한국사회복지협의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의 구빈사업은 치료적인 시설보호사업이 중심이었고, 자조적인 사업을 통하여 빈곤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빈곤과 구빈의 원인과 책임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는 인식이 점차 높아감에 따라, 일제는 이미 1922년 일본에서 제정·실시한 구호법을 1944년 3월 ‘조선구호령’으로 제정하였다.

이 영은 구호범위를 ① 65세 이상의 노쇠자, ② 13세 이하의 유아, ③ 임산부, ④ 불구폐질·질병·상이 및 기타 신체 또는 정신장애로 인하여 노동에 지장이 있는 자로 지정하고, 보호방법으로는 주택(住宅) 및 시설을 보호하였다.

구호의 종류로는 ① 생활부조, ② 의료, ③ 조산, ④ 생산부조를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재원은 국가가 비용의 2분의 1을, 그리고 각 도가 4분의 1을 부담한다고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는 부분적으로 예방적인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면서도, 식민지인 우리나라에서는 그 실시를 유보한 채 전근대적인 구빈사업 중심으로 구빈행정을 전개하였다.

광복 이후의 사회보장

미군정·자유당시대의 사회보장

미군정기 및 자유당집권시대 사회보장의 기본 법령은 일제강점기에 제정되었던 ‘조선구호령’과 미군정시대에 제정된 ‘훈령 제18호’에 근거하였다.

훈령 제18호의 주요 내용은 위생국의 명칭을 보건위생국이라고 바꾸고 그때까지 하던 업무에다 긴급 재해구호, 개인에 대한 공공구호, 아동복지 및 시설보호, 종업원 복지와 연금제도, 주택 보호, 귀환동포 보호 등을 더하였다.

이러한 법령에 의하여 오늘날 보건사회부가 생겼고, 또 1950년대에 가장 발달된 사회복지사업인 전쟁 고아 및 미망인 수용보호와 재민구호사업 등이 시행되었다.

당시 사회보장의 실질적인 내용은 이러한 법령의 정상적인 집행보다는 조국광복으로 귀환한 해외동포와 해방 후에 내려 온 월남동포에 대한 구호사업, 6·25전쟁으로 인한 미망인과 고아를 수용·보호하기 위한 서비스 등 응급조치적인 사업이 대부분이었다.

1948년 8월 현재 요구호 대상자 조사에 의하면, 전쟁으로 인한 이재민 수는 255만 8496명이고, 이 중 130만 3177명이 구호대상자이며, 실업·빈궁민 중에서 긴급 구호대상자는 127만 2314명, 공공 구호대상자는 22만 2276명이었다. 또한 6·25전쟁 때는 1951년 3월에 실시한 난민일제등록에 의하면 난민이 모두 782만 5412명에 이르렀다.

이 통계수치로도 알 수 있듯이, 제2차세계대전과 6·25전쟁으로 인한 이재민 구호와 빈민 구호가 미군정과 자유당 정부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사회보장 관련 업무는 1945년 10월 미군정청에 보건후생국이 설치되어 총독부 당시의 위생과 업무 외에도 ① 사변에 의한 실업의 구제, ② 상시(常時) 빈곤자에 대한 공공부조, ③ 아동의 후생과 기타 필요한 보호, ④ 근로자의 후생과 은급제도(恩給制度), ⑤ 주택문제, ⑥ 귀국 및 실업한 조선인의 보호 및 귀향 업무 등을 관장하였다.

또한 각 도에도 보건후생국이 설치되어 예방·진료·모자보건·위생시설·응급 재난·극빈자 부조·주택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보건후생행정은 대부분 전란으로 인한 이재민 구호사업에 편중되어, 주로 이들에 대한 수용보호사업 및 의료사업 수준에 머물렀다.

결국 미군정기·자유당집권기의 사회보장은 제도상으로는 일제강점기의 것을 기초로 했고, 광복과 전란으로 인한 이재민 구호사업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전 시대의 구빈사업이 지니고 있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민주공화당시대의 사회보장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격변을 겪은 뒤 민주공화당 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민주공화당 정부는 의욕적인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와 병행하여 근대적인 사회복지입법을 추진하였다. 민주공화당 정부하에서 제정된 사회보장에 관한 주요 입법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생활보호법(1961. 제정): 이 법의 대상자는 65세 이상의 노쇠자, 18세 미만의 아동, 임산부, 불구폐질자 및 심신장애자이다. 보호 수준은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를 지향하고 있으며, 보호의 종류는 생계보호·의료보호·해산보호 및 상장보호(喪葬保護) 등이 있다.

② 재해구호법(1961. 제정): 이 법은 비상 재해가 발생했을 때 응급적인 구호를 행함으로써 재해 복구, 이재민 보호, 사회질서 유지를 도모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③ 아동복리법(1961. 제정): 이 법은 18세 미만의 아동이 보호자에게서 유실·유기 또는 이탈되었을 경우, 그 아동이 건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 복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아동들을 보호하는 시설로는 아동상담소·보육시설·조산시설·탁아시설·심신박약아시설 등을 두고 있다.

④ 산업재해보상보험법(1963. 제정): 이 법은 근로자가 업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재해와 직업병을 신속·공정하게 보상함으로써 산업을 육성하고 근로자를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재해보상을 사용자 대신 국가가 대행하게 하는 제도이다.

⑤ 공무원연금법(1962. 제정): 이 법은 공무원의 질병·부상·폐질·분만·퇴직 및 사망에 대하여 적절한 급여를 지급함으로써 공무원 및 그 유족의 경제적인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에 기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⑥ 의료보험법(1963. 제정): 이 법은 근로자의 업무 이외의 사유로 인한 질병·부상·사망 또는 분만시 보험금을 지급한다.

이러한 법률 외에도 「군인연금법」(1963)·「사회보장에 관한 법률」(1963)·「국민복지연금법」(1963)·「사회복지사업법」(1970)·「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법」(1976) 등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각종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들이 충실히 시행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앞서의 법률 중에서 「국민복지연금법」은 1988년에야 비로소 실시되었고, 「의료보험법」과 「산업재해보상보험법」도 10여 년이 지난 후 그 적용대상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다른 법률들도 내용상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는 그때까지의 치료적인 구빈사업에서 점차 예방적인 방빈사업(防貧事業)으로, 보완적 복지모델에서 제도적 복지모델로 전환해 가는 특징을 나타냈다. 이러한 사회보장제도의 변화는 당시의 사회복지행정 프로그램과 재정을 검토해 보면 알 수 있다.

1969년의 경우 보건사회부의 사업별 예산을 보면, 재해구호가 사회부문 예산(전체의 68.9%)의 52%를 차지하고 자조 근로사업은 23.5%이며 생활보호사업은 18.9%로서, 소비적이고 치료적인 구빈행정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는 사회보험 중심의 예방적인 사회보장제도가 발전하였다. 예컨대,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의 대상이 확대되었고, 생활보호사업의 내용도 보다 충실해졌다.

반면에 아동시설보호사업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점차 약화되었다. 1980년 보건사회부의 예산을 보면, 의료보장비가 전체의 14.2%를 차지하고, 이것이 1년 뒤 다시 21.8%에 이른 것이다.

현황과 과제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는 「헌법」에 명시된 사회보장권(제34조)과 이를 토대로 한 사회보장 관련법에 기초해 있다.

「헌법」에 명시된 사회보장권의 내용은 ①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②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하여야 한다. ③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④ 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⑤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⑥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회복지정책의 성격을 연대별로 살펴보면, 1950년대까지는 구호사업이 핵심이었으나, 1960년대에는 사회복지사업이었으며, 1970년대에는 사회부조, 그리고 1980년대에는 사회보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사회복지정책이 각 연대에 혼재 또는 병존해서 발달했지만 지난 40년간 사회복지정책이 치료사업에서 예방사업으로 급속히 발전된 것은 1980년대 이후라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사회보장과 관련된 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요보호 대상자(빈민, 무의무탁자 등)나 특수직(공무원, 교원, 군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실시되었던 의료보험이나 1980년대 말에 실시된 국민연금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복지정책, 특히 사회보장제도의 발달과 현황을 그 입법 및 실시 연도, 적용 대상을 중심으로 [표]에서 보면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표 1] 사회보장제도(법)의 현황

프로그램 입법연도 적용자격 비고
사 회 보 험 공무원연금 1962 공무원
교원연금 1973(1975) 교직원(사립)
국민연금 1973(1988) 노동자 1999년 도시자영인 모두 포함
퇴직금 1961 노동자
공교의료보험 1977 공무원·교원 2000년 국민건강보험으로 통합
직장의료보험 1976 노동자(5인이상 사업장)
지역의료보험 1988 도시·농촌·자영자
산업재해보상보험 1963 노동자(5인이상 사업장)
고용보험 1995 노동자
사 회 부 조 생계보호 1961 절대빈곤자 생활보호법
의료보호 1970 저소득자
보훈사업 1961 상이군경, 국가유공
재해구호 1962 이재민
사회복지사업 사회복지사업법 1970 복지 13법, 기본법
아동복지사업 1961 주로 요보호아동
노인복지사업 1981 주로 요보호노인
장애인복지사업 1981 심신장애자
모자복지 1990 모자가정, 미혼모
부녀복지 1961 윤락녀

[표]를 보면, 1960년대부터 영세민을 위한 생활보호사업, 요보호 아동을 위한 아동복리사업, 상이군경을 위한 원호사업이 시작되었고, 특수직을 위한 연금보험과 근로자를 위한 퇴직금 및 산재보험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와서 근로자와 특수직을 위한 의료보험, 교원을 위한 연금보험, 영세민을 위한 의료보호 등이 실시되었으며, 1980년대 말에 의료보험이 개보험화되고, 근로자를 위한 연금보험이 실시되며, 노인·장애자 등을 위한 노인복지법 및 심신장애자복지법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사회보장제도 중에 정부와 고용주가 부담하는 사회보험이나 공적 부조 및 사회복지서비스는 10년 이상 연기되어 실시되었거나(예: 국민연금, 의료보험 등) 최근에야 입법이 된 경우(예: 모자복지, 노인 및 장애인 복지법 등)가 있다. 이와 같이 입법이 연기 실시되는 것은 선 성장 후 분배정책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현재 사회보험 프로그램 중에 그 적용 대상을 대개 5인 이상만 실시하는 것은 그 이하의 영세업체 종업원이 악성 피보험자이기 때문에 수익자 부담원칙에 의한 자조적인 사회보험을 실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보험제도에서도 선택주의적 원칙을 적용하기 때문에 사회보장의 불공평성이 나타나고 심지어 소득재분배의 역효과가 나타난다.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아직도 실시되지 않은 사회보험 프로그램은 실업보험과 가족수당이 있고, 이미 실시되고 있는 것 중에 전체 국민이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연금보험, 산재보험 등이 있으며, 그 내용이 부실한 경우는 국민연금의 급여제도, 생활보호사업의 급여, 사회 복지사업의 보호 내용 등이 있다.

사회보장제도의 3가지 주요한 체계, 즉 사회보험, 사회부조, 사회복지서비스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보험

우리나라의 사회보험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먼저 도입된 것이 산재보험과 공무원·군인·교원을 위한 특수직 연금보험이다. 이 중에서 특수직 연금보험이 사보험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회보험에도 개인적 책임(부담 및 급여)을 강화시키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보험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은 퇴직금과 마찬가지로 ① 소득 재분배 기능이 거의 없다는 것이고, ② 노령 퇴직으로 소득이 상실되었을 때 급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보험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특수직 연금은 국민연금제도와는 달라 그 퇴직 급여가 소득에 비례하여 지급되고 있다. 국민연금의 경우 본인 부분에 한하여(일본의 경우 유족까지 적용) 연금 급여의 균등부분(40%)이 적용되기 때문에 비록 비례부분이 있을지라도 소득의 재분배 기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직 연금의 경우는 균등부분이 없다. 그리고 사회보험은 기여제도인데 취업 후 5년 이내 퇴직시 반환일시금제도에 의하여 기여금을 돌려 준다는 것은 국민연금이나 특수직 연금이 기여금제도, 즉 사회보험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막대한 재정 적자가 나게 마련이다. 특히 국민연금의 재정 적자는 그 기여율이 대단히 낮고 급여액은 20년 이상 가입 후 퇴직시 보수의 76%이기 때문에(공교연금의 경우 13%인데, 국민연금의 경우 현재 9%임) 20년 후 연금 급여시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재정 위기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국민연금은 1999년 법 개정으로 직장 근로자뿐만 아니라 자영업자가 모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자영자의 소득 파악 때문에 논란이 있으나 전국민 연금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발달한 사회보험은 전국민 보험인 의료보험이다. 이 의료보험제도는 연금보험과 마찬가지로 분리체계인 동시에 직장 또는 지역 단위(시·군·구)로 조합주의방식에 의하여 독립 운영되고 있다.

현재 공교의료보험과 직장의료보험(154개 조합) 및 지역의료보험(266개 조합)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분립체계와 조합방식은 우리나라의 사회 불평등이 직종, 직장, 지역에 따라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소득 재분배에 따른 역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현재 공교의보의 경우 소득 재분배 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나 직장과 지역의 경우는 역효과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고용보험은 1995년에 시작되어 1998년 IMF 관리체제로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었다. 고용보험의 기여금은 사업주와 피보험자인 근로자가 각각 절반을 분담한다. 각 사업별 보험요율은 실업급여 1.0%, 고용안정사업 0.3%, 직업능력개발사업은 기업 규모에 따라 0.1∼0.7%를 적용한다.

사회부조

사회부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생활보호사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생활보호대상자는 1998년 현재 전체 국민의 2.6%(생계보호)이다. 이러한 생활보호 대상자는 노동능력이 없거나 무의탁한 자 또는 저소득자를 말하는데, 이들은 우리나라의 절대 빈곤자이다.

이러한 생활보호 대상자는 그간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감소되지 않고 해마다 그 비율이 비슷하다. 더욱이 보건사회부가 매년 발표하는 ‘생활보호 대상자 현황분석’에 의하면 생활보호 대상자의 약 10%가 매년 자립·자활한 것으로 나타나고, 동시에 매년 약 10%가 새로운 대상자로 선정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나 사회복지정책의 효과를 매우 의심케 하는 것이다.

사회복지사업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사업은 복지 13법과 10개 사업에 기초해 있다. 그런데 복지 7법과 10개 사업이 사회복지서비스의 핵심이다. 복지 7법이라는 것은 생활보호법, 아동복지법, 노인복지법, 장애인복지법, 모자복지법, 윤락행위 등 방지법, 영유아보육법 등을 말한다.

사회복지사업법(제 2조)을 보면, 보호·선도 또는 복지를 목적으로 한 복지 13법 이외에 10개의 사업(사회복지상담, 재해구조, 부랑인 보호, 직업 보도, 무료 숙박, 지역사회복지, 재가복지, 의료복지, 사회복지관 운영, 정신질환자 및 나병완치자의 사회복귀, 자원봉사활동 및 복지시설의 운영지원 등)을 사회복지사업이라 한다.

이러한 사회복지사업이 생활보호사업과 더불어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핵심이 되어 왔으며 따라서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개념을 자선사업이나 구호사업으로 인식하게 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우리나라 사회복지사업은 아직도 그 대상이 많으나 현재 보호를 받고 있는 요보호자는 매우 적은데, 실제로는 그 비율이 훨씬 적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복지사업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우리나라 사회복지사업의 기본적인 특성은 ① 사회복지 법인이 운영관리하고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는다. ② 시설수용보호사업이 중심이고, 치료적인 성격을 지닌다. ③ 사회복지사업의 대상은 노동능력이 없거나 무의무탁한 요보호자이다.

이러한 대상과 보호방법 외에 일반 가정의 아동·노인·장애자·부녀자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또 시설보호(일시보호, 통원치료 등)를 받고 주택보호도 받을 수 있는 사회복지사업의 개념으로 발전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현행 법령(대책)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업은 아니다.

주요한 사회복지사업인 아동복지, 노인복지, 장애인 복지 및 부녀복지 현황과 거기에 따른 과제는 다음과 같다.

아동복지사업은 사회복지사업의 핵심사업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97년 아동보호시설은 274개이고, 보호아동은 1만 7000여 명이다. 이 중에서 육아시설과 그 보호아동이 가장 많다(약 8할). 그리고 아동보육시설은 1996년 정부지원시설이 1,079개소에 8만 5000여 명이 있고, 민간보육시설이 6,037개소에 25만 5000여 명이 있으며, 그 밖에 직장보육시설(117개)과 가정보육시설(4,865개)에서 약 6만 명이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아동복지법에 의하면 18세 미만의 무의무탁한 요보호 아동이 그 보호의 중심이 되어 있다. 이러한 아동시설 수용사업이 발달하게 된 것은 과거에는 전쟁 고아(1950년대)와 가출아(1960년대)가 대부분이었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기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아가 예방되면 전통적인 아동복지사업은 문을 닫아도 될 것이다. 비록 요보호아동이 발생할지라도 그것은 입양이나 가정위탁 등으로 주택보호사업을 실시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아동복지법과 아동시설이 존재함으로써 오히려 수용아동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빚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것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아를 예방하고 발생된 기아를 보호하기 위한 전문적인 상담, 분류, 조치(서비스)를 하면 될 것이다. 또한 여성의 사회참여 등으로 아동보육시설은 더욱 증가되어야 할 것이다.

노인복지사업은 1980년대에 입법이 되었으나 비교적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그것은 노령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또 가족의 부양기능이 급속히 약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1995년 말 노인 인구는 60세 이상이 전 인구의 9.3%이고, 65세 이상은 5.9%이며, 농촌 노인의 경우 약 10%가 된다.

이러한 인구가 급속히 증가되는 것은 평균수명(남자 70세, 여자 75세)이 연장되고 조기 정년퇴직(대개 55세)으로 약 20년간 역할을 상실하기 때문인데, 거기에 따른 노인의 빈곤, 질병, 고독은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노인복지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가족 부양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도 일반 노인의 79.9%, 생활보호 노인의 34.5%가 가족에 의해 부양되고 있다. 이러한 가족 부양이 핵가족화, 개인주의화 등에 의해 급속히 감소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대치하기 위한 사회보험제도는 미흡하고, 노인복지사업도 노인시설보호사업(1997년 153개소에 9만여 명 보호)과 경로우대제(차비, 목욕, 이발 시설의 무료 이용 및 할인 등) 및 경로사업(공동작업장, 노인능력은행, 경로당, 노인수당 등)이 있지만 노인복지법에 국한된 상담, 입소, 건강진단, 직종개발, 주택보장 등 서비스는 유명무실하다.

우리나라의 노인복지사업은 경로효친사상을 제고하고, 시설수용 보호사업보다 재가 서비스와 여가활동 서비스 및 고용 서비스 등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2008년부터 요양 보호가 필요한 노인의 생활 자립을 지원하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장애인복지사업도 1980년대에 급속히 발달하였다. 특히 장애자 올림픽을 계기로 1985년 이후 장애인 복지시설의 현대화 사업이 추진되어 노후된 시설을 증·개축하고 의료 및 직업재활 장비와 시설을 보강하여 장애인 재활기능을 확충·전문화하였다. 그러나 재가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의료비 지원, 재활의료기관의 확충, 의무고용제, 직업훈련 등)는 약화되었다.

장애인복지시설은 장애인의 시설 입소 및 통원에 필요한 상담, 의료 및 훈련을 위한 재활시설과 중증 장애인을 위한 요양시설이 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시설은 1997년 말 모두 254개가 있는데, 이 중에서 재활 수용시설이 가장 많다.

이러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장애인은 전체 인구의 2.2% 내지 4%로 추계되고(세계보건기구는 선진국의 경우 10%라 함), 현재 등록된 장애인은 1997년 말 42만 명이 된다. 이 중에서 지체장애인이 전체의 69.2%로 가장 많고, 나머지는 정신장애인(14.0%), 청각·언어 장애인(10.3%), 시각장애인(6.4%) 순이다.

이것을 본다면,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시설은 아직도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더욱이 재가 복지사업이 발달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부녀복지사업은 시설보호사업이 발달되어 있는데(1997년 모자 보호시설이 37개소, 여성선도 보호시설이 13개소), 이것도 모자복지와 생활보호사업을 통하여 그 예방사업을 강화시키고 퇴폐와 윤락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환락가(산업)를 없애도록 노력해야 될 것이다.

사회보험 업무는 중앙정부와 관련단체가 수행하고 있어서 큰 문제가 없으나, 2중 또는 3중으로 중복되는 행정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노동자의 경우 산재보험은 노동부가 운영·관리하지만,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은 보건사회부의 보험연금국과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 의료보험조합연합회에서 운영·관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격 관리와 전산화 낭비가 매우 심하다. 따라서 이것을 통합관리하는 사회보장청의 설립이 요망된다.

사회부조 업무(생활보호사업)는 보건사회부가 계획을 수립하고 국고를 지원하지만 지방정부가 직접 운영·관리한다. 그 결과 보건사회부가 책임 행정을 할 수 없으며 전문성을 지닌 사회복지행정의 비효율성과 비전문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사회복지서비스는 사회복지법인(시설)이 운영·관리하고 지방정부의 지도·감독을 받는다.

실제로 시설운영비의 거의 대부분을 정부에서 지원받기 때문에 비전문가(관료)의 입김이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사회복지행정 업무를 책임질 수 있는 전달체계가 확립되어야 하고, 이것의 전문직 서비스를 행할 수 있는 사회복지사가 충원되어 업무를 집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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