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강화유수, 한상부우윤,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덕기(德基)
화곡(華谷), 견지(見志)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6년(선조 29)
사망 연도
1663년(현종 4)
본관
달성(達城)
주요 관직
공조좌랑|천안군수|강화유수|한상부우윤|호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에, 강화유수, 한상부우윤,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덕기(德基), 호는 화곡(華谷) 혹은 견지(見志). 서해(徐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 서성(徐渻)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서경우(徐景雨)이다. 어머니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염(成恬)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7년(인조 5)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부수(副率)를 거쳐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36년의 병자호란 뒤 봉림대군이 볼모로 심양(瀋陽)에 가던 길을 시종하다 마음대로 돌아왔다 하여 청풍(淸風)에 잠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곧 풀려나 다시 심양에 가서 봉림대군을 모시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귀국하여 공조좌랑을 거쳐 호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1643년 조세로 면포(綿布)를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다시 청도군수에 서용되었다가 스스로 물러났다.

이어 1651년(효종 2) 천안군수에 임명되어 새로 제정한 대동법(大同法)을 잘 시행하여 높은 치적을 쌓고 벼슬에서 은퇴하였다. 그 뒤 세자(世子: 뒤의 현종)를 위해 춘궁강관(春宮講官)을 뽑을 때 진선(進善)에 발탁되었다.

장령(掌令)·집의(執義)·승지를 거쳐, 공조참의와 호조참의를 지내고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656년에는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돌아왔다. 1658년 강화유수가 되어 병기(兵器)를 수보(修補)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며 직장목(直長木)을 포구에 매치(埋置)하여 유사시에 목책(木柵) 가설의 재원으로 삼는 등 효종이 지향하던 북벌계획(北伐計劃)을 도왔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동지중추부사 겸 총관(同知中樞府事兼摠管)이 되었다. 이어 한성부우윤을 거쳐 1661년(현종 2) 원두표(元斗杓)의 추천으로 호조참판이 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궁가설장(宮家設莊)의 폐단을 강력히 주장하고 민전(民田)의 궁가 흡수를 반대하다가 잠시 파직되었으며, 결국 함경도관찰사로 체차(遞差: 관직이 교체됨)되어 이듬해 임지인 함흥에서 죽었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생원에서 발신(拔身: 몸을 일으킴), 호조참판에까지 이르는 매우 드문 벼슬길을 걸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
차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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