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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김교신 등 무교회주의자들이 창간한 잡지. 개신교동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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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7년 김교신 등 무교회주의자들이 창간한 잡지. 개신교동인지.
내용

창간 당시의 진용은 일본의 예언적 · 반국수주의적 · 반외국교파적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신앙적인 문하생으로, 그의 감화를 받은 김교신을 비롯하여 함석헌(咸錫憲) · 정상훈(鄭相勳) · 송두용(宋斗用) · 양인성(梁仁性) · 유석동(柳錫東)의 6인이었다.

창간호는 국판 44면으로, 창간사에 이어 이들 6인의 무교회 신앙에 대한 고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논문이 실렸고, 끝부분에 동인들이 나누어 쓴 단상(斷想)이 있다. 이들은 창간사에서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국경이 있어야 할 것’을 상기시키면서, 쓰라린 민족의 시련을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순수한 기독교신앙으로 극복해 나가자고 외치고, 기성 교회의 비리를 비판하면서, 민중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영혼을 신앙으로 각성시키자고 강조하였다.

1930년 6월호인 제17호부터는 동인들의 사정으로 김교신의 이름으로만 편집, 발행되어 문자 그대로 그의 개인적인 신앙 월간지가 되었지만, 동인들의 투고는 계속되었다. 이들은 당대의 지성인으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자연 그 영향은 컸고, 이로 인하여 교회 측의 압박을 받기도 하였다. 발행 부수는 300부를 넘지 못했지만, 고정 독자들 중에는 이승훈(李昇薰) · 장기려(張起呂) · 유달영(柳達永) 등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많았다.

김교신은 이 잡지로 인하여 일제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발행을 계속하였는데, 1942년 3월호가 되는 제158호의 권두언 「조와(吊蛙)」의 내용이 동면하는 개구리의 소생을 비유하여 민족의 소생을 부르짖었다는 구실로 폐간조치를 당하였다. 그리고 김교신 · 함석헌 · 유달영 등 연루자 18명이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고정 독자들의 집까지도 수색을 당하여 잡지는 전부 소각되었다.

김교신의 『성서조선』의 이념과 방식은 함석헌의 『씨알소리』, 송두용의 『성서신애(聖書信愛)』, 노평구(盧平久)의 『성서연구(聖書硏究)』 등으로 이어져 왔으며, 1982년 5월에 전 158권의 영인본(影印本)이 간행되었다. 한편, 최근에는 김교신과 『성서조선』에 대한 연구논문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발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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