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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백(成始伯)

북한인물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사회부 부부장을 역임한 정치인.   공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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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사회부 부부장을 역임한 정치인.공작원.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황해도 평산 출신.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소학교를 마친 후 서울에 올라와 중동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하였고, 1925∼1926년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경상해(上海)로 망명하여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호종남(胡宗南) 사령관의 막료로 정향명(丁向明)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국민당 통치하의 서안지구 공산당 정보기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는 등 지하활동에 종사하였다.
이 일로 중국 수상을 지낸 주은래(周恩來)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상해에서 중국혁명호제회(中國革命互濟會)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남경(南京)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35년 중경(重慶)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였다.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연안(延安)으로 갔다가 다시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8로군(八路軍) 중경판사처(辦事處)를 근거지로 삼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상으로 통일전선활동에 종사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폭넓은 교류관계를 유지하였다.
1946년 2월 부산과 서울을 거쳐 평양에 들어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사회부(이후 통일전선부로 명칭 변경) 부부장을 지냈다. 같은 해 3월부터 김일성(金日成) 직계로 박헌영(朴憲永)의 조선공산당에 대한 연락 업무와 남한 정세파악 및 좌우합작과 3당합동 사업의 최선두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12월경 ‘김일성의 특사’로 자임하고 서울로 와서 지하운동에 종사하며 남한 내 우익 및 중간 정당·단체들, 미군정청·경찰·첩보대·군부, 심지어 재외대표부에까지 산하조직들을 만들었다.
그는 『조선중앙일보』를 창간한 데 이어 『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종이나 되는 신문들을 경영하여 선전공작에 이용하였다. 1947년 5월 근로인민당 결성을 지원하였고, 같은 해 겨울 김일성을 만나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합작에 대해 논의하였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서 실무역할을 담당했고,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50년 2월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남북협상파와 임정 계열 일부 출마자들을 지원하던 중 경찰에 검거되었다.
같은 해 6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27일 처형당하였다.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가묘가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01년)
김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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