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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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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효를 세는 일을 가리키는 경제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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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수효를 세는 일을 가리키는 경제용어.
내용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산가지[算木]를 유일한 공적 계산수단으로 삼아왔다.

산가지는 대나 뼈 따위로 젓가락처럼 만든 것으로 셈법은 매우 단순하여 일(一)·백(百)·만(萬) 단위는 세로로, 십(十)·천(千)·십만 단위는 가로로 놓으며, 6 이상의 숫자는 ‘다섯’을 한 단위로 삼아 앞의 경우는 가로로, 위의 경우는 세로로 놓되 위쪽에 수직으로 씌우는 것이었다.

17세기 중엽 제주도에 닿은 하멜(Hamel,H.)의 ≪표류기≫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조선 말기의 일본인 견문기에도 시장의 장꾼들이 성냥개비나 잔나뭇가지를 이용, 계산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가지 계산은 국가기관이나 일부 사대부 계층에서 썼을 뿐이고, 일반에서는 노끈이나 새끼에 매듭을 지어 숫자를 기억하거나 나무에 금을 새기는 이른바 각목법(刻木法)을 이용했다.

소금 따위의 생활필수품을 파는 도부꾼들은 외상을 준 집의 기둥 따위에 낫이나 칼로 금을 그어 표시하였으며, 농가에서는 베틀의 바디살 수를 나타낼 때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이 밖에 엄대라는 짧은 막대기도 썼다.

도회지 각 가정에서는 반찬가게나 푸주에 외상거래를 할 때 기장(記帳)이나 장부에 올리지 않고 가게에서 마련한 엄대에 금을 그어 값을 기록하였으며, 술집에서도 단골 손님에게는 이와 같이 하여 외상을 ‘엄대 긋는다.’고 일렀다. 이러한 관행은 194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1123년에 간행된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 “관청의 회계관도 출납회계를 할 때 나무토막에 칼로 한 개씩 금을 긋는다. 일이 끝나면 그것을 버리고 보관하지 않으니 기록법이 너무도 단순하다.

이것은 아마도 옛 결승(結繩)의 유풍인 것 같다.”고 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는 국가기관에서도 엄대를 이용, 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주판도 들어왔지만 사대부 계층의 일부 식자들만 관심을 가졌을 뿐 19세기 말까지도 일반인은 물론 관공서에서도 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주판이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 전해지자 한반도 침략의 병참기지였던 나고야(名古屋)에서 즉각 실용되고,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6)에는 수판셈을 국민교육과목으로 삼았던 일본과 대조를 이루는 사실이다.

주판 경시경향은 개화기에도 계속되었으며, 민족항일기에는 오히려 일본인들에 의하여 주판셈이 보급되는 기현상을 낳기까지 하였다.

셈을 빠르고 정확히 하는 데에 필수적인 계산기구가 서민층은 물론 국가기관에서조차 실용되지 않은 까닭은, 우리 사회가 농경에 뿌리를 둔 정착적 농업사회였으며 상업도 영세하여 조직적 계산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은 데에 있다.

그리고 유교의 영향으로 상류층 사람들이 재물을 천하게 여기고 더구나 거래를 통하여 이익을 남기는 상거래를 죄악시했던 데에 있다고 하겠다.

화폐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19세기 말까지도 피륙이나 곡물을 기준으로 삼아 거래하였으며, 그나마 일반에서는 물물교환에 따라 생활필수품을 마련했다.

더구나 산물이 적고 바닥 또한 좁아서 상거래라 할만한 것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박지원(朴趾源)의 <허생전>은 비록 소설이지만 현실 또한 그러하였으리라는 점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유교적 덕목 실천에 온 힘을 기울였던 사대부들은 재물을 구체적으로 따지기를 꺼렸으며 토지문서조차 남을 통해 주고 받고 하였다.

심지어 기방에서 행하돈을 줄 때에도 접시에 돈을 놓고 젓가락으로 집어 주었기에 이를 젓가락돈이라고 일렀다. 이러한 생활관습은 비타산성을 인격완성의 한 지표로 삼은 까닭이며 서민들도 자연히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도량형기조차 일정 기준이 없어 들쑥날쑥이었던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토지의 양도 몇 평, 몇 홉이라는 구체적 표현 대신 몇 섬지기라 하였으며, 곳에 따라서는 하루갈이·이틀갈이 식으로 불렀다. 마지기라는 말도 한 말의 씨를 뿌릴 정도의 넓이를 가리키는 낱말로서 논밭의 그것이 다르고, 논의 경우에도 곳에 따라 150평에서 300평까지의 차이가 났다.

곡식을 되는 되나 말도 집말과 관말[官斗], 그리고 장말[市斗]이 같지 않았으며 현재도 제주도의 한말은 육지의 넉되에 해당한다. 길이를 재는 데에도 네 종류의 자를 썼으며 같은 자라도 눈금이 또한 달랐다.

심지어 관청에서 토지의 넓이를 산출하거나 길의 길이를 재는 데 썼던 주척(周尺)에도 길이가 다른 다섯 종류의 자를 썼고, 건축에 사용된 영조척(營造尺)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났다.

셈이나 숫자에 대한 관념이 이처럼 허술해서 집을 지을 경우에도 설계도를 만들지 않고 오로지 목수가 머리 속에서 생각할 뿐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한 간(間)의 길이가 집마다 다르고 한 집에서도 건물에 따라 차이가 났다.

심지어 마포강에서 대를 이어 배를 지어왔던 어떤 목수는 자 대신 자기 동네 어떤 노인의 담뱃대를 기준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 특유의 덤이나 에누리 관습도 여기에서 왔다.

예전에는 덤을 주지 않고는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새우젓 장수는 덤통을 따로 가지고 다녔다. 쌀을 될 때에도 고봉이라 하여 전 위로 수북하게 담아야 하는 것으로 알았으며, 이해타산에 밝다는 개성상인들에게도 외빼기니 쌍빼기니 하는 덤으로 나가는 양을 공식적으로 결손처분하는 관습이 있었다. 오늘날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서 발매하는 사은권도 덤의 한 가지다.

셈을 분명하게 따지기를 꺼려하거나 이를 남자답지 못한 일로 여기는 심리는 아직도 우리에게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정부에서 세무합리화를 위하여 정책적으로 영수증 주고받기 운동을 벌이고 이를 지속시킬 목적으로 일정한 장려금까지 지급했지만 아직도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개화백경(開化百景)』3(이규태, 신태양사, 1969)
『풍류세시기』(이승우, 중앙일보사, 1977)
『이제 이 조선톱에도 녹이 슬었네』(배희한, 뿌리깊은 나무, 1981)
『한국수학사』(김용운·김용국, 열화당,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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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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