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송광사 국사전 ( )

순천 송광사 국사전 정면
순천 송광사 국사전 정면
건축
유적
문화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에 있는 조선시대 16국사 초상화를 모신 사찰건물. 전각. 국보.
내용 요약

순천 송광사 국사전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에 있는 조선 시대 16국사 초상화를 모신 사찰 건물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송광사는 신라 말에 창건한 절로, 보조국사 지눌 등 유명한 스님을 많이 배출한 승보사찰이다. 국사전에는 1200년부터 1428년까지의 스님 16명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이 초상화들은 1780년(정조 4)에 다시 그린 것이다. 송광사 국사전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주심포계 맞배집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으로 평가되는 건축물이며 그 학술적 가치가 높다.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에 있는 조선시대 16국사 초상화를 모신 사찰건물. 전각. 국보.
개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조계산 자락에 위치한 송광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로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등 유명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하여 일명 승보(僧寶)사찰로 불린다.

송광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하나이다. 국사전은 보조국사 지눌 등 1200년부터 1428년까지 송광사에서 배출한 16국사(國師)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덕을 기리는 건물이다.

역사적 변천

송광사는 1207년 최선(崔詵)이 작성한 「대승선종조계산수선사중창기(大乘禪宗曹溪山修禪社重創記)」에 신라 말 혜린(慧璘)선사가 창건하고 처음에는 길상사(吉祥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보조국사 지눌(知訥)은 주1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제자 수우(守愚)에게 중창불사를 명하였다. 「송광사사원사적비(松廣寺嗣院事蹟碑)」에는 1197년(명종 27) 공사를 시작하여 1205년에 공사가 끝났다는 기록이 있다.

공사가 끝나자 고려 희종은 산의 이름을 조계로 바꾸고 수선사(修禪社)란 이름을 내렸는데 나중에 송광사로 또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송광사는 강종(康宗)의 명을 받아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이 중창하고 조선 초기 고봉화상(高峯和尙)의 중창불사를 거쳐 대가람으로 성장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다행히 일부 건물만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750칸만 남고 대웅전을 비롯한 2,152칸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1856년(철종 7)까지 14년 동안 소실된 건물들을 중창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여러 전각들이 또다시 소실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는 일제강점기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 소실되기 전 송광사의 찬란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대웅전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건물들은 1955년 이후 세워진 것들이다. 여러 차례 중창불사를 거치면서 배치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국사전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공민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처음에는 정면이 3칸인 건물로서 15분의 초상화를 봉안하였으나 고봉화상(1428년 입적)을 추가로 모시면서 1칸을 증축하였다.

1971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에는 1501년(연산군 7) 개창(開倉)하고 1558년(명종 13)에 중창(重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722년(경종 2)과 1807년(순조 7), 1918년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926년에는 석축을 고쳐 쌓았다. 이후 1962년, 1972년, 1990년에 수리가 있었다. 내부에 모신 초상화들은 1780년(정조 4)에 다시 그린 것이다.

내용

송광사는 일주문을 지나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면 삼청교와 우화각(능허교)이 냇물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능허교를 건너 천왕문과 해탈문, 종고루를 지나면 대웅전이 서향하고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높은 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선원과 승보사찰을 상징하는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국사전은 대웅전의 남동쪽에 있으며 담장으로 구획되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송광사 국사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계 맞배집으로 대웅전과 같이 서향하고 있다. 건물은 2단으로 조성된 축대 위에 세워져 있다. 하단의 축대는 크고 작은 자연석을 정교하게 주2를 떠서 서로 밀착되도록 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 덮개돌)을 올렸다. 상단 축대는 잘 다듬은 장대석을 가로방향과 세로방향으로 교차시켜 기하학적으로 쌓아 올렸다. 하단 축대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데 비해 상단 축대는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강조되면서 강하게 대비된다.

기단은 장대석 외벌대로 낮게 조성하였으며 바닥에 전돌을 깔았다. 초석은 자연석으로 일부는 주좌를 표현하였으며 그 위에 주3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외1출목(出目) 구조의 주심포 형식이다. 기둥머리에는 헛첨차를 끼우고 그 위에 소로를 올려 첨차살미(山彌)를 결구하였는데 건물 내부에서 헛첨차와 살미는 보를 받치는 보아지 역할을 한다. 기둥 중심에 사용된 첨차는 교두형(翹頭形)으로 장식이 없으나 출목첨차는 연화두형(蓮花頭形: 일명 쌍S자형 곡선)으로 초각하였다.

가구(架構) 구조는 대들보 위에 주4를 세워 종보를 받치고 그 위에 주5을 놓아 종도리를 받는 5량 형식이다. 측면 가구는 우측면(남쪽)이 1고주 5량이고 좌측면(북쪽)은 2고주 5량으로 서로 다른데, 이것은 후대에 1칸을 증축하면서 바뀐 것이다. 창호는 전면에 4분합 띠살문을 달고 좌측면의 전면 퇴칸에는 외짝 띠살문을 달았다.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정면은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로 구성한 반면에 배면은 서까래만 사용한 홑처마로 구성하여 정면성을 강조하였다. 내부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주6로 꾸몄다. 조사들의 초상화는 불단과 함께 벽에 기대어 모셨는데 보조국사 지눌의 불단만 돌출시켜 위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징

송광사 국사전은 본래 3칸이었으나 4칸으로 증축되면서 좌측면과 우측면의 칸수와 구조가 서로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공포는 외1출목 형식으로 고려 말~조선 초기에 건립된 주심포 건물과 마찬가지로 기둥머리에 헛첨차가 사용되었다. 살미의 형태는 조선 초기의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1962년 지정), 영암 도갑사 해탈문(국보, 1962년 지정)과 비슷하나 안동 봉정사 화엄강당(보물, 1967년 지정)처럼 주심포가 익공으로 변화되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한편, 주심포 건물은 일반적으로 천장을 연등천장으로 개방하지만 송광사 국사전은 우물반자가 설치되어 있다. 우물반자 안에 있는 부재들이 조각되어 있음을 볼 때 천장은 후대에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조선 초기 주심포가 익공형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으로 평가되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순천 송광사 하사당(보물, 1963년 지정)과 공포의 구성 등이 유사하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다른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송광사 중요목조건축물 정밀실측보고서』(문화재청, 2007)
『한국의 건축문화재』9(전남 편)(천득염·전봉희, 기문당, 2002)
「송광사 국사전 칸의 확장에 관한 연구」(남호현·김희철, 『대한건축학회논문집』213, 대한건축학회, 2006)
「송광사 국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의 고건축』2, 1975)
송광사(www.songgwangsa.org)
주석
주1

고려 무신 정권기에, 지눌이 수선사를 중심으로 일으킨 불교계의 정화 운동. 종래의 불교계가 세속화된 것에 대한 신앙적 반성에서 출발하였으며,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통합을 추구하였다. 우리말샘

주2

나무 기둥, 돌 따위가 울퉁불퉁한 주춧돌의 모양에 맞게 다듬어져 기둥과 주춧돌이 톱니처럼 맞물린 듯 밀착되는 일. 우리말샘

주3

기둥 밑동에서 꼭대기까지 직선으로 조금씩 가늘게 한 흘림. 우리말샘

주4

들보 위에 세우는 짧은 기둥. 상량(上樑), 오량(五樑), 칠량(七樑) 따위를 받치고 있다. 우리말샘

주5

덩굴나무가 서리어 나가는 모양을 그린 대공. 우리말샘

주6

반자틀이 정사각형인 소란 반자. 우리말샘

집필자
홍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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