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연 ()

범허정집 / 송광연
범허정집 / 송광연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사헌부집의, 홍문관응교,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도심(道深)
범허정(泛虛亭)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38년(인조 16)
사망 연도
1695년(숙종 21)
본관
여산(礪山: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주요 관직
사헌부집의|홍문관응교|사간원사간
정의
조선 후기에, 사헌부집의, 홍문관응교,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도심(道深), 호는 범허정(泛虛亭). 감찰 송초(宋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송극인(宋克認)이고, 아버지는 좌승지 송시철(宋時喆)이다. 어머니는 연안부사 정지경(鄭之經)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54년(효종 5)에 진사가 되고 1666년(현종 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정자(副正字)·세자시강원주서(世子侍講院注書)·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거쳤다. 1671년 이원정(李元禎)·이담명(李聃命)·박천영(朴千榮) 등의 죄를 청했다가 상신(相臣: 삼정승의 다른 이름)에게 미움을 사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는데, 부임하지 않아 파직되었다.

이어 거듭 부모 상을 당하여 5년간 상복을 입고 강릉의 학담(鶴潭)에 은둔하였다. 10여 차례나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마침내 병 때문에 의사를 찾아 서울로 돌아와 고양(高陽) 행호(杏湖)에 정자를 짓고 이를 범허정이라 이름지었다. 1678년(숙종 4)에 순창군수로 나갔다가 경신환국으로 귀경하였다.

다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청했고,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홍문관응교·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병조판서인 이사명(李師命)이 호포제(戶布制)를 시행하고자 하여 먼저 관서 지방에서 이를 시험해볼 것을 청하자, 적극 반대하여 시행을 철회시켰다.

승지·병조참지를 지내고 안동부사로 전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예조참의·황해도관찰사를 지냈고 춘천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병으로 돌아왔다. 그 뒤 진주목사·형조참의·개성유수·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개하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학문을 했다는 평을 받았다.

저서로는 『범허정집(泛虛亭集)』이 있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명곡집(明谷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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