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녕부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초기, 태상왕(太上王)이 된 태조와 관련된 사무를 전담하던 관서.
제도/관청
설치 시기
1400년(정종 2)
폐지 시기
1411년(태종 11)
내용 요약

승녕부(承寧府)는 조선 초기, 태상왕(太上王)이 된 태조와 관련된 사무를 전담하던 관서이다. 태조가 양위하고 태상왕으로 물러난 이후 태조의 공사 업무를 보좌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1400년(정종 2)에 설치되었으며 1411년(태종 11)에 혁파되었다.

정의
조선 초기, 태상왕(太上王)이 된 태조와 관련된 사무를 전담하던 관서.
설치 목적

1400년(정종 2) 6월 상왕이었던 태조에게 태상궁의 호를 덕수궁(德壽宮)이라 이름하고 이를 관장하는 부를 세워 승녕부라 하였다. 당시 세자였던 이방원(李芳遠)이 왕자의 주1 이후 대립하고 있던 태조 이성계의 분노를 풀고자 정종에게 요청하여 설립되었다.

기능과 역할

승녕부는 태조 이성계의 편의를 위해 설치하였다. 태조의 공무 수행을 보좌하거나 복식과 음식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태조 개인 관서였으나 주2삼사(三司)의 바로 아래 위치하게 하여 그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설치 당시 승녕부의 장관은 판사로 우인렬(禹仁烈)을, 윤으로 손흥종(孫興宗)과 정용수(鄭龍壽)를 제수하였고 그 주3소윤, 판관, 승, 주부 등을 두어 관서의 위상을 갖추었다.

변천사항

1405년(태종 5)에 육조의 사무가 개편될 당시 주4속아문 제도가 정립되었는데, 이때 이조(吏曹)의 속아문으로 편제되었다. 태조가 1408년(태종 8)에 사망한 것을 계기로 존립 이유가 사라졌으나 상례가 끝나지 않아 존속하였다. 1409년(태종 9)에는 소윤 2개의 자리가 혁파되었고, 이어 1411년(태종 11) 6월에 승녕부 관서 자체가 혁파되고 사무는 전농시(典農寺)에 귀속되었다.

승녕부에 남아 있던 재화는 1415년(태종 15)에 세자의 관부인 주5로 이관되었다. 한편, 1907년(순종 즉위) 순종이 즉위한 직후 주6이 된 고종의 문안을 전담하는 관서로 승녕부를 설치하였다. 당시 승녕부에는 총관, 부총관, 주7 등으로 편제되어서 태종 대의 승녕부와는 전혀 다른 기구이지만 그 역할은 유사하였다. 1910년 일본에 강제 합병되면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원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주석
주1

조선 초기에, 태조의 왕자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차례의 난.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과 세자 방석(芳碩)과 방번(芳蕃)이 죽었고, 2차 왕자의 난으로 방간(芳幹)과 박포(朴苞)가 죽임을 당하였다.    우리말샘

주2

품계나 신분, 등급의 차례.    우리말샘

주3

지휘관이나 우두머리의 지휘 아래. 또는 그 아래 딸린 사람.    우리말샘

주4

어느 관청에 딸린 하급 관청.    우리말샘

주5

조선 태종(太宗) 때에 두었던 세자부(世子府)의 이름. 태종 2년(1402)에 원자부(元子府)를 두고 이 이름으로 하였다가, 동왕 4년에 세자부로 삼아 사윤(司尹)·소윤(少尹)·판관(判官)·승(丞)·주부(注簿) 각 1인을 두었는데, 동왕 18년에 순승부(順承府)로 고치어 세자전(世子殿)에 속하게 하였다가, 세종(世宗) 즉위년(1418)에 인수부(仁壽府)로 고쳐서 상왕전(上王殿:太宗殿)에 속하게 하였다.    바로가기

주6

‘상황’을 높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7

임금을 곁에서 모시고 심부름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    우리말샘

집필자
나영훈(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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