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법흥왕릉 ( )

경주 신라 법흥왕릉 정면
경주 신라 법흥왕릉 정면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제23대 법흥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능. 사적.
이칭
이칭
법흥왕릉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9년 08월 27일 지정)
소재지
경북 경주시 효현동 63번지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제23대 법흥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능. 사적.
개설

1969년 사적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7만 2,817㎡이며, 경주의 서악(西岳)이라 불리는 선도산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내용

법흥왕릉은 수많은 대소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경주시내의 평지고분군을 벗어나서 교외의 야산이나 구릉지대에 축조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흥왕은 재위 27년에 승하하니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도 법흥왕의 능은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고분의 남쪽에는 신라 하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있는데, 이를 애공사지탑이라 부르고 있다.

법흥왕릉의 내부구조는 알 수 없고 외형상으로는 원형이며, 삼국시대 신라왕릉으로는 비교적 작은 편이다. 봉분의 표면이나 주위에는 아무 장식물이 없는데, 다만 봉분 아래에 자연석의 일부가 드물게 드러나 있다. 이것은 냇돌로 쌓은 둘레돌[護石]을 받쳤던 돌인데, 비슷한 유형으로 선도산 동쪽 기슭의 무열왕릉이 있다. 이러한 둘레돌 구조는 경주시내에서 냇돌만 쌓은 평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의 둘레돌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특징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 역대왕의 능묘 소재지나 장례지에 대해서 지증왕까지는 오릉(五陵)·미추왕릉·내물왕릉의 소재지만이 기록되었을 뿐, 그 밖의 다른 왕릉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된 것이 없다. 이에 비해 법흥왕 이후 역대왕에 대해서는 차례로 그 왕릉의 소재지나 장례지가 주변에 있던 사찰을 중심으로 방위·산이름·지역명 등으로 기록하였다.

지증왕과 법흥왕을 경계로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는 왕릉의 입지조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지증왕까지의 역대왕릉은 경주시내의 수많은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평지고분군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서 구별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편찬 당시에는 밀집된 고분들 가운데 역대왕릉을 일일이 구별할 수 없었다. 반면에 법흥왕 이후의 왕릉은 평지고분군을 벗어나 교외 구릉지대에 1기 또는 2·3기씩 따로따로 자리잡고 있어, 후세까지도 각 왕릉 소재지가 주변지형이나 구조물과 관련해 전해 내려올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법흥왕릉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신라왕릉의 소재지에 대한 기록은 바로 신라고분의 이러한 변천과정을 문헌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며, 아울러 그 변화의 시작이 법흥왕릉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신라왕경지역의 석실분은 6세기 중엽경에 채용되기 시작했는데, 최초의 석실을 묘제로 채택한 왕릉은 법흥왕릉이며, 이를 기점으로 석실분은 확산되어 갔다. 즉 신라고분은 6세기 초까지는 평지에 돌무지덧널무덤이 축조되었으나, 그 뒤 6세기 중엽부터는 입지조건도 구릉지대로 옮겨가고 내부구조도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 왕경 고분의 분포와 체계 변화」(김대환,『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제27집, 2006)
「고신라적석목곽분의 변천과 편년」(최병현,『한국고고학보』10·11, 1981)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최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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