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상총 ()

고대사
유적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돌방무덤. 석실분.
이칭
이칭
노서동 제137호분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돌방무덤. 석실분.
개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 노서리 고분군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우총(壺杅塚)과는 50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고분의 일련번호는 노서동 제137호분으로 1953년 6월 14일부터 26일까지 2주간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 발굴단에 의해 조사되었다. 발굴조사시 이미 3분의 1이 도굴되어 파괴된 돌방무덤이었음이 확인되었는데, 고구려지역의 수 많은 돌방무덤들을 연상하게 한다.

내용

고분의 규모는 지름 17m, 높이 5m이다. 이 고분은 평지에 터를 닦고 널방[玄室]과 널길[羨道]의 네 벽을 쌓아올린 뒤 뚜껑돌[蓋石]을 덮고 봉토를 씌운 형태이다. 널방에 널받침[棺臺]을 만들고 1차로 시신을 안장한 후 2차로 1구의 시신을 더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두 주인공의 성별을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유물은 전부 도굴되어 남아 있지 않으나 부부로 추정된다.

무덤 구조는 봉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돌방 정남에 4m 정도의 널길이 있다. 돌방의 바닥은 동서 길이 3.30m, 남북 길이 3m의 사각형 지면에서 2m 정도 석축을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게 한 뒤 뚜껑돌을 올려놓았다. 돌방의 높이는 약 4m이고 돌방의 정남면에 길이 1.33m, 너비 55㎝, 두께 10㎝의 2개의 널문[羨門]이 있다.

널길 측면에는 널문보다 약간 높은 너비 35㎝, 두께 10㎝의 문기둥이 서있다. 널문 위의 이맛돌[楣石]은 사방 45㎝, 길이 1.65m이고 널문의 돌방 측면 아래턱에는 장방형의 벽돌 3개가 놓여 있었다.

널길은 너비 1.35m, 높이 1.50m이다. 널문에서 약 1.6m 거리에서부터 사람머리 크기의 냇돌로 막았고, 널길의 천장은 100∼160㎝의 돌 3개로 축조되었다.

돌방 중앙부에는 동서 길이 230㎝, 남북 길이 200㎝, 높이 300㎝ 정도의 자연석과 벽돌을 이용해 전후좌우 30㎝ 정도의 거리를 두고 2인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널받침을 만들었다.

널받침은 북벽 측의 것이 먼저 만들어졌는데 길이 230㎝, 너비 150㎝이다. 2차로 널문을 열고 들어가 널받침의 너비를 70㎝ 정도 늘려서 그 위에 제2의 시신을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제1영좌(靈座)는 길이 90㎝, 너비 30㎝, 두께 20㎝의 인공을 가한 6개의 응회석(凝灰石)을 놓고 시신의 머리·몸·다리를 놓을 만큼 조각해 정교하게 파놓았다. 제2영좌는 이보다 약간 간략하나 충효리 돌방고분과 같이 돌베개와 두 쪽의 발받침[足座]이 놓여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이 무덤에는 널은 사용하지 않고 시신에 의복을 입힌 채로 널받침 위에 안치한 듯하다. 두 주인공의 신장은 알 수 없으나 제1영좌의 머리를 놓기 위해 파놓은 자리까지의 길이는 약 150㎝ 밖에 되지 않아 성년남자로 보면 단신일 것이다.

그리고 제2영좌의 돌베개와 발받침의 거리가 움직여졌으므로 거기에 놓인 시신의 신장도 알 수 없다. 돌방의 내부는 천장돌과 사방의 벽, 널받침의 표면 전부, 땅바닥 널문까지 전부 약 3㎝의 두께로 석회를 바르고 널길도 천장석 벽면을 모두 석회로 발랐다.

널문의 양쪽에는 각각 귀면(鬼面)으로 된 자릿쇠[座金]위에 한 쌍의 청동제 문고리와 그 아래 비스듬히 빗장이 달려 있는데 이것은 오른쪽 문이 약간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유물은 일찍이 대부분 도굴되었으며, 작은 그릇조각[盒片]만 수습되었다. 그릇조각 표면에는 소성시 고열로 인한 자연유(自然油)가 있다. 문양은 콤파스같은 기구로 이중반월문(二重半月文)을 기면 전체에 띠모양[帶狀]으로 찍은 것이 있고, 뚜껑[蓋]에 해당하는 부분의 표면에는 문양이 없다.

또한 높은 열로 소성된 경질토기조각과 기벽의 두께가 7㎜ 정도 되는 대형토기조각도 수습되었다. 한 쌍의 청동제 문고리는 지름이 12㎝로 도철문(饕餮文)이 있으며, 높이는 10㎝, 너비는 왼쪽의 것이 14㎝, 오른쪽의 것이 15㎝이다.

의의와 평가

쌍상총은 마총(馬塚)과 같이 경주 노동동 일대에 널리 분포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아니고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신라고분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토된 토기의 양식이나 돌방의 형식으로 보아 7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으로 믿어지나 보다 일찍 조영되었을 개연성도 있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보아 마립간기(麻立干期) 신라 왕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신라고분연구』(최병현, 일지사, 1992)
「경주노서리 쌍상총, 마총, 138호분 발굴조사보고서」(김재원·김원룡, 을유문화사, 1955)
집필자
김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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