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 3·1운동 ( )

근대사
사건
1919년 3·1운동 때 황해도 안악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목차
정의
1919년 3·1운동 때 황해도 안악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개설

안악군은 민족운동과 신문화운동의 근원지로 이미 안악의거와 105인사건을 통해 많은 희생과 곤욕을 겪었다.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 서울과 도내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에도 감히 거사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은홍면 온정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경과와 결과

이 운동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참배차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온 박치간(朴治幹)·정계로(鄭啓老)·유용원(柳龍源) 등이 주동해 3월 11일에 일어났다.

은홍·대행·서하 등 3면에서 모인 수백 명의 군중은 박치간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은 뒤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선두로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3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많은 사람이 부상하였으며, 주동 인물들은 검거, 구금되었다.

그 뒤 안악읍에서는 3월 28일, 기독교인 중심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되었으나 25명이 강제 검속된 채 해산하였다. 4월 2일에는 다시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500∼600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9일용문면 동창리에서도 만세시위가 크게 전개되었다. 이 날 12시경 예배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기독교인과 배영학교(培英學校) 생도들은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에 나섰다. 이때 온 장터의 장꾼들과 주민들이 가세해 시위군세는 온 시가지를 진동시켰다.

이에 당황한 헌병주재소에서는 안악읍의 헌병·경찰의 증원을 받아 시위대열을 해산시키고 닥치는대로 검거, 구금하였다. 구금된 50여 명에게는 갖은 악랄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 중 만세시위에 앞장섰던 정정렬·김은애·장학래 등 여성들에 대해서는 윤리도덕을 외면한 나체수욕(裸體羞辱)을 자행하였다.

일제측의 이러한 만행을 알게 된 민중은 격분하여 다시 일어섰다. 청년들은 4월 8일 다시 조직적인 제2차 동창포만세시위를 거행했으나, 일제는 처음부터 야만적인 무력행동으로 시위행렬을 저지했기 때문에 시위군중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밖에 3월 31일문산면에서 70여 명의 군중이, 4월 7일용순면에서 김관섭(金寬燮)·김기형(金基瀅) 등의 주동으로 400여 명의 군중이 각각 만세시위를 벌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집필자
김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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