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윤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공조판서,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선경(善卿)
시호
익헌(翼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57년(세조 3)
사망 연도
1535년(중종 30)
본관
광주(廣州)
주요 관직
형조참판|예조참판|한성부윤|형조판서|공조판서|좌참찬
정의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공조판서,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경(善卿). 참판 안성(安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종생(安從生)이고, 아버지는 안동판관 안팽로(安彭老)이다. 어머니는 복천군(福川君) 참판 권개(權愷)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77년(성종 8) 식년시에서 생원에 급제하였고, 1483년(성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등용되었다. 그 뒤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박사가 되고, 1487년에 종부시주부, 1488년에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고, 이어서 병조좌랑이 되었다. 1495년(연산군 1)에 형조정랑이 되고, 149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인(舍人)·지제교 겸 사관(知製敎兼史官)이 되었다.

1498년에 사간이 되고, 이어 상례(相禮)·직제학을 거쳐 1500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다음해에 도승지가 되었다가 경상도·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형조참판을 거쳐 1503년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그 해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해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김제에 유배되었다.

1507년(중종 2) 형조참판에 등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거쳐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510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지중추부사에 오르면서 경상도 도순찰사 겸 부원수가 되어 왜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한성부윤·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15년에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단군과 기자의 사당을 수축하여, 경조정신(敬祖精神: 선조의 숭배정신)과 유풍(儒風)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한때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521년에 공조판서로 복직하고,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1526년 기로소에 들고, 1527년에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호음잡록(湖陰雜錄)』
『순암문집(順菴文集)』
집필자
이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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