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남도 안주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남도 안주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남도 서북단에 있는 군.
정의
평안남도 서북단에 있는 군.
개설

동쪽은 개천군과 순천군, 남쪽은 평원군, 북쪽은 평안북도 박천군과 영변군에 접하고, 서쪽은 황해에 면하여 있다.

동경 125°22′∼125°49′, 북위 39°26′∼39°42′에 위치하며, 면적 692.2㎢, 인구 9만261명(1938년 현재)이다. 1개 읍 7개 면 169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안주읍 북문리이다.

안주군의 자연환경

동쪽은 묘향산맥의 지맥인 자모산맥(慈母山脈)이 뻗어 내려 마두산(馬頭山, 536m)·서삼봉(西三峰, 451m)·두미산(頭尾山, 419m)·상산(上山, 528m)·원룡산(元龍山, 301m) 등이 솟았고, 그 밖은 가두산(加頭山)·태조봉(太祖峰, 167m) 등 2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이다.

북쪽은 묘향산에서 발원한 청천강이 평안북도와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가고, 강을 따라 좁은 유역평야가 발달되었다. 동부 구릉 지대를 제외한 지역은 넓고 낮은 안주평야가 펼쳐진다. 지질은 선캄브리아기의 편마암이 주를 이루지만, 서쪽 일부는 신생대의 변암·사암·혈암으로 되었다.

기후는 해양과 접하고 있어서 비교적 따뜻하지만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기온의 일교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8.6℃, 1월 평균 기온 -10.3℃, 8월 평균 기온 24.5℃, 연 강수량 1,085㎜이다.

안주군의 역사

고대의 안주군

고조선 때부터 이곳에 고을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나, 기록의 미비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국내성(國內城)을 근거로 하여 남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세력이 이곳까지 미친 것은 태조왕 때였으며, 427년(장수왕 15)의 평양 천도와 지방 행정구획의 정비에 따라 식성군(息城郡)이라는 이름으로 청천강의 주요한 고을이 되었다.

612년(영양왕 23) 수(隋)나라의 대군을 섬멸한 살수대첩은 이곳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수나라 30만 대군의 침입을 맞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그의 휘하 군대를 5군으로 나누어 제1군을 요동(遼東)에 배치하여 대적하게 하고, 제2군을 안주의 회현(回峴)에, 제3군을 개천군 건지산(乾芝山)에 배치하여 청천강전투에 대비시켰고, 제4군을 평양 외곽인 평원군 주산(周山)에 배치시켰으며,

본부대는 평양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을지문덕은 적을 교묘하게 평양성 밖 30리까지 깊숙이 유도한 뒤, 지쳐서 전의를 잃고 안주 근처에서 청천강을 건너 패퇴하는 적에게 맹공을 가하여 요동을 떠날 때 30만5000명의 적군 가운데 2,000여 명만이 살아 돌아갈 수 있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 뒤 거듭되는 수나라의 침입을 요동 일선에서 격퇴하여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통일신라 시대에 한때 국경 밖의 땅으로 버려졌다. 경덕왕대에 중반군(重盤郡)이 설치되었으나 신라의 국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고려시대의 안주군

태조 때 고을 이름을 팽원군(彭原郡)으로 고쳤다. 그 뒤 북진정책의 강행에 따라 청천강의 군사적 요지인 이곳을 서경(西京)의 외곽 요지로 중시하여 931년(태조 14)에 안북부(安北府)로 격을 높였고, 성진(城鎭)을 쌓게 하였다. 983년(성종 2)영주안북대도호부(寧州安北大都護府)로 승격시켜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서북 국방의 요지로 삼았다.

1018년(현종 9)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로 개칭하였다. 당시 이곳은 역참제(驛站制) 실시에 따라 서북 지방의 주요 교통로인 흥교도(興郊道)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고려 초부터 거란·몽고·홍건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서북 군사 요지로 큰 구실을 하였다. 의종 때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두었다가 파하였다. 1369년(공민왕 18)에 안주만호부(安州萬戶府)를 두었다가 뒤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조처는 모두 이곳의 군사적 의의를 중시, 취하여진 일들이었다.

조선시대의 안주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곳은 군사적 요지, 정치적 고읍으로서 여전히 중시되었다. 조선 8도의 하나인 평안도(平安道)라는 도명이 곧 평양과 안주를 중심한 지역이라는 데에서 나온 것만 보아도 이곳이 얼마나 중시되었는지 알 수 있다.

세조 때에 진관목(鎭管牧)으로 목사(牧使)·판관(判官)·교수(敎授)가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인조 때에 이괄(李适)의 난이 있은 뒤 병영을 이설하고, 절도사로 하여금 안주목사를 겸하도록 조처하여 군사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뒤 1682년(숙종 8)에 민정중(閔鼎重)의 계청으로 판관을 혁파하고 목사를 다시 설치하였다. 1812년(순조 12)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822년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는 등 변천이 빈번하였다.

근대의 안주군

1895년 을미개혁으로 지방관제를 개정할 때 평양부 안주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에는 3등군으로서 평안남도 안주군이 되었다. 1905년 최영주(崔永柱)·이동직(李東稷) 등이 안흥학교(安興學校)를 설립한 이후 많은 소학교가 세워졌다.

1913년 행정구역 개편이 단행될 때 청천강 이북에 속한 지역은 평안북도 박천군과 영변군으로 편입되었고, 대신 청천강 남안에 근접한 도서는 이 군에 병합되었다(본래의 박천군 덕안면 박비리와 중흥리, 영변군 독산면 구봉리와 남평리 일부). 1917년에 주내면이 안주면으로 개칭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우근(金宇根)·김찬성(金燦星)·김성택(金成澤) 등이 이곳의 만세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뒤에 만주로 가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1년 안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13년 이후로 이곳은 청천강 주변의 넓은 들과 청천강의 수운을 이용한 상업 도시로 그 면모를 달리하게 되었고, 교통의 요지로 큰 구실을 하는 곳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다.

안주군의 유물·유적

서북 지방의 역사적 고읍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이미 고구려 시대에도 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안주성(安州城)은 995년(성종 14)에 고려의 명장 서희(徐熙)가 축성한 것이며, 그 뒤 1607년(선조 40)에 개축되었다. 석축성으로 주위 3,043보, 높이 13척의 규모였다고 하지만, 오늘날 문루와 성벽은 태반이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안주성에 남아 있는 성루의 하나인 백상루(百祥樓)는 T자형 이층 건물로서 그 규모가 관서 제일의 누각이다. 건립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구려 말기나 통일신라 초기로 보고 있으며, 일설에는 615년(영양왕 26)에 세웠다고도 한다. 옛날에는 누 밑으로 청천강이 흘렀다고 하지만 지금은 약 700m 밖으로 강이 흐르고 있다.

300여 년 전에 퇴락한 이 누각을 당시의 병사(兵使) 김윤변(金潤辨)이 재건하였으며, 1917년에 다시 개수하였다. 안주성 안에 있는 칠성지(七星池)는 주위가 550m나 되는 인공의 못이며, 안주성 축성 때 조영된 것이라고 전한다. 못 가운데 칠각으로 된 칠성정(七星亭)이 세워져 있다. 안주성 북쪽 칠불산에 칠불사가 있다.

살수대첩 때 7명의 승려가 수군(隋軍)을 유인하여 강을 건너던 곳을 오도탄(誤渡灘)이라고 한다. 한편, 골적도(骨積島)라고 불리는 청천강의 하중도(河中島)는 살수대첩 때 몰살된 수군의 시체로 이루어진 섬이라 전하여지고 있다.

서삼봉에는 이곳 용화면 마산리 출생으로 전하여지고 있는 임진승병장 서산대사가 묘향산으로 입산하기 전에 수도하던 곳으로,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 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밀려오는 적군을 맞아 싸우다 패하자 자결한 남이흥(南以興) 외 15명의 충신 열사를 제향하는 충민사도 그 대표적 유적이다.

안주군의 교육·문화

조선 시대의 교육기관인 안주읍 신성리에 있는 충민사는 정묘호란 때 안주성을 지키다 순절한 남이흥·박명룡(朴命龍) 등 15인을 봉사하기 위하여 1681년(숙종 7)에 건립되었다.

청천사(淸川祠)는 을지문덕·이원익(李元翼)·최윤덕(崔潤德) 등을 봉사하기 위하여 1670년(현종 11)에 건립되었으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로 혁파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1년 안주읍에 안주공립보통학교(1938년 청남국민학교로 개명)가 처음으로 개교하였고, 1906년 운곡면에 도명학교가 개교하였다. 1907년 운곡면에 개교한 공성학교와 1909년 개교한 유신학교는 장로교 계통의 학교였고, 1910년 동면에 개교한 동명학교는 마을 재산으로 운영되었다.

한말에 세워진 학교들은 한일합방 후 거의 폐교되었고, 3·1운동 이후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한 사립학교가 많이 설립되었다. 1922년 안주읍에 천도교 계통의 보광학교, 1924년 동면에 대성학교, 신안주면에 대흥학교, 1926년 대니면에 대명학교가 각각 개교하였다.

중등학교는 1907년 지방 유지들의 후원으로 협성안흥중학교가 개교하였으나, 한일합방 후 일제의 사학 탄압으로 폐교되었고 그 재산은 1911년에 개교한 안주농업보습학교로 넘어갔다. 안주농업보습학교는 1928년 5년제 안주공립농업학교로 승격되었고, 1945년 안주농업전문학교가 되었다.

1936년 안주공립고등보통학교가 개교하였는데, 1938년 안주공립중학교로 개명하였다. 이 밖에 특수학교로 대니면 용호리에 한태경(韓泰卿)이 경영하던 맹영학교가 있었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0개교, 중학교 1개교, 농업학교 1개교가 있다.

종교 상황은 1945년 현재 불교 사찰 7개, 개신교 교회 20개, 천도교당 19개가 있다. 사회단체로 개화기에 기독면려청년회(基督勉勵靑年會)·여자청년회(女子靑年會) 등이 지역 개화를 위한 활동을 폈으며, 한말에는 동지회(同志會)가 국권 회복에 기여하고, 김성택(金聖澤)·김우근(金宇根)·박기제(朴基濟)·안재환(安載煥)·허형(許炯) 등의 열사를 배출하였다.

1920년대에는 안주사상연구회·청년당·농촌청년회동우회·농민협의회·학생협회·안주소년동맹·사월회·안주노동조합·안주신간회지부관서기자단 등 각종 사회단체가 민중의 계몽, 독립 의식 고취에 앞장서서 이 군은 민족의식이 강한 지역으로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지방에 전래되고 있는 설화로 〈열두삼천벌〉·〈서삼봉〉 등이 전한다. 〈열두삼천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 왕비인 녹족부인(鹿足夫人)은 한 번에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어머니처럼 사슴 발을 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열두 아들을 궤짝에 넣어 바다에 버렸다.

20년 뒤 당나라 장군 열두 명이 각기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침범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녹족부인이 들에 나가 누각을 세우고 열두 장군을 초청하여, 열두 켤레의 신과 열두 개의 젖꼭지로 시험해 보았다.

그것들이 모두 열두 장군의 발과 입에 모두 맞았으므로 그들은 녹족부인이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모의 나라를 침범할 수 없다고 그냥 돌아갔다. 그후에 들판은 열두 장군이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온 곳이라 하여 ‘열두삼천벌’이라 하였다.

〈칠불사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수나라 군사가 을지문덕의 꾐을 받아 청천강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이 막상 강 건너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 마침 7명의 승려가 나타나 옷을 걷고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수나라 군사는 그것을 보고 청천강이 얕은 것으로 알고 서로 다투어 강을 건너가다 모두 강물에 빠져 죽었다. 그후에 고구려 군대에 승리를 안겨 준 7명의 승려를 추모하여 절을 짓고 칠불사라 하였으며, 승려들이 물을 건넌 곳은 오도탄이라 하였다.

이 밖에 묘향산 일부가 사태로 떠내려와 쌓였다는 〈태향산전설〉, 눈병 있는 사람이 씻으면 즉시 낫는다는 〈불현전설〉, 을지문덕의 청천강 대첩 때 죽은 수나라 군사의 뼈로 이루어졌다는 〈골적도전설〉 등이 전한다.

안주군의 산업·교통

열두삼천벌이라 불리는 넓고 기름진 평야가 펼쳐졌고, 수리 시설도 잘되어 농업이 주산업을 이룬다. 전체 경지면적은 3만663㏊, 논은 1만5029㏊, 밭은 1만5634㏊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메밀·콩·옥수수·수수 등이고, 특용작물로는 면화·들깨·참깨·무·오이·사과·배 등이 생산된다. 안주쌀은 생산량이 도내의 수위를 차지하였으며, 품질도 좋아 일제 시대에는 ‘마루나’·‘ナ’라는 이름을 붙여 일등미로 일본에 반출되었다.

일찍부터 누에치기가 발달하여 안주에서 생산되는 명주·항라·안주수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안주수는 예로부터 명주·항라 등의 명산지로 유명한 이곳에 서울의 궁중 귀인이 와서 살면서 수를 놓는 기술을 전수한 데에서, 또는 이곳으로 유배 온 사람들이 소일거리로 수를 놓기 시작한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으로 사군자·기와 무늬에 수를 놓은 베갯모 등은 전국에 널리 알려져 혼숫감에는 반드시 안주수의 베갯모가 곁들여져야 하였을 정도로 유명하다.

축산업은 청천강 지류 유역에 목초지가 많아 축우 사육이 활발하며, 안주읍 선흥리는 대표적인 우량우 사육지이다. 수산업은 청천강 어귀 근해에서 활발하고, 입석면의 원조포 일대는 조개잡이 중심지이며, 노강진은 조개젓으로 유명하다.

주요 수산물로는 조기·갈치·준치·홍어·조개 등이 어획 및 채취된다. 청천강에서는 백어·숭어 등 담수어의 어획이 많은데, 특히 산란기에 상류로 올라와 산란하고 내려가는 숭어는 소착숭어라 하여 그 맛이 일품이다.

광업은 입석면에 연간 8만t의 갈탄을 채굴하는 안주탄전이 있다. 안주탄전은 경의선의 만성역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일찍부터 개발되었으며, 매장량이 5300만t에 달하고 품질이 좋아 수요가 증대되자 만성역까지 전용철도를 부설하였다. 광산으로는 삼화·월봉광산에서 금·은 등이 채굴된다. 제조업은 견직·염직공장 등이 있다.

상업 활동은 정기 시장 5개소, 가축 시장 4개소가 있다. 안주읍 염전장은 4·9일, 운곡면 용복장과 대니면 만성장은 5·10일, 입석면 입석장은 2·7일, 신안주면 신안주장은 3·8일에 열린다.

안주읍 안주가축시장은 3·8일에 열리는데, 육질이 좋은 평양우(平壤牛)의 집산지로서 이곳 최대 규모의 우시장이다. 그 밖에 대니면 만성우시장, 입석면 입석우시장, 신안주면 신안주우시장이 있다.

교통은 경의선이 군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통하여 군내에 신안주·만성·대교역이 설치되어 있고, 신안주역에서 지선인 개천선과 연결되어 군의 북부를 동서로 횡단하고, 개천에 이르러 만포선과 연결된다. 신안주∼함흥, 개천∼안주, 안주∼순천, 안주∼영변 간과 군내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있어서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관광 명소로는 안주읍에 안주성과 칠성공원(七星公園) 등이 있다.

칠성공원은 안주성을 축조할 때에 만든 것으로, 사방 550여m의 연못 가운데에 7개의 섬을 만들어 육지와 나무다리로 연결하여 놓고, 가장 큰 섬 중앙에는 칠각의 정자를 세웠다.

이 모양이 북두칠성을 본떴다 하여 연못은 칠성지(七星池)라 하고, 정자는 칠성정(七星亭)이라 한다. 섬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어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인근 주민의 휴식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여름철에는 낚시터, 겨울철에는 스케이트장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안주군의 읍·면

안주읍

군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읍. 인구 1만7849명(1938년 현재). 읍 소재지는 칠성리이다. 본래 읍북면(邑北面)과 주북면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병합하여 주내면(州內面)이라 하였고, 1917년 안주면으로 개칭하였다가 1931년 안주읍(安州邑)으로 승격하였다.

서쪽 동면과의 경계에 서삼봉이 솟아 있고, 남단은 마두산이 솟아 운곡면·대니면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은 묘령산맥에서 발원한 청천강이 서쪽으로 흐른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옥수수·콩·수수 등이고, 특용작물은 면화가 유명하다. 예로부터 누에치기가 발달하여 명주 등의 생산이 많았으며, 근래에는 서선염직·동양견직·서선양기 등의 공장에서 대규모로 관사·화두·숙수 등을 생산한다.

교통은 경의선이 남북으로 지나고 읍의 북부를 개천선이 동서로 지나며, 안주∼순천, 안주∼영변, 신안주∼함흥 간을 잇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다.

명승고적으로 관서8경의 하나로 꼽히는 백상루와 안주성이 있고, 성의 서소문 안에 칠성공원, 북문리에 칠불사가 있으며, 신성 안 솔밭에 충민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교, 농업학교 1개교가 있다.

칠성(七星)·청교(淸橋)·남천(南川)·율산(栗山)·건인(建仁)·북문(北門)·차장(差壯)·신성(新城)·금성(金城)·고성(古城)·원풍(元豊)·북송(北松)·서산(西山)·용연(龍淵)·선흥(船興)·도회(都會)·봉서(鳳棲)·장상(長上)·장천(長川)·신의(信義)·장흥(長興)·미상(彌上)·문봉(文峰)·화양(華陽)·용현(龍峴)·용서(龍西)·용흥(龍興) 등 27개 이가 있다.

대니면

군의 남부 중앙에 위치한 면. 인구 1만980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협흥리이다. 본래 이산면(尼山面)과 대대면(大代面)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병합하여 대니면(大尼面)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마두산이 안주읍과 운곡면과의 삼각 분수령을 이루고 있고, 문남리에 상산, 소니리에 소니봉(小尼峰, 175m)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옥수수·콩·팥·수수·감자 등이고, 특용작물로는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된다. 특히, 면화의 생산이 많고, 예로부터 누에치기가 발달하였으며, 근래에는 기술 발달로 생산량이 증대되어 항라·명주·관사·화두·숙수 등을 직조하여 인근 시장에서 거래한다. 축산은 농우 사육과 농가 부업으로 양계·양돈 등이 활발하다.

교통망은 경의선이 면의 서부를 지나고, 만성∼노강진 간을 잇는 도로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협흥(協興)·봉학(鳳鶴)·용남(龍南)·남계(南溪)·용호(龍湖)·금계(金溪)·쌍계(雙溪)·남상계(南上溪)·용흥(龍興)·문천(文川)·문남(文南)·계림(桂林)·어룡(漁龍)·용포(龍浦)·백학(白鶴)·소니(小尼)·이서(尼西)·봉명(鳳鳴)·용봉(龍奉)·발남(鉢南)·발북(鉢北)·만흥(萬興) 등 22개 이가 있다.

동면

군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인구 6,749명(1938년 현재). 동면(東面) 소재지는 용흥리이다. 면의 중앙에 두미산, 서쪽 안주읍과의 경계에 서삼봉이 있다. 북쪽으로 청천강이 흐르며, 강을 따라 좁은 유역평야가 전개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옥수수·팥·수수·감자 등이고, 특용작물로는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된다. 예로부터 누에치기가 발달하여 근래에는 기술 보급으로 생산량이 증대되었고, 항라·숙수·관사 등을 직조하여 농가 소득을 높이고 있다.

축산업은 청천강 지류 유역에 초지가 많아 원종우 사육과 우량우 증식이 많고, 농가 부업으로 양계·양돈도 활발하다. 제조업은 용흥리의 용흥염직공장에서 관사·화두·숙수를 생산하고 있다.

교통망은 개천선이 면의 북부를 동서로 지나고, 철도 연변을 따라 신안주∼함흥 간을 잇는 도로가 있으며, 면의 남부를 안주∼순천 간을 잇는 도로가 지나고 있다. 맹주리에 수원 김씨, 금서리에 수원 백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용흥(龍興)·동맹(東孟)·용계(龍溪)·맹주(孟州)·봉덕(鳳德)·평률(平栗)·명학(鳴鶴)·봉명(鳳鳴)·상서(祥瑞)·봉상(鳳祥)·봉학(鳳鶴)·연풍(延豊)·운흥(雲興)·금천(錦川)·금서(錦西) 등 15개 이가 있다.

신안주면

군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면. 인구 1만3176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원흥리이다. 본래 청산면(靑山面)과 문곡면(文谷面)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병합하여 신안주면(新安州面)이라 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옥수수·콩·팥·수수·감자 등이며, 특용작물로는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된다. 예로부터 누에치기가 발달하여 근래에는 기술 보급으로 생산량이 증대되고, 항라·명주·관사·화두 등을 직조하여 농가 소득을 높이고 있다. 축산은 농우 사육과 농가 부업으로 양계·양돈 등이 활발하다. 제조업은 인쇄 공장·양조장·도정 공장 등이 있다.

교통망은 경의선이 남북으로 가로질러 신안주역에서 개천선과 연결되고, 철도 연변을 따라 신안주∼함흥을 잇는 도로가 있다. 증암리에 신천 강씨, 운흥리에 광주 김씨·순흥 안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원흥(元興)·운흥(雲興)·운송(雲松)·창송(蒼松)·신원(新院)·용계(龍溪)·명암(明巖)·청송(靑松)·용운(龍雲)·동칠(東七)·증암(甑巖)·상팔(上八)·남칠(南七)·신성(新成)·송학(松鶴)·봉림(鳳林)·오(五)·낙만(樂萬)·소학(巢鶴)·원일(元一)·운학(雲鶴)·송죽(松竹)·신(新) 등 23개 이가 있다.

연호면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65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흥리이다. 본래 연경면(燕坰面)과 평호면(平湖面)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병합하여 연호면(燕湖面)이라 하였다.

북쪽으로 청천강이 흘러 서해로 유입한다. 서해안에 넓은 간석지가 전개되지만 대부분이 갯벌로 되어 있어 양항의 발달을 저해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수수·옥수수·감자 등이고, 특용작물로는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된다. 누에치기는 안주목사 이원익(李元翼)이 뽕나무 재배와 누에치기를 장려한 이래 계속 발달하여 왔으며, 근래에는 기술 보급으로 많은 누에고치를 생산하고, 항라·명주·관사·화두·숙수 등을 직조하여 농가 소득을 높이고 있다.

축산은 농우 사육과 농가 부업으로 양계·양돈 등이 활발하다. 수산업은 청천강 하구와 서해 연안에서 발달하였고, 수산물로 조기·갈치·준치·홍어·새우·조개와 담수어로 숭어·백어 등이 있다. 내삼리에 광주 이씨, 남일리에 경주 김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용흥(龍興)·동서(東西)·내삼(內三)·용삼(龍三)·남이(南二)·남일(南一)·북흥(北興)·남흥(南興)·중흥(中興)·노안(老安)·박비(博飛)·용오(龍五)·동림(東林)·서흥(西興)·신설(新設)·인흥(仁興)·신양(新陽)·상팔(上八)·남사(南四) 등 19개 이가 있다.

용화면

군의 서부 중앙에 위치한 면. 인구 8,413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연리이다. 본래 용두면(龍頭面)과 갈화면(葛花面)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병합하여 용화면(龍花面)이라 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옥수수·콩·팥·감자 등이고, 특용작물로는 면화·깨 등이 생산된다. 특히 면화의 생산이 많으며, 누에치기는 예로부터 발달하여 농가 소득을 높이고 있다. 축산업은 농우 사육과 농가 부업으로 양돈·양계 등이 활발하다. 제조업은 운천리에 솥 및 농기구 등을 생산하는 서선주물공장이 있다.

교통망은 경의선이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고, 입석∼신안주 간을 잇는 도로가 철도 연변을 따라 있으며, 만성∼노강진을 잇는 도로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용연(龍淵)·용반(龍盤)·봉학(鳳鶴)·마산(馬山)·삼산(三山)·응암(鷹巖)·상북동(上北洞)·운천(雲川)·약천(藥泉)·용남(龍南)·용담(龍潭)·용중(龍中)·용전(龍田)·용운(龍雲)·용흥(龍興) 등 15개 이가 있다.

운곡면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인구 8,480명(1938년 현재). 운곡면(雲谷面) 소재지는 용복리이다. 서북쪽에 안주읍·대니면과 삼각 분수령을 이루는 마두산이 있고, 반룡리에 접무봉(蝶舞峰, 340m), 원룡리에 원룡산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옥수수·콩·팥·수수·밀·보리·감자 등이고, 특용작물로는 면화·고추·깨 등이 있다. 예로부터 면화 생산량이 많고, 누에치기가 성행하였으며, 근래에는 기술 개량으로 생산량이 증대되어 농가 수익을 높이고 있다. 축산업은 농우 사육과 농가 부업으로 양계·양돈 등이 활발하다.

교통망은 안주∼순천 간을 잇는 도로가 면의 중앙을 지나고, 숙천∼성천 간을 잇는 도로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용복(龍伏)·용림(龍林)·용천(龍川)·용학(龍鶴)·용전(龍田)·용서(龍西)·재전(在田)·원흥(元興)·용담(龍潭)·용택(龍澤)·중흥(中興)·원룡(元龍)·구룡(九龍)·어룡(漁龍)·용흥(龍興)·반룡(反龍)·운룡(雲龍)·온상(溫上)·입석(立石)·온흥(溫興) 등 20개 이가 있다.

입석면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4549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주리이다. 본래 누천면(漏泉面)·남송면(南松面)·남면(南面)·서면(西面) 등 4개 면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병합하여 입석면(立石面)이라 하였다.

청천강 어귀에 태향산이 있고, 산 아래에 수군첨절제사가 방어진을 구축한 노강진의 옛 자취가 있으며, 그 위로 전선포가 있다. 군내에서 가장 평야가 많은데, 이 면 일대의 평야를 열두삼천벌이라 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수수·옥수수·감자 등이며, 수산업은 원조포 일대가 조개잡이 중심지이며, 조개·조기·준치·갈치·홍어·새우 등이 채취 및 어획된다. 특히, 노강진의 조개젓이 유명하다. 광업으로 연간 8만 톤의 갈탄을 채굴하는 안주탄전이 있다.

교통망은 만성∼노강진, 입석∼신안주 간을 연결하는 도로가 있다. 용담리에 남양 홍씨, 내동리에 양근 함씨, 성법리에 광주 김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용주(龍珠)·입석(立石)·용운(龍雲)·신명(新明)·용흥(龍興)·왕산(王山)·송산(松山)·용정(龍井)·용지(龍池)·성법(聖法)·동호(銅壺)·신(新)·인풍(仁豊)·내동(內洞)·호남(湖南)·기산(岐山)·남조(南造)·상공삼(上公三)·해서(海西)·서호(西湖)·남단(南端)·원북(元北)·중흥(中興)·남상(南上)·용림(龍林)·용담(龍潭)·연흥(蓮興)·용북(龍北) 등 28개 이가 있다.

광복 후의 안주군

1952년 12월 용화면·연호면·입석면의 일부 지역이 문덕군에 편입되었고, 1954년 개천군 서남리와 상서리의 일부 지역이 송암리로 되었다. 1961년 3월 원흥리를 신안주노동자구로 개칭,1967년 10월 금성리를 원풍리에, 삼용리 일부를 이상리에 편입하고 금성리·삼용리를 폐지하였다.

1972년 11월 구안주노동자구를 신안주노동자구로 개칭하였다. 1980년 6월 평안북도 박천군 남흥노동자구와 송도리·남흥리·용흥리·덕성리가 안주군으로 편입되었다. 1987년 8월 시로 승격되었다.→안주시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1973)
「韓國民間傳說集」(崔常壽, 通文館, 1964)
「平安南道誌」(平安南道誌編纂委員會)
「以北5道30年史」(以北5道委員會, 1983)
「安州郡誌」(安州郡民會, 1980∼1986)
「北韓文化財 實態와 現況」(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1968)
「人物의 고향-北韓篇-」(, 中央日報社, 1958)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65)
집필자
노도양·김유균·이원순·강진옥·박연두·김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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