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단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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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개념
불로장생의 약으로 믿었던 단(丹)을 만드는 기술의 하나를 가리키는 도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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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불로장생의 약으로 믿었던 단(丹)을 만드는 기술의 하나를 가리키는 도교용어.
내용

서양과 아라비아의 중세 과학발달에는 연금술이 상당히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금속을 변화시켜 금을 얻으려는 노력이 그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연금술보다는 불로장생의 약, 즉 단을 구하려는 노력으로 연단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는 연금술은 물론 연단술도 별로 발달한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연단술은 원래 도교의 근본사상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여 우리 나라의 도교사(道敎史)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유교·불교·도교의 셋이 모두 중요한데 우리 나라에는 도교가 성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도교를 배워오기를 건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능화(李能和)는 그의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서 ‘조선 단학파(丹學派)’라는 장(章)을 두어 연단술 또는 단학이 우리 나라 도교사의 중요한 한 부분임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단학 또는 연단술에 관련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일찍 이 분야에 눈을 뜬 사람은 통일신라말의 김가기(金可紀)·최승우(崔承祐)와 승려 자혜(慈惠) 등으로 당나라에 가서 단학을 익혀가지고 돌아와 국내에 보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최치원(崔致遠)이 바로 ‘동방 단학의 비조’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저술로는 인조 때에 나온 것으로 전하여지는 저자 미상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그뒤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 조여적(趙汝籍)의 『청학집(靑鶴集)』 등이 알려져 있다.

조선 초부터 단학은 어느 정도 활발하게 전개되어, 김시습(金時習)·홍유손(洪裕孫)·남추(南趎)·정렴(鄭Ꜿ)·전우치(田禹治)·윤군평(尹君平)·곽재우(郭再祐)·권극중(權克中) 등을 들어 이능화는 단학파로 지목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단학파들은 한결같이 태식(胎息)·운기(運氣) 등을 강조하는 이른바 내단(內丹)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외단(外丹) 내지 금단(金丹)에는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김시습의 글 가운데 있는 ‘용호(龍虎)’란 바로 납과 수은을 가리키는데 납과 수은을 그릇에 넣고 밀봉해 불을 지펴 그 기운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여 금단을 만든다는 이치가 설명되어 있다. 또 정렴의 글 가운데에도 ‘용호비결’이 있는데, 이 또한 원래의 의미는 납과 수은을 이용한 불로장생의 약을 만들려는 수단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연단술은 크게 내단과 외단으로 나눌 수 있다. 외단이란 불로장생을 위한 또는 신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약물을 복용하려는 노력으로 대표된다. 중국에서 진(晉)나라의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는 특히 외단법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위백양(魏伯陽)의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는 오히려 내단을 강조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미 중국에서는 오랜 외단법의 발달이 많은 부작용을 일으켜 적지않은 사람들이 금단을 복용하여 목숨을 잃는 수가 있었고,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뒤늦게 연단술을 익히게 된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외단을 완전히 그만둔 채 내단으로만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조선시대의 학자층이 외단에 거의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된 이유의 다른 하나는 우리 나라가 중국보다 오히려 강한 유교 전통을 지켜왔기 때문에 유교사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도교적 연단술이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 선조 때의 의사 허준(許浚)은 그의 『동의보감』에서 정(精)·기(氣)·신(神)의 세 가지, 곧 도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강조하여 도교적인 의학사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실제로 허준의 의학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의학은 내단법의 정신을 계승하여 끊임없이 양성과 양생 등을 중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본격적인 연단술은 외단은 완전히 무시한 채 내단에만 열중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의 글에 남아 있는 것은 벽곡(僻穀) 같은 음식물 조절법이나 호흡조절법 등의 전형적인 내단술에 관한 것뿐이었다. 본격적인 외단술의 발달은 근대화학의 발달과 맥이 통할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의 연단술은 그런 측면은 거의 발달한 일이 없었다. 내단술을 중심으로 한 우리 나라의 연단술은 어느 정도 발달하였지만, 이 부분 역시 지나치게 강한 유교전통 속에 크게 떨칠 수는 없었고, 다만 의학사상의 전개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으로 풀이된다.

참고문헌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이능화, 보성문화사, 1977)
『한국도교사상(道敎思想)연구』(차주환,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78)
『도교(道敎)와 한국사상』(한국도교사상연구회, 범양사, 1987)
집필자
박성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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