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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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에 불을 켜고 부처에게 복을 비는 불교행사. 국가행사.
내용 요약

연등회는 정월 대보름에 불을 켜고 부처에게 복을 비는 불교 행사이다. 불교에서 연등은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고 바르게 하여 불덕(佛德)을 찬양하고, 대자대비한 부처에게 귀의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의종 때 백선연(白善淵)이 4월 8일에 점등하였다는 것이 사월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공민왕은 직접 초파일 연등을 열었고, 이후 서민층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2012년 4월 6일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0년 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목차
정의
정월 대보름에 불을 켜고 부처에게 복을 비는 불교행사. 국가행사.
내용

551년(진흥왕 12)에 팔관회(八關會)의 개설과 함께 국가적인 행사로 열리게 되었고, 특히 고려 때 성행하였다. 불교에서는 불전(佛前)에 등을 밝히는 등공양(燈供養)을 향공양(香供養)과 더불어 중요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불전에 등을 밝혀서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고 바르게 하여 불덕(佛德)을 찬양하고, 대자대비한 부처에게 귀의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법화경』의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서는 등공양의 공덕이 무량하다고 지적되어 있으며, 『삼국유사』 권5의 감통편(感通篇)에도 불등에 관한 설화가 있다. 이들은 모두가 등불을 밝히는 참된 의미를 밝히고 있다. 등을 밝히는 것이 곧 연등이고, 연등을 보면서 마음을 밝히는 것을 간등(看燈) 또는 관등(觀燈)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관등행사가 매년 정월 15일에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연례적으로 이 행사가 행하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동국세시기』에는 정월을 등절(燈節)이라 하여 등을 밝히면서 밤을 세웠으며, 대보름에는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를 하면서 풍년과 흉년을 점치고 풍년을 빌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속은 불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고대로부터 전해 온 풍년기원제의 성격을 띤 행사였다.

또한, 『동국세시기』에는 2월 초에 제주도에서 있던 영신제(迎神祭)와 함께 연등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연등의 시원은 우리 고대사회에서의 농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신라의 정월 15일 연등은 풍우신인 용신에 대한 시농기원제(始農祈願祭)인 용동제 및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천문태일성수제(天文太一星宿祭)가 불교 전래 후 불교의 등공양인 연등과 주1되어서 팔관회와 아울러 국가적인 행사로 거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용신앙은 신라인에게 있어서는 농업신으로서만 신앙되어진 것이 아니라, 호국불교신앙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것은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동해의 용이 되었다는 설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신라의 연등은 사농(司農)과 호국호법으로서의 용신(龍神)에 대한 제사, 태일성제(太一星祭), 그 밖에 민족적 행사가 불교의 등공양과 습합된 종합적 가무제(歌舞祭)로 행하여졌으며, 그 행사는 호국신앙의 대본산(大本山)인 황룡사에서 거행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훈요십조(訓要十條)』에 의거하여 연등회가 거국적인 행사로서 성대하게 시행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정월 15일에 연등이 있었으며, 정월 15일의 연등이 987년(성종 6) 10월에 주2되었다가 현종 때 2월 15일로 주3해서 그 뒤 고려 멸망 때까지 열렸다. 이 행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현종 이후의 연등설화에 관한 기록은 104번이지만 2월 연등으로 정하였던 연등회가 반드시 그 날짜를 지켜서 거행되지는 않았다.

1105년(숙종 10)에는 정월에 연등을 행하였고, 의종 때의 연등회는 20회 모두 정월에 열렸다. 그리고 1105년의 연등에 대하여 『고려사』에는 다른 연등회 기사와는 달리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태조의 정신을 의식적으로 추종함을 의미하고 있다. 의종 당시의 경우에는 인종주4을 피하기 위하여 정월 연등을 행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명종 때에도 15회 연등행사를 거행하였는데 대부분이 2월에 설회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인종의 기월(忌月:제사달)이 정월이기 때문에 2월로 하자는 청에 의하여 그렇게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연등은 망일(望日:보름날)에 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날이 주5인 경우에는 15일 미리 앞당겨서 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기적인 연등회외에도 특설 연등회가 수시로 있었음을 볼 수 있다.

1067년(문종 21)에 흥왕사(興王寺)가 낙성되었을 때 축제와 함께 5일 밤낮을 계속한 연등회가 성대히 행하여졌다. 또한, 1073년 2월에는 봉은사(奉恩寺)에서 불상을 새로 조성하고 주6을 위한 연등회가 열려 관등과 주연이 밤늦도록 베풀어졌음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문종 때에는 경령전(景靈殿) · 중광전(重光殿)에서 성대한 연등회가 있었고, 선종이 8월부터 11월 초순까지 서경(西京)에 머물렀던 기간 동안 서경의 흥국사에서 연등도량이 열렸고 거리에도 등을 달았다.

1102년(숙종 7) 9월에도 궁궐에서 신호사(神護寺)까지의 길에 수만 개의 등을 달았고, 1296년(충렬왕 22) 5월에는 공주가 신효사에 가서 연등을 하였는데, 주옥(珠玉)으로 등을 만들어 매우 화려하였다고 한다. 1314년(충숙왕 1) 2월에는 묘련사(妙蓮寺)에서, 3월에는 왕륜사(王輪寺)에서, 1319년 2월에는 강안전(康安殿)에서 공주가 연등하였고, 1324년에는 상왕이 정경궁에서 5일 동안 점등하였다.

12월에는 정경궁에서, 1331년(충혜왕 1) 정월에는 연복사(演福寺)에서 각각 승려 2,000명을 공양함과 동시에 2,000개의 등을 밝혔다. 만등회는 등 1만 개를 점등하여 공양하는 의식으로, 이 만등회는 이미 1166년(의종 20)에 열린 기록이 있다. 또한, 공민왕도 문수법회(文殊法會) 때 성대하게 연등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연등 외에도 고려에는 사월초파일의 연등이 있었다. 이날은 석가탄생일로서 이 연등은 인도를 비롯하여 널리 행하여졌다. 고려의 경우는 4월 8일부터 3일 낮 3일 밤 동안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월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의종 때 백선연(白善淵)이 4월 8일에 점등하였다는 것으로, 그 이후 궁중에서도 사월초파일 연등이 행하여졌다.

공민왕은 직접 초파일 연등을 열었고, 이때부터 초파일 연등은 일반 서민층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린이들이 연등의 비용을 만들기 위해서 한 달 전부터 종이를 오려서 대나무에 기를 만들어 달고 성중(城中)을 다니면서 쌀과 베를 구하는 호기풍속(呼旗風俗)이 본격화되었다. 공민왕도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들에게 쌀 등을 하사한 적이 있다. 이 호기풍속은 연등행사에 따르는 민속으로 변하여 조선시대의 연등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연등의 의식과 행례는 왕이 봉은사 행향(行香:왕이 사찰에 향공양을 올리러 가는 행차)에 따르는 원칙에 준하여서 총 1,500명이 넘는 대규모로 베풀어졌고 대회(大會)와 소회(小會)로 나누어 의식을 거행하였다. 연등날은 공휴일이었고 이 연등회의 모든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연등도감(燃燈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언제부터 설치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조선 초기에는 상원 연등과 초파일 연등이 계속되었으나, 1415년(태조 15)에 초파일 연등을 중지시켰고, 1416년 이후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월 연등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1414년부터는 정월 연등을 대신하여 수륙재(水陸齋)가 열리고 있다. 수륙은 물과 육지에 사는 수많은 영(靈)을 공양하는 의식이다.

조선 태조는 이 수륙재를 2월과 10월에 열어왔다. 이는 불교신자인 태조가 유생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호국신앙의 성격을 띤 봄과 가을의 수륙재를 통하여 연등과 팔관을 정기적 행사로 합리화시킨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정월 15일의 연등은 조선시대에 와서 수륙재라는 이질적인 현상을 나타내었지만, 초파일 연등은 많은 기복을 겪으면서도 꾸준하게 전승되어 오늘에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2012년 4월 6일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부처님오신날'과 함께 불교의 최대 행사로 매년 열리고 있다. 특히 매년 음력 4월 8일의 부처님오신날에 앞서서 서울 종로에서 한국 불교 모든 종파들이 어우러져 연등을 들고 거리를 걷는 연등회 행사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2020년 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사월초파일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 1919)
주석
주1

철학이나 종교 따위에서, 서로 다른 학설이나 교리를 절충함.    우리말샘

주2

회의를 일시 중지함.    우리말샘

주3

없앴던 것을 도로 설치함.    우리말샘

주4

제삿날이 들어 있는 달.    우리말샘

주5

우리나라 명절의 하나.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로서 4월 5일이나 6일쯤이 되며, 민간에서는 조상의 산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사초(莎草)하는 등 묘를 돌아본다.    우리말샘

주6

부처, 보살, 조사(祖師)의 불덕을 드높이 찬탄함.    우리말샘

주7

물과 육지의 홀로 떠도는 귀신들과 아귀(餓鬼)에게 공양하는 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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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홍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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