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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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행정
제도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관계가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책임을 지우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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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관계가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책임을 지우는 제도.
내용

행정상의 관계자 또는 친족관계가 아닌 일정한 관계가 있는 자에게 연대책임을 지우는 연좌(連坐)와는 다르다. 우리 나라 역사상의 용어로는 양자를 구별하지 않고 혼동해서 사용하며, 드물게는 연좌(延坐)라고 한 예도 있다. 연좌법은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형법의 공통적 특질의 하나이다.

연좌법은 중국에서는 진(秦)나라 문공(文公) 20년에 처음으로 삼족(三族)에게 연좌형을 행하고, 그 뒤 한나라 초에도 ‘이삼족법(夷三族法)’이 있었는데, 삼족은 부모·처자·형제를 뜻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도 모반대역에 이삼족하고 후위(後魏)에서는 남의 집에 입양한 자도 포함한 일이 있고, 수에서는 모반·강반(降叛)·대역(大逆)의 경우에 부모·자녀·처·첩 및 출가한 자매에게까지 미쳤다.

당나라 때에 와서 연좌제는 주로 모반(謀反)·모대역(謀大逆)·모반(謀叛)에 적용되고, 연좌의 범위가 확정되어 후세의 형률에 계승되었고, 이를 계승한 『대명률』의 규정이 조선시대에 적용되었다.

이렇듯 중국에서의 가족의 연좌는 이삼족·족형(族刑)·상좌(相坐)·종좌(從坐)·수좌(隨坐) 등으로 칭하였으나, 당률에 이르러 연좌(連坐)와 구별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부여에서는 범죄로 사형에 처해진 자나 살인자의 가족을 노비로 만들고, 고구려에서도 중죄로 사형에 처해진 자나 모반자(謀反者·謀叛者)의 처자를 노비로 만들었으며, 191년(고국천왕 13)에 귀천을 막론하고 재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의 일족을 극형에 처한다는 법을 시행하였다.

백제에서는 16년(온조왕 34) 10월에 주근(周勤)이 반역하였으므로 그 처자도 죽였으며, 478년(삼근왕 2)에 해구(解仇)와 연신(燕信)이 반역하였으므로 그 처자를 웅진의 장터에서 참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5세기까지의 부여·고구려·백제에서의 연좌죄는 주로 반역죄의 경우에 가인(家人)·처자에 국한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까지의 신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7세기 이후의 신라에서는 반역죄의 경우에 연좌형을 과하는 점은 같으나, 연좌자의 범위에 관한 표현이 이구족·육종족당여(戮宗族黨與)·이일족(夷一族)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연좌될 친족의 범위가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반역자의 도당에게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631년(진평왕 53) 반역자인 칠숙(柒宿)과 석품(石品)의 구족을 멸하였고, 647년(진덕여왕 1) 정월에 비담(毗曇)의 연좌자가 30명에 이르렀으며, 문무왕 2년 8월에 대당총관(大幢摠管) 진주(眞珠)가 병을 사칭하여 놀면서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해서 구족을 멸하였다.

또한, 673년 7월에 당나라에 모반한 아찬 대토(大吐)의 처자를 종으로 만들었으며, 681년(신문왕 1) 8월에는 이찬(伊飡) 군관(軍官)이 반역자와 내왕하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것을 우국지심이 없고 국법을 지킬 뜻이 없다 하여 죽이고 그 적자(嫡子) 한 사람을 자진하게 하였다.

또, 822년(헌덕왕 14) 3월에는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인 주원(周元)이 왕이 될 수 없으므로 반역하였다 하여 그 종족과 당여(黨與) 239명을 죽였으며, 866년(경문왕 6) 10월에 이찬인 윤흥(允興)과 그 아우들이 모역하였으므로 일족을 멸하였다.

이로 미루어보면, 통일신라시대에는 모반(謀反)과 모반(謀叛)의 경우를 구별하여 왕권에 도전한 경우에 연좌자의 범위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직접 법률로 규정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연좌형은 모반(謀反)·모반(謀叛)·모대역의 경우에 과하며, 친족의 범위도 삼국시대처럼 막연히 이구족·이일족·종족이라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는데, 아마 당률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모반(謀反)의 경우로는 1015년(현종 6) 3월에 김훈(金訓) 등 19명이 군대를 동원하여 모반하였으므로, 1016년 2월 그들의 부모·처·자매·조손·백숙부를 연좌하고, 아들과 동복형제를 귀향형에 처하였다.

1354년(공민왕 3) 9월에는 환관인 최만생(崔萬生)·홍륜(洪倫)·한안(韓安) 등이 국왕을 살해하려 했으므로 그들의 아들을 효수하고 처첩은 관비로 만들고, 아버지는 장을 쳐서 변방의 고을로 유배하고 친숙질과 종형제도 장을 쳐서 유배하였다. 그리고 1376년(우왕 2) 9월에는 모반한 김의(金義)의 처와 어머니를 상주의 관비로 만들었다.

모반(謀叛)의 경우로는 1148년(의종 2) 10월에 이심(李深)의 처를 먼 섬에 유배하였으며, 모대역의 경우로는 왕릉이 도굴된 책임을 물어 능지기를 파직하고 그 능호인(陵戶人), 즉 그 가족을 먼 섬에 유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명률』을 형법의 일반법으로 적용하였으므로, 가장 중대한 범죄인 모반(謀反)·대역·모반(謀叛)의 연좌는 『대명률』 형률 도적의 조문이 적용되었다.

즉, 모반대역죄인은 능지처사하고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교형, 16세 이하의 아들과 모·처첩·조손·형제자매 및 아들의 처첩은 공신가(功臣家)의 종으로 삼고, 모든 재산을 몰수하며, 백숙부·조카는 동거여부를 불문하고 유3천리안치형에 처하였다.

다만, 남자로 80세 이상인 자와 중병에 걸린 자, 여자로 60세 이상인 자와 중병에 걸린 자, 정혼한 남녀, 자손으로서 양자로 출계한 자는 연좌죄를 면제하였다. 모반(謀叛) 죄인은 참형에 처하고 그 처첩과 자녀는 공신가의 노비로 삼고 재산을 몰수하며, 부모·조손·형제는 동거여부를 불문하고 유2천리안치형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초기부터 일단 반역죄가 발생하면 연좌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노비로 만들거나 유배시킬 경우에도 서로 쉽게 내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멀리 분산시키는 것이 상례였다.

단종복위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시애사건(李施愛事件)의 경우도 연좌자가 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국사범죄의 경우 외에도 『대명률』에 따르면, 전쟁에서 도피한 관병(官兵)의 부모·조손·형제를 장 100, 유2천리안치형에 처하고, 잔인한 살인범의 경우는 그 처자 혹은 동거하는 가족 모두를 장 100, 유2천리안치형에 처하였다. 또, 관리로서 작당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 자나 대신의 정사를 헐뜯은 자의 처자는 종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대명률』에서는 국사범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연좌의 범위가 처자에 한하는 것으로 고정되었다. 한편, 조선의 특수사정에 따른 고유형법상으로는 연좌형에 전가사변(全家徙邊)과 종으로 만드는 경우가 늘었으며, 동일한 범죄일지라도 연좌자의 범위나 형량이 가중되기도 하였다.

전가사변은 죄인의 전가족을 국토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경우로는 강도범, 남의 종을 몰래 사역하는 자, 위조문기로 소송하는 자, 양인을 천인으로 만든 자, 감사나 수령을 고발한 자, 여러 해 동안 전세(田稅)를 납부하지 않은 자, 우마의 도살을 주모한 자, 호적신고를 하지 않은 자, 무고하게 형제·숙질을 소송한 자 등이 있다. 전가사변형은 1744년(영조 20) 폐지되고 장형·도형으로 대치되었다.

처자를 종으로 만드는 경우로는 강상죄인·인신위조자·강도 및 밤에 무리지어 살인한 자 등이 있다. 또 1454년(단종 2)에는 출가하지 않은 죄인의 자매를, 1843년(헌종 9)에는 죄인의 출가녀의 연좌를 면하라는 수교가 있었다.

이상과 같이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연좌의 역사를 보면, 연좌제도는 공권력의 성장·발전과 정비례하며, 공권력이 확립되어 통치자에게 가장 깊은 이해관계가 있는 반역행위에 한정되던 것이 그와 함께 중대한 범법행위를 예방하고 위협하기 위한 정책적인 의도에서 연좌될 죄가 확대되었으며, 연대책임을 지는 친족이나 가족의 범위는 주로 3촌의 근친이나 처첩에 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길고 가혹한 역사를 지닌 우리 나라의 연좌법은 성문법적으로는 갑오개혁 때인 1894년 6월 28일의 의안(議案)인 ‘연좌율(緣坐律)을 물시(勿施)ᄒᆞᄂᆞᆫ 건(件)’에서 연좌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종지부를 찍고, 이후 형벌은 개인처형주의(형사책임개별화원칙)로 되었다.

그러나 연좌제는 공형벌로는 없어졌으나 행정적인 차원에서는 직접·간접으로 연대책임을 지워왔으며, 오늘날에도 ‘연좌’라는 어감에는 넓은 의미의 미개사회적인 집단적 책임 내지 연대책임의 의식이 깔려 있다.

1980년대 이후 우리 나라에서는 본인이 행한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에 의하여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되어서, 사실상 연좌제가 없어졌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조선왕조형사제도의 연구』(서일교, 박영사, 1968)
집필자
박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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