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도 ()

고려시대사
개념
고려시대 10도의 하나인 지방 행정구역.
정의
고려시대 10도의 하나인 지방 행정구역.
개설

995년(성종 14)에 지리적 조건을 고려해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죽령(竹嶺)을 기준으로 해서 그 동쪽 지역을 지칭한 명칭이다. 이는 당나라 태종이 산천의 형편에 따라 전국을 나누어 10도로 정한 것을 본받아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이전에 경주(慶州)와 김주(金州)의 관할하에 있던 9주(州)·35현(縣)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경주·김주·영주(永州)·하주(河州)·함주(咸州)·밀주(密州)만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등에서 확인된다.

연원 및 변천

그 뒤 영동도는 영남도(嶺南道) 및 산남도(山南道)와 함께 1106년(예종 1)에 경상진주도(慶尙晋州道)로 불렸다. 1171년(명종 1)에는 다시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晋陜州道)로 나누어졌으며, 1204년(신종 7)에 상진안동도(尙晋安東道)로 합속된 뒤 1314년(충숙왕 1)에 경상도(慶尙道)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한편 영동도를 포함한 10도의 성격에 관해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도가 지방행정구역의 최고단위이기는 하지만 행정구역이 아니고 다만 순찰·감찰 구역에 불과하며 상주하는 도의 장관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또 도의 장관을 관찰사로 보고,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순찰했다는 견해가 있다.

도의 장관을 전운사(轉運使)로 보고, 도는 중앙정부와 주군(州郡) 사이의 행정구역이 아니라 조부(租賦)를 운반하는 방면을 표시하거나 지방순찰구획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방행정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주·군·현의 외관들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 절도사가 도의 장관으로서 도를 전제(專制)하고 출척을 행했다는 견해도 있다. →십도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高麗) 군현제도(郡縣制度)의 연구(硏究)』(김윤곤, 경북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3)
「고려전기(高麗前期)의 외관제(外官制)」(변태섭,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2, 1968; 『고려정치제도사연구(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고려(高麗) 지방제도(地方制度)의 정비(整備)와 주현군(州縣軍)의 성립(成立)」(이기백, 『조명기박사화갑기념불교사학논총(趙明基博士華甲記念佛敎史學論叢)』, 1965; 『고려병제사연구(高麗兵制史硏究)』, 일조각, 1977)
「고려지방제도(高麗地方制度)의 일연구(一硏究) 상(上)」(하현강, 『사학연구(史學硏究)』13, 1962)
집필자
김윤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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