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태 ()

목차
관련 정보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백제의 건국 시조인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내용 요약

우태는 백제의 시조 비류(沸流) 설화에서 비류와 온조(溫祚)의 아버지로 나오는 인물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비류왕에 나오는 ‘우태(優台)’는 고구려 초기 지배층의 고위 관등 등 가운데 하나로 전하는 ‘우태(優台)’와 같은 글자이다. 『삼국지』의 기사를 중시하면, 원래 비류 등의 아버지가 지녔던 ‘벼슬’로서의 우태가 후대에 ‘인명(人名)’처럼 인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목차
정의
삼국시대, 백제의 건국 시조인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
주요 활동

백제 시조 비류(沸流) 설화에서 비류와 온조(溫祚)의 아버지로 나오는 인물이다. 그런데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고구려조에 고구려의 관등에는 “상가(相加) · 대로(對盧) · 패자(沛者) · 고추가(古鄒加) · 주부(主簿) · 우태(優台) · 승(丞) · 사자(使者) · 조의(皁衣) · 선인(先人)이 있는데,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비류왕에 나오는 ‘우태(優台)’는 고구려 초기 지배층의 고위 관등 등 가운데 하나로 전하는 ‘우태(優台)’와 같은 글자이다. 『삼국지』의 기사를 중시하면, 원래 비류 등의 아버지가 지녔던 ‘벼슬’로서의 우태가 후대에 ‘인명(人名)’처럼 인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우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太祖王) 16년에는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가 항복해 오자 우태(于台)로 삼다.”라는 기록과 같이 관직으로 표기되기도 하고, 직명(職名)과 별개의 작위(爵位)의 이름으로도 나오기도 한다. 태조왕 재위 말기에 수성(遂成, 차대왕)에게 왕위 찬탈을 건의한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전하는 비류나(沸流那) 조의(皁衣) 양신(陽神)차대왕(次大王) 즉위 후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되면서 우태(于台)로 ‘가작(加爵)’되었다. 이것은 작위로서의 우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온조와 비류가 온조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주몽의 아들로, 비류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우태의 아들로 나오는 것에 대해 비류를 우태의 아들로, 온조를 주몽의 아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주서(周書)』, 『수서(隋書)』, 『북사(北史)』 등의 중국 측 역사서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서 백제를 처음 세운 시조로 전하는 ‘ 구태(仇台)’를 우태와 동일한 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 하지만 우태는 백제가 건국되기 전에 주1, 즉 고구려 발상지에서 일찍 죽은 것으로 분명히 나오는 관계로, 성립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논문

이장웅, 「백제 시조 구태·비류 전승의 성립과 고구려·공손씨 관계」(『백제문화』 55,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2016)
강종훈, 「비류설화와 백제 왕실 교체설」(『사료로 본 한국고대사』, 지성과 인성, 2020)
천관우, 「삼한고 제3부- 삼한의 국가형성」(『고조선사·삼한사 연구』, 일조각, 1989)
주석
주1

고구려의 시조 동명 성왕이 도읍한 곳. 고구려의 다섯 부족 가운데 계루부가 있던 곳으로,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 전한다. 광개토왕 비문에는 ‘홀본(忽本)’으로 전하며 유리왕 22년에 국내성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도읍이었다.    우리말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