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예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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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채소 · 과일 · 화훼 등을 가꾸는 것에 관한 기술과 이론을 연구하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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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채소 · 과일 · 화훼 등을 가꾸는 것에 관한 기술과 이론을 연구하는 학문.
내용

원예학은 채소원예학·과수원예학·화훼원예학으로 구분하여 연구하게 되는데, 채소원예학 및 과수원예학은 주로 인간의 식생활에 공급되는 부식(副食) 또는 후식(後食)의 생산에 관한 학문이고, 화훼원예학은 인간이 추구하는 식물을 통한 미적만족을 위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원예의 기원은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지만, 원예학의 시작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원예학이 시작된 것은 1906년에 둑도원예모범장(纛島園藝模範場)이 설립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원예모범장은 12㏊의 시험포장을 갖추고 뚝섬에 설립되었으며, 초대 장장에는 대한제국의 농무국장인 정진홍(鄭鎭弘)이 겸임하였고, 일본인 기사를 촉탁으로 채용하여 원예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여기에서는 주로 원예작물의 새로운 개량품종을 외국으로부터 도입하여 재배적응시험을 실시하여 우량품종을 선발, 보급하는 시험사업을 광범위하게 실시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밖에도 원예작물의 병충해방제시험, 시비시험, 채소와 과수의 혼작시험, 포도나무의 내한성시험, 과수의 전정 시험 등 여러 가지 시험을 수행하여 원예학을 정착시켰다. 또, 시험장에서는 시험포장의 일부에 모범재배포를 설치하여 잘 가꾸어진 원예작물을 널리 견학시키는 한편, 우량종자와 우량묘목을 생산하여 직접 재배자에게 공급하여 주는 구실도 하였다.

둑도원예모범장은 1910년까지 독립시험장으로 존속하다가 수원에 설립된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에 흡수되어 둑도지장으로 명칭이 개정되었으나 그 뒤에도 연구사업은 계속되었다. 수원에 설립된 권업모범장에도 약 5㏊의 과수시험포와 약간의 채소시험포가 마련되어 여기에서도 원예에 관한 시험과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뒤 1912년에는 덕원원예지장(德源園藝支場)이 원산에 설립되고, 1919년에는 황해도 사리원에 서부지장(西部支場)이 신설되어 각각 그 지역을 위한 지역시험을 담당하게 되어 원예학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1929년에는 권업모범장이 농사시험장으로 개편되고 각 도에 있는 종묘장은 도농사시험장으로 개편되어 원예학을 다루는 연구기관이 많이 증설되었다.

1948년 9월에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부산 동래에 정식으로 설치되어 주로 원예작물에 관한 시험사업만 실시되었다. 그러다 1950년 3월에 우장춘(禹長春)이 일본에서 귀국, 연구소장에 취임하여 원예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자 할 때 6·25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1953년에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편되면서 원예학 중 특히 육종 분야에 역점을 두고 연구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한편으로는 채소종자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노력한바 1955년부터는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종자를 독립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에도 원예연구는 더욱 진전되어 1960년에는 불화합성(不和合性)을 이용한 배추의 1대 잡종인 원예배추 1호와 2호가 육성되어 그 양친(兩親) 계통을 4개의 국내 종묘회사에 분양하여 다량생산체계를 세웠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 채소원예발달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다.

1962년 4월에 농촌진흥청 원예시험장으로 개편되었고, 1967년에는 본장을 수원시 이목동으로 옮겨 3개 분야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되어 더욱 계획적이고 효과적인 원예연구가 전개되어 수많은 원예작물의 신품종을 육성, 보급하였다.

원예작물의 재배법 개선을 통한 고품질·다수확에 기여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원인불명이었던 생리장애들의 원인규명과 방지대책 등을 강구하여 원예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원예시험장에서는 부산과 나주에 지장을 두어 채소의 시설재배기술을 개발, 보급하고 단감·대추 등 과수에 대하여는 품종의 선발 또는 육성으로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또, 남해에는 출장소를 설치하여 키위(kiwi)와 같은 특수과수의 품종개량과 재배법 개선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1962년에는 제주시험장이 설립되어 감귤시험을 담당하여 감귤의 증산과 품종갱신에 큰 공헌을 하고 있으며, 1961년에는 대관령 800m 고지에 고령지시험장이 설립되어 우량종서(優良種薯)를 생산, 보급함으로써 감자의 증산과 농가소득을 올리는 데 공헌하였고, 고랭지에 단경기(端境期) 채소의 재배기술을 확립시켜 농가소득을 높이는 데에도 공헌한 바 크다.

1993년에 직제개편으로 과수연구소가 발족되었고 그 산하에 대구사과연구소, 나주배연구소, 제주감귤연구소를 설립하여 과수연구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1994년 12월에 다시 원예연구소로 직제가 개편되었다.

1963년에 한국원예학회가 창설되어 각 대학 및 연구소에서 원예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각 자기 분야의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의하는 원예학 발전의 요람이 되었다. 이 학회에서는 국내외의 유명학자들을 초청하여 연 2회 세미나를 열고, 또 논문발표회도 가진다.

또, 연간 6회에 걸쳐 학회지를 발간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학회와 교환하고 있어 원예의 여러 전공분야에 걸친 학문적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원예학회는 채소분과·과수분과·화훼분과로 나누어 연구발표회를 가지며, 그 중 원예학회지에 수록된 논문 가운데 우수논문을 엄선하여 매년 원예학회상을 수여하고 있는데, 연구논문의 질이 매년 향상되어 이제는 외국의 원예학회지 논문과 대등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인정되고 있다.

1886년(고종 23)에 민영익(閔泳翊)·홍영식(洪英植)이 한미수호조규에 의거, 미국시찰 후 세웠다는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처음으로 농업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원예에 관한 교육도 일부 실시되었으나, 이것은 1894년에 폐지되어 큰 성과는 없었던 것 같다.

1904년 대한제국정부의 학부 소속으로 농상공학교가 설립되었으나 각기 성질이 달랐다. 그 중 농업계는 1906년 9월에 농림학교로 독립되어 개교하였고 1907년 1월에 수원으로 이전하였다.

이 때는 작물학 속에 원예학이 포함되어 있어 원예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뒤 1909년에는 본과 2년제가 3년제로 변경되면서 원예학의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 1910년에는 이 학교 이 외에도 농림계 학교가 10개 교나 있어 모두 원예학을 강의하였다. 1914년 3월 수원농림학교가 농림전문학교로 승격되어 원예교육은 더욱 강화되고 전문화되었다.

1935년에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도 농학과가 생겨 여기에서도 원예학을 강의하였다. 1986년도에는 전국에 6개 농업전문대학에서 원예학을 강의하였고, 4년제 대학에서 18개 대학 원예학과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1999년 현재 전국에 29개 4년제 원예관련학과가 설치되어 있어 여기서 원예학도를 양성하고 있다.

또한 4개의 2년제 전문대학에도 원예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대부분의 대학에는 대학원 과정이 있어 석사와 박사가 배출되어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고, 또 외국에 나가 원예학을 공부하는 유학생도 많아 우리 나라의 원예학은 급진적으로 발전되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발전될 전망이다.

참고문헌

『한국과수연구70년사』(이태현박사송수문집출판위원회, 1976)
『한국원예발달사』(한국원예발달사편찬위원회, 1980)
『한국농업기술사』(한국농업기술사발간위원회, 1983)
『원예학원론』(김종천,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3)
『전국농학계대학교수명부』(전국농학계대학장협의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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