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갑병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평안북도참여관, 강원도지사, 중추원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히라누마 히데오[平沼秀雄]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3년(철종 14) 8월 28일
사망 연도
1943년 1월 5일
본관
파평(坡平)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
관련 사건
일진회
정의
일제강점기 평안북도참여관, 강원도지사, 중추원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63년 8월 28일 평안도 의주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조선 말기에 농상아문 참의, 정산군수 등을 지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봉상사 제조, 함경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평안북도 참여관, 강원도지사, 중추원 참의, 국민협회 회장, 대동일진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43년 1월 5일 사망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9년 4월 친군통위영 외북도참군(親軍統衛營外北道參軍)에 임명되었으나 거짓 전보를 쳐서 상인에게 손해를 끼친 죄로 1890년 11월부터 1891년 12월까지 경상도 함양에 유배되었다. 1894년 7월 내무아문 주사와 궁내부 주사로 임명되었다가 10월 농상아문 참의로 승진했다. 1896년 1월 충청도 정산군수로 임명되었고, 그해 독립협회에 보조금 3원을 냈다. 11월 공전(公錢) 유용 혐의를 받아 갇혔고, 1899년 3월 징역형에 처해졌다가 1903년 11월 방면되었다.

1904년 8월 일진회 창립에 참여해 평의원에 선출된 후 11월 강원도 조사위원, 1905년 1월 총대위원, 11월 교섭위원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1905년 6월 러일전쟁에서 일진회의 일본군 북진대(北進隊) 수송대로 종군해 일본군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9월 일진회가 북간도 지회를 설치할 때 지회장을 맡았다.

1906년 2월 평리원 검사로 다시 관직에 등용되어 5월 비서감승(祕書監丞), 6월 시종원 부경(副卿), 7월 태복사장(太僕司長), 8월 시종원 시종을 지냈다. 1906년 10월 황제의 옥새를 도용한 이일직(李逸稙)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형을 받았다가 1907년 2월에 사면된 후 6월 비서감승, 7월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12월 함경북도관찰사에 제수되면서 일진회 북간도 지부장을 맡았다. 1908년 8월 기호흥학회 찬무원으로 활동했고, 11월 일본 정부가 주는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병합 후 1910년 10월 평안북도 참여관에 임명되었고,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평안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을 겸하면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도왔다.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18년 12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1년 6월 평안북도 참여관으로 의주산업조합 창립에 참여하여 고문을 맡았고, 8월 경상북도 참여관을 지내다가 1923년 2월 강원도지사로 승진했다.

1924년 12월 관직을 사임하고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에서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43년 1월 타계할 때까지 재임하였는데, 매년 2,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5년 1월 ‘신일본주의’를 내걸고 조선인 참정권운동을 주장한 국민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2월 국민협회 회장으로 일본에 가서 참정권청원 건백서를 제출했다. 1926년 3월 교육협성회를 조직하고 총재를 맡았다. 1928년 10월 훈2등 서보장, 11월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5월 경성박람회 평의원, 1931년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 1933년 7월 중추원 시정연구회 제도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9월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제2차 전조선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충청북도 일대에서 순회강연을 했다. 1938년 11월에는 전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의 아들 이석규(李碩奎)와 함께 현 시기에 종교단체가 불필요하다면서 시천교(侍天敎)를 친일정치단체인 대동일진회(大東一進會)로 개편하고 회장이 되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국민협회가 주도한 조선에서의 중의원선거 시행을 요청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1939년 4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11월 조선유도(儒道)연합회 평의원,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39년에는 「일본의 진정한 적은 누구인가」(『녹기』1939.11.)라는 글을 통해 일본을 맹주로 하는 대동아주의를 주장했다. 1940년 히라누마 히데오[平沼秀雄]로 창씨개명하였다.

윤갑병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3·1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7∼7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1908.8.25.)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일제침략과 친일파』(임종국, 청사, 1982)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 1920년대를 중심으로』(강동진, 한길사, 1980)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임종국, 『해방전후사의 인식』1, 한길사, 197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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