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구 ()

윤봉구 초상
윤봉구 초상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군자감정, 대사헌,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서응(瑞膺)
병계(屛溪), 구암(久菴)
시호
문헌(文獻)
인물/전통 인물
출생 연도
1683년(숙종 9)
사망 연도
1767년(영조 43)
정의
조선후기 군자감정, 대사헌,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 윤유건(尹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윤비경(尹飛卿)이다. 아버지는 윤명운(尹明運)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우참찬 윤봉오(尹鳳五)의 형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4년(숙종 40) 진사가 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25년(영조 1) 청도군수가 되었다. 1733년 사헌부지평,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고, 1739년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1741년 부호군이 되었을 때 주자(朱子)를 보은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宋時烈)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주1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군자감정이 되었다.

1743년 사과, 1749년 진선, 1754년 서연관(書筵官), 이듬해 찬선을 거쳐 1760년 대사헌에 특별 임명되었으며, 1763년 지돈녕(知敦寧)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한원진(韓元震) · 이간(李柬) · 현상벽(玄尙璧) · 채지홍(蔡之洪) 등과 더불어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주2의 중심 인물로 꼽힌다.

호락논의 분파는 이간과 한원진에게서 심화되어 심성론(心性論)의 한 줄기를 형성한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같다는 이간의 학설은 뒤에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에 이어져 ‘낙론(洛論)’이라 불리고,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와 최징후(崔徵厚)로 연결되어 ‘호론(湖論)’으로 지칭되었다.

윤봉구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간추리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하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윤봉구의 생애는 사회적 · 현실적 활동보다 심성론을 주로 한 성리학자로서의 입론(立論)에 치중했으며, 저술의 내용도 경전의 강의나 주석 및 성리설이 주를 이룬다. 저서로 『병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사마방목(司馬榜目)』
『인물고(人物考)』
『병계집(屛溪集)』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주석
주1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던 일. 우리말샘

주2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을 같은 것으로 보는가 다른 것으로 보는가 하는 관념론적 문제를 놓고, 호론(湖論)의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과 낙론(洛論)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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