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자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형조참판, 지의금부사,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경수(敬修)
이칭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29년(중종 24)
사망 연도
1601년(선조 34)
본관
남원(南原)
주요 관직
지돈녕부사|형조참판|지의금부사|한성부판윤
정의
조선 중기에, 형조참판, 지의금부사,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수(敬修). 윤언(尹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시영(尹時英)이다. 아버지는 전적 윤식(尹湜)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신은영(新恩令) 이사종(李嗣宗)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46년에 진사가 되었고,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보임, 여러 벼슬을 거친 뒤 회양부사로 부임하여 학문을 크게 진흥시켰다. 태인현감·호조정랑·사예 등의 관직을 거쳐 1585년(선조 18) 호조참판이 되었다.

1586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숙소에서 실화(失火)하여 문죄당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 때 전주부윤이 되어, 역적 정즙(鄭緝)을 잡은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우승지로서 왕을 호종하여, 피난할 때 보산역(寶山驛)에 이르러 종묘서제조(宗廟署提調)가 되어 종묘의 신주를 임시로 송도에 묻었다.

1594년 지돈녕부사·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이듬해 지의금부사·원접사(遠接使)를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종묘(宗廟)를 지키고 중전과 세자를 보필하였다. 이 해 한성부판윤·공조판서를 거쳐 다음해 지중추부사·호조판서를 지냈다.

1600년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朴氏)가 죽자, 빈전도감(殯殿都監)과 인산도감(因山都監)의 제조가 되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품은 말이 적고 강직하며 관직에 임하여는 도량형에 한치의 어김이 없이 오직 국사에 전념하였다. 문장과 시에도 능하여 당대에 유명하였으나, 세상이 알아주는 것을 꺼려하여 전하여지는 것이 없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월사집(月沙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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