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

국방
인물
해방 이후 수도경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한 군인. 정치인,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이종찬(李鐘贊)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6년 3월 10일
사망 연도
1983년 2월 10일
본관
경주(慶州)
출생지
경남 창원군
관련 사건
중일전쟁|태평양전쟁|4·19혁명|3·15부정선거|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최종 결정
내용 요약

이종찬은 해방 이후 수도경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한 군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16년에 태어나 1983년에 사망했다. 193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일전쟁 이후에 조선인장교로서는 유일하게 공5급 금치훈장을 받았다. 일본군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여 뉴기니에 억류되었다가 해방 이후 귀국했다. 1949년 육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1960년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0년 과도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을 맡아 3.15부정선거에 동조한 군인들을 숙청하였다. 이후 국회위원과 재향군인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정의
해방 이후 수도경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한 군인. 정치인,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16년 3월 10일 경상남도 창원군 출생으로, 원적(原籍)은 경성부(京城府)이며, 경성에서 성장했다. 본관은 경주이다. 1928년 경성사범학교 부속 보통학교, 1933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3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졸업했으며, 1937년 6월 본과를 제49기로 졸업한 후 11월 일본군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1937년 주1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 일대로 파견되어 소대장으로 참전했으며, 1938년 중위로 진급했다. 1940년 후방으로 복귀한 후, 1941년 3월 대위 진급과 동시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勳六等)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1942년 2월 조선인 장교로는 유일하게 공5급(功五級) 금치훈장(金鵄勳章)을 받았다.

1942년 도쿄의 육군포공학교(陸軍砲工學校)에서 수학하다가 12월 주2이 시작되자 뉴기니(New Guinea)에 파견되어 독립공병 제4중대에 소속되었고, 1943년 7월부터는 일본군 제17군 남해지대 소속의 독립공병 제15연대에서 복무했다. 같은 해 12월 육군 공병 소좌로 진급해 1944년부터 독립공병 제15연대장 대리로 복무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뉴기니에 억류되어 있다가 1946년 8월 귀국했다. 1949년 6월 육군 대령으로 임관해 국방부 제1국장 겸 정훈국장을 맡았으며,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수도경비사령관, 9월 수도경비사령부 제3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6월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바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2년 1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5월 이승만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키기 위해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파병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해, 7월 육군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 해임 후 미육군지휘참모대학(CGSC,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에 유학했으며, 귀국 후 1953년 8월부터 육군대학 총장으로 7년간 재직했다. 1960년 5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0년 4 · 19혁명허정(許政) 과도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을 맡아 3 · 15부정선거에 동조한 군인들을 숙청하는 등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였고, 8월 사임했다. 1961년 7월부터 1967년 9월까지 주이탈리아 대사를 지냈으며, 1970년 유한회사인 코리아엔지니어링 사장, 1975년 한국 후지필름 회장을 맡았다.

제9대 및 제10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77년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구락부(星友俱樂部)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밖에도 재향군인회 고문, 한이협회(韓伊協會) 회장, 한일불교협의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종찬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10 · 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69~27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2월 10일 사망했으며, 장례는 육군장(陸軍葬)으로 치러졌다. 을지 무공훈장(1950), 美공로훈장(리전 오브 메리트, Legion of Merit)(1951), 수교훈장 광화장(1976) 및 보국훈장 '삼일장'(1971)을 받았으며, 사후 보국훈장 통일장(1급)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3 (민족문제연구소, 2009)
『참군인 이종찬 장군』(강성재, 동아일보사, 1986)
『역대국회의원총람』(대한민국국회사무처, 1977)
『陸軍士官學校』(山崎正男, 1988)
『每日申報』『東亞日報』『滿鮮日報』(각호)
주석
주1

1937년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에서 비롯되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일본이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고 일으켰는데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우리말샘

주2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제이 차 세계 대전의 일부로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되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우리말샘

집필자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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