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임백령(林百齡)

조선시대사인물

 조선전기 한성부좌윤,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임백령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전기 한성부좌윤,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순(仁順), 호는 괴마(槐馬). 해남 출신. 임득무(林得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수(林秀)이고, 아버지는 임우형(林遇亨)이며,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임억령(林億齡)의 아우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형 임억령과 함께 박상(朴祥)에게 수업하였다. 박상은 그에게 『논어』를 가르치며 관각(館閣)의 문장에 능하리라고 했다 한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9년(중종 14) 식년 문과에 갑과 3등으로 급제해 상서원직장에 서용되었다. 다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가 이듬 해 홍문관저작으로 전임하였다.
1524년(중종 19) 홍문관부교리가 되어서는 고향의 어머니를 위해 귀양(歸養)주 01)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527년(중종 22)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를 역임하고, 영광군수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1532년(중종 27) 사헌부로 다시 옮겨 장령·집의를 역임하고, 1537년(중종 32)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인 1538년(중종 33) 공조참판·사헌부대사헌·한성부좌윤·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39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공조·병조·이조의 참판을 두루 지냈다.
이듬 해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형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민폐의 시정에 힘썼다. 1542년(중종 37) 내직으로 옮겨 한성부의 우윤·좌윤을 지내고,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 해 세 번째로 대사헌이 되었다가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1544년(중종 39)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네 번째로 대사헌이 되고,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이조판서가 되어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과 모의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시켰다. 이 사건을 주도한 공로로 정난위사공신(定難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해졌으며, 자품은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그 해 삼의정이 병약해 그가 우찬성의 지위로 사은사에 선발되어 다시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1546년(명종 1) 공무를 마치고 귀국 도중 영평부(永平府)에서 돌연 병사하였다. 시호를 처음에는 공소(恭昭)라 했다가 후에 충헌(忠憲)으로 고쳤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돌아가서 봉양함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최완기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