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백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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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한성부좌윤,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인순(仁順)
괴마(槐馬)
시호
공소(恭昭), 충헌(忠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8년(연산군 4)
사망 연도
1546년(명종 1)
본관
선산(善山)
주요 관직
예문관검열|홍문관부교리|영광군수|승정원도승지|이조참판|대사헌|형조참판|한성부좌윤|대사헌|호조판서
관련 사건
을사사화
정의
조선 전기에, 한성부좌윤,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순(仁順), 호는 괴마(槐馬). 해남 출신. 임득무(林得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수(林秀)이고, 아버지는 임우형(林遇亨)이며,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임억령(林億齡)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형 임억령과 함께 박상(朴祥)에게 수업하였다. 박상은 그에게 『논어』를 가르치며 주1의 문장에 능하리라고 했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9년(중종 14) 식년 문과에 급제해 상서원직장에 서용되었다. 다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가 이듬 해 홍문관저작으로 전임하였다.

1524년(중종 19) 홍문관부교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 봉양하기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527년(중종 22) 사헌부지평 · 홍문관교리를 역임하고, 영광군수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1532년(중종 27) 사헌부로 다시 옮겨 장령 · 집의를 역임하고, 1537년(중종 32)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인 1538년(중종 33) 공조참판 · 사헌부대사헌 · 한성부좌윤 · 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39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공조 · 병조 · 이조참판을 두루 지냈다.

이듬 해 주2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형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민폐의 시정에 힘썼다. 1542년(중종 37) 내직으로 옮겨 한성부의 우윤 · 좌윤을 지내고,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 해 세 번째로 대사헌이 되었다가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1544년(중종 39)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네 번째로 대사헌이 되고,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조판서 역임 시 윤원형(尹元衡) · 이기(李芑) 등과 모의해 주3를 일으켜 윤임(尹任) · 유관(柳灌) · 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시켰다. 이 사건을 주도한 공로로 정난위사공신(定難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해졌으며, 자품은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그 해 삼의정이 병약해 그가 우찬성의 지위로 사은사에 선발되어 다시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1546년(명종 1) 공무를 마치고 귀국 도중 영평부(永平府)에서 돌연 병사하였다. 시호를 처음에는 공소(恭昭)라 했다가 후에 충헌(忠憲)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경연일기(經筵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홍문관ㆍ예문관ㆍ규장각을 통틀어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임금이 중국의 황제에게 사은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    우리말샘

주3

조선 명종 즉위년(1545)에 일어난 사화. 인종이 죽자 새로 즉위한 명종의 외숙인 소윤(小尹)의 거두 윤원형이 인종의 외숙인 대윤(大尹)의 거두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대윤파에 가담했던 사림(士林)이 크게 화를 입었다.    우리말샘

집필자
최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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