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사적은 알 수 없으나, 그가 비문과 전액(篆額)을 쓴 「부석사원융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의 명문에 ‘儒林郎尙書都官郎中’이라 하여 정5품의 낭중(郎中)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의 서체는 해서로 고려 초기에 유행한 구양순의 서풍이며, 좁고 긴 짜임새와 건경(健勁)한 필력으로 골격을 살렸다. 단지 측필(側筆)을 많이 사용하여 과장된 점이 있으나 글씨의 품격도 비교적 높고 개성도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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