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사 석조 여래 좌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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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장춘사 석조여래좌상
함안 장춘사 석조여래좌상
조각
유물
문화재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의 장춘사 약사전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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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의 장춘사 약사전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좌상.
내용

광배 높이 91cm, 불신(佛身) 높이 73cm.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장춘사는 832년(신라 흥덕왕 7)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초창한 것으로 전해지나 시대를 그만큼 올려 볼 만한 유물은 전하지 않는다.

불상은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의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와 한 돌로 조성된 석불상(石佛像)이나 현재는 도금되었다. 나발(螺髮 :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의 머리에는 둥글고 큰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표현되었다.

얼굴은 약간 작은 타원형이며 귀는 투박할 정도로 크고 긴데 비해 이목구비는 매우 작게 표현되었다. 특히 가늘게 뜬 눈은 입보다도 작게 표현하였다. 이마에는 백호(白毫 :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가 크고 귀는 길어 어깨에 거의 닿아 있다. 입가 양쪽에는 아마도 미소를 표현하려 했던 의도로 보이는 음각선이 새겨져 있다.

짧은 목에는 삼도가 생략되었으며 둥글게 투박한 어깨에는 편단우견(偏袒右肩 : 왼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드러남)의 법의(法衣 :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를 걸쳤다. 어깨에서 내려오는 네 줄의 옷주름이 오른 겨드랑이로 걸쳐지며 왼쪽 팔뚝에도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주름이 손목 부근까지 걸쳐져 있다.

오른 팔꿈치 부분까지 겨드랑이와 붙어 있으나 팔뚝 부분과 허리 사이를 뚫어 놓았다. 아마도 입체감을 주려 했던 의도로 짐작된다. 기술의 미숙으로 제대로 입체감을 내지는 못하지만 이 부분이 허리에 붙어 있었다면 불신은 좀 더 경직되거나 위축된 느낌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른 가슴에는 유두가 굵고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올려 약함을 받쳐 들고 있어 약사여래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펼쳐 무릎을 덮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반에 유행했던 약사여래좌상의 계통을 잇고 있는 상으로 추정된다.

불신과 한 돌로 조성된 광배는 현재 채색되어 원형도 명확치 않다. 그러나 주형 거신광 내부에 원형의 두광(頭光 :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과 신광(身光 :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2.5cm 두께의 굵은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두광 내부에는 11엽의 연판(蓮瓣 : 연꽃잎)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광배 가장자리는 화염문(火焰文 : 불꽃무늬)으로 채색하였다. 채색 안료 밑으로는 채색 화염문과는 다른 조각선의 흔적이 비치고 있다. 실제로 만져 보면 어떤 형태의 문양을 양각했음을 알 수 있는데 화염문으로 느껴지지만 확실치는 않다.

통일신라시대 약사여래좌상의 형식을 잇고 있는 상으로서 전체적으로 단아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투박한 신체 표현에 세부 표현이 섬세하지 못하며 마무리도 정교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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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심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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