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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법복(法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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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법복(法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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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중국에서 후부관복(后婦冠服)으로 착용하던 예복이다. 우리 나라에서 왕비가 법복으로 적의를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기인 1370년(공민왕 19) 명나라 태조후(太祖后)인 효자황후(孝慈皇后)가 중국관복을 보내온 데서 비롯한다.

그것은 송나라의 명부복이자 당시 명나라 내명부복(內命婦服)이었다고 할 적의였는데, 이를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 : 7마리의 휘(翬)와 두 봉화(鳳花)를 장식하였으며, 여기에 각 9수(樹)의 작은 꽃과 큰 꽃을 가진 화채(花釵)를 꽂았고, 양쪽에 9전(鈿)이 있는 박빈(博鬢)을 수식하고 있었다.

② 적의 : 청색 바탕에 9등분하여 적문을 수놓았다. ③ 중단(中單) : 소사(素紗)로 지었으며, 홍색 깃에 불문(黻文)이 있었고, 홍색 나곡(羅穀)으로 도련·수구에 연을 둘렀다. ④ 폐슬(蔽膝) : 상색(裳色)과 같이 하였으며, 취색(緅色)으로 가에 연을 두르고 적문을 2등분하여 수놓았다. ⑤ 혁대(革帶) : 금구철(金龜鰈)을 장식하였다.

⑥ 대대(大帶) : 의색과 같은 청색이었다. ⑦ 패옥(佩玉), ⑧ 수(綬), ⑨ 청말(靑襪)·청석(靑舃). 다음에 명나라로부터 왕비 관복의 사여가 있기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403년(태종 3)의 일이었다. 이 때 명사(明使) 황엄(黃儼)이 왕 면복과 왕비 관복을 가지고 왔다.

왕비 관복에는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 1정(頂)을 비롯하여 이의 부속품들과 대삼(大衫)·원령(圓領)·하피(霞帔)와 금추두(金墜頭)를 중심으로 한 의복 한 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종 즉위년에 명사 태감(太監) 윤봉(尹鳳)과 봉어(奉御) 정선(鄭善)이 조칙(詔勅)과 함께 왕 면복과 더불어 가져온 왕비 관복에는 또한 주취칠적관 1정과 대삼·배자(褙子)·하피와 금추자·상아홀(象牙笏) 및 단삼(團衫)·오(襖)·군(裙)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서 대삼·배자·하피·여홀(女笏) 등은 왕비 예복이 되는 것이다.

칠적관으로 보아 이것은 그들 군왕비례(君王妃禮)에 준한 것이었으며, 단삼·오·군 등은 왕비 상복(常服)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후 명나라로부터 수차에 걸쳐 이러한 왕비 관복의 사여가 있었는데, 대삼의 제도는 명나라 황후나 황태자비의 예복인 적의가 그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통칭 적의 또는 치적의로 일컬어왔다.

이와 같이, 명나라의 사여관복을 통하여 이루어진 중국제 그대로의 왕비복을 조선에서는 중궁의 수책(受冊)·조제(助祭)·조회(朝會) 등에 착용하는 예복 즉 법복으로 삼아 이를 제도화하였다. 또 저고리·치마 등 우리 나라 제도와의 이중 구조 속에서 전승되어왔다.

인조 때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쓰러지고 청나라가 들어섰으나 그대로 이를 계속 준용(遵用)하였다. 그런데 이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서서히 민족복식 형성기를 이루어나가고 있었으니, 이러한 경향은 영조대에 제정된 국혼의 준칙인 ≪국혼정례 國婚定例≫에 나오는 왕비 관복제도에서도 볼 수 있다.

≪국혼정례≫에 나오는 중궁의 법복으로는 적의·별의·내의·상·폐슬·대대·옥패·수·하피·적말·적석·백옥규·흉배 등이 보인다. 이것은 적의라고 일컬어왔던 ‘대삼’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대명회전 大明會典≫ 등에 의거하여 새로 우리 나름대로의 적의제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말기 고종은 재위 34년(1897)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고 황제위에 올라 관복제도를 새로 제정하였다. 이에 있어 면복은 중국 황제와 동격인 12류면·12장복을 착용하였으며, 황후 관복도 명나라 황후 예복을 그대로 좇아 구룡사봉관·적의로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민비(閔妃 : 明成皇后)가 죽은 뒤의 일이었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황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이 적의를 착용하였다. 그 유물이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는 하나, 구룡사봉관까지를 착용하였는지는 의심스럽다.

이러한 가운데 갑오경장 이후 개화를 맞이하여 문무관복이 단발령과 더불어 간소화 내지 양복화되어 갔다. 고종이나 순종도 양복을 착용하고 있던 때이었다. 황후도 황원삼(黃圓衫) 하나를 가지고 국경일과 같이 대례복을 착용해야 할 때에는 오조룡(五爪龍)의 운룡문을 금수한 원보(圓補)를 양어깨와 앞뒤에 가식하였다.

왕실 경사 때와 같이 소례복을 착용해야 할 때에는 쌍봉문을 금수한 흉배(胸背)를 앞뒤에 가식하였다. 이에서 황후 구룡사봉관·적의의 수명은 가히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당시 황태자비는 초비(初妃)가 민씨(閔氏)였는데 1904년에 죽었고, 계비(繼妃) 윤씨(尹氏)는 황태자가 순종으로서 제위에 오르기 1년 전인 1906년에 맞이하였다. 이들 또한 1897년에 제정된 황태자 관복인 명제(明制)와 같은 구휘사봉관·적의를 얼마나 준용하였는지는 고증할 길이 없다.

대삼은 칠적관에 대삼·배자·하피·옥혁대(玉革帶)·대대·패옥·수·말·석·규(圭)로 되어 있다. ① 칠적관 : 관은 조곡(皂穀) 즉 검은 추사(皺紗)로 만들었으며, 관 앞면에는 취박산(翠博山)이라고 하여 비취로 된 규각형(圭角形)의 산술(山述)이 있었다.

입에 주적(珠滴)을 물고 있는 대주적(大珠翟) 2마리, 소주적(小珠翟) 3마리, 취적(翠翟) 4마리를 장식하였다. 관 가운데에는 보주(寶珠) 1좌(座)가 있어 전후를 주(珠)로 장식하였고, 모란화(牡丹花) 한 떨기에 꽃술 8개가 달려 있었다.

취엽(翠葉) 36잎이 있는 주수(珠樹)가 장식되어 있었고, 주취(珠翠)로 된 두떨기 양화빈(穰花鬢)이 있어 여기에는 소연운(小連雲) 6편이 달려 있었다. 또, 취정운(翠頂雲) 1좌가 있어 다섯 덩이의 주가 장식되어 있었고, 주취운(珠翠雲) 11편이 달려 있었다.

취구권(翠口圈) 1부(副)에는 금보전화(金寶鈿花) 8개에 위에는 여덟 덩이의 주를 장식하였고, 여기에 주결(珠結)을 입에 물고 있는 금적(金翟) 한 쌍과 금잠(金簪) 한 쌍을 꽂고 있었다.

주취로 된 각 두 떨기의 모란화와 양화(穰花)가 서로 면해서 두 쌍이 서 있었으며, 매화환(梅花環)과 사주환(四珠環)이 각 한 쌍씩 장식되어 있었다. 이 칠적관은 협소한 데다 잠(簪)이 있어 그 쓰는 방법이 문제가 된 듯하다.

이를 ≪세조실록≫에서 보면 1455년(세조 1) 명의 사신 윤봉(尹鳳)에게 물었더니, 머리를 빗은 뒤에 정수리 뒤쪽에서 숨구멍 좌우로 머리를 갈라 서로 땋아올려 아계(丫髻)를 만들고 관을 그 위에 쓰며 잠을 꽂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것은 장식은 판이하되 화관(花冠)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런데 ≪선조실록≫에서 임진왜란을 치르고 난 뒤인 1602년(선조 35) 인목왕비(仁穆王妃) 가례(嘉禮) 때의 기록을 보면 수식(首飾)은 국속에 따라 마련한다 하였다. 이에서 칠적관은 이후 자취를 감추고 재래의 화관·족두리 또는 큰머리·대수(大首) 등으로 머리치장을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② 대삼 : 대홍소(大紅素)의 저사(紵絲)로 지었으며, 이에는 문식(紋飾)이 없었다. ③ 배자 : 일명 사규오자(四䙆襖子)라고도 하였으며, 청색 저사로 지었고, 적계문(翟鷄文)을 금수(金繡)하였다. ④ 하피 : 이것은 긴 한 폭과 같이 되어 있어, 이것을 목에 걸치되 등 뒤에서는 흉배 위치 아래까지 반원(半圓)으로 늘어뜨렸다.

가슴 앞에서는 가지런히 치마 끝까지 늘어뜨려 두 폭이 겹치지 않게 추자(墜子)로 맺게 된 것이다. 청색 바탕의 선라(線羅)로 만들었으며, 적계문을 금수하였고, 삽화(鈒花)한 금추자로 맺었다.

이와 같이 관이 적관인 데다가 배자나 하피에서는 적계문이 있었으므로 이 대삼의 제도를 가리켜 조선시대에서는 그저 적의라고 통칭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⑤ 혁대 : 명나라에서 보내온 사여물목(賜與物目)에는 혁대가 빠져 있다.

그러나 인목왕비 가례시 적의시비(翟衣是非)에서 보더라도 졸지에 모든 것을 갖추기 어렵다 하여 이를 생략한 바 있다. 패옥과 수를 걸기 위하여서도 혁대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명나라 군왕비의 것을 따른 것이었다고 하면, 그것은 청기정(靑綺鞓)에 옥장식 10개, 금장식 3개가 있고, 여기에 운적문(雲翟文 : 우리 나라의 것은 배자나 하피의 문으로 보아 적계문이었는지도 모른다.)을 묘금(描金)한 옥혁대였을 것이다. 적의시비 이후 혁대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⑥ 대대 : 이것도 사여물목에는 빠져 있어 어떠한 것을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목왕비 가례 때는 의색(衣色)에 따라 홍라(紅羅 : 명나라 군왕비의 것은 홍라와 靑線羅를 수용하였다.)를 사용하였으며, 이후 이대로 띠었다.

⑦ 패옥 : 이것도 사여물목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인목왕비 가례시 적의시비에서 역시 졸지에 갖추기 어렵다 하여 생략하였고, 이후 패옥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패옥은 그 제양(制樣)이 남녀가 같은 것이어서 우리 국왕의 것을 들어보면, 옥패 하나에 민옥(珉玉)으로 된 옥형(玉珩) 1, 우(瑀) 1, 거(琚) 1, 충아(衝牙) 1, 황(璜) 2개가 있었다.

우 밑에는 옥화(玉花)가 있었고, 옥화 밑에는 또 옥적(玉滴)이 2개가 달려 있어 여기에 운룡문(雲龍門 : 왕비의 것은 적계문이었을 것이다.)을 묘금하였다. 옥형 밑에는 다섯 줄의 조(組)를 늘어뜨려 약옥주(藥玉珠)를 꿰었으며, 옥패 받침으로는 훈색 바탕에 적·백·표·녹의 4채로 짠 소수(小綬)가 딸려 있는 것이었다.

⑧ 수 : 이것도 사여물목에는 들어 있지 않으며, 인목왕비 가례시 적의시비에서 역시 문제가 되어 이후 이를 생략하게 되었다. 이것도 명나라 군왕비의 것을 따른 것이었다고 하면, 그것은 옥화채결수(玉花采結綬)로서 홍록선라(紅綠線羅)의 수대(綬帶)에 맺게 되어 있었다.

수 위에는 상화문(相花文)을 탁보(琢寶)한 옥화(玉花)가 하나 있었고, 옥추주(玉墜珠) 6과, 금추두화판(金墜頭花板) 4편, 소금엽(小金葉) 6개를 홍선라의 계대(繫帶)에 매어달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⑨ 말·석 : 청말·청석이었다. 이것도 명나라 사여물목에는 없는데, 석에 있어 군왕비의 것을 보면 청기(靑綺)로 지었으며 적문을 묘금하였고 조선(早線)으로 순(純 : 緣)을 둘렀으며 석수(舃首)에 주 3과를 장식한 것이었으니, 이와 동제였을 것으로 본다.

⑩ 규[笏] : 대개 후비의 것은 규라 하고 내명부·외명부의 것은 홀이라 하였는데, 우리 나라 왕비의 것은 상아홀을 보내왔다. 명나라 군왕비의 것은 길이 7촌의 곡문(穀文)을 새긴 옥곡규(玉穀圭)였다.

영조 때 ≪국혼정례≫에 나오는 적의제도를 보면, 관은 생략하고 적의·별의(別衣)·내의(內衣)·상(裳)·폐슬·대대·옥패·수·하피·적말·적석·백옥규(白玉圭)·흉배 등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관·적의·중단·폐슬·옥혁대·대대·옥패·수·말·석·옥곡규로 구성된 명나라 황후·황태자비의 것과 비교할 때 별의가 중단을 대신하게 되었다.

하피와 흉배가 첨가되었으며, 이밖에 내의와 상은 국속의 저고리·치마를 일컫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국조속오례의보 國朝續五禮儀補≫ 서례(序例) 길례(吉禮)에 수록된 왕비의 예복제도는 다음과 같다. ① 적의 : 대홍색 단(緞)으로 지었으며, 앞면의 좌우가 서로 곧바로 내려가 여미어지지 않고 있어 배자와 비슷하다.

앞 길이는 의단(衣端)과 가지런하고 뒷길이는 의단보다 척여(尺餘)나 더 길었다. 그리고 의 앞뒤에는 금수한 오조원룡보(五爪圓龍補)를 첨부하고, 앞 보(補) 밑에서 의단에 이르기까지 원적(圓翟)을 수놓아 좌(左) 7개, 우(右) 7개를 첨부하되 의단의 좌우 각 1개를 안으로 구부려 서로 연이은 것같이 하였다.

뒤 보 밑에서 의단에 이르기까지 원적을 수놓아 좌 9개, 우 9개를 첨부하였다. 또 의단 가운데에 원적 1개를 첨부하여 서로 연이은 것같이 하였다. 또 좌우의 넓은 소매는 의의 길이와 가지런히 하고, 수구 외면에 원적을 수놓아 좌 9개, 우 9개를 첨부하였는데, 원적의 수는 51개였다.

명나라 적의와 다른 점은, 첫째 색에 있어 심청색 아닌 대홍색이었는바, 이것은 전자의 적의라고 일컬어지던 ‘대삼’이 대홍색이었으므로 이를 그대로 관습상 사용한 데서 온 것이라고 한다.

둘째 적문(翟文)의 수가 다르며, 셋째 흉배를 가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명나라 제도를 본뜬 상복(常服)이라 할 친잠복(親蠶服)인 국의(鞠衣)에나 있었던 것으로, 왕 상복인 곤룡포(袞龍袍)의 흉배와 함께 이를 보(補)라고 하였는바, 오조원룡보가 그것이다.

우리 나라 왕세자빈의 적의는 왕비의 적의와 같되 흑단(黑緞)으로 지었고 사조원룡보(四爪圓龍補)를 가식하였다. 왕세손빈의 적의도 이와 같되 삼조방룡보(三爪方龍補)를 가식하였다. ② 별의 : 대홍색 향직(鄕織)으로 하여 중단 대신 적의의 밑에 받쳐 입었다고 보는바, ≪국조속오례의보≫ 왕비예복제도에는 이것이 나타나 있지 않다.

③ 내의·상 : 내의는 ≪국혼정례≫에서만 보이는 바 우리 고유의 저고리를 일컫는 것이라 하겠으며, 대홍색 향직으로 지었다. 상은 청단(靑緞 : 국혼정례에서는 남색 향직)으로 지었으며, 앞의 3폭은 연봉(連縫)하였는데 짧고, 뒤의 4폭은 각 2폭을 연봉하여 서로 여미었는데 길다.

앞뒤에 벽적(襞積)이 있었고, 중간 하열(下列)에 직금한 용(龍)을 첨부하였는데 속칭 스란[膝襴]이라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스란치마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왕세자빈과 왕세손빈의 상에는 스란에 봉(鳳)을 직금하였다.

④ 하피 : 이것은 대삼에나 있었던 것으로 왕비·왕세자빈·왕세손빈의 것이 동제이다. 흑단으로 겉을 하고 홍초(紅綃)로 안을 받쳤으며, 금으로 운하적문(雲霞翟文)을 그렸는바, 운하 28개, 적문 26개였다. ⑤ 폐슬 : 국왕의 폐슬과 같으면서 무회(無繪)라 하였으니, 그것은 대홍색 단 아니면 증(繒)으로 만들었다.

위에는 비(紕), 아래는 순(純)이라는 본색의 연식이 있었으며, 장문(章文)이 없는 것이었다. 왕세자빈·왕세손빈의 폐슬도 이와 동제였다. ⑥ 대대 : 대홍색 단으로 겉을 하고 백색 능(綾)으로 안을 하였으며, 녹색 단으로 연을 두른 것이었다. 왕세자빈·왕세손빈의 대대도 이와 동제였다.

⑦ 혁대 : 조옥대(雕玉帶)로서 청색 단으로 싸고 금으로 봉을 그렸다. 왕세자빈의 혁대는 이와 같으면서 불조옥(不雕玉)을 사용하였으며, 왕세손빈의 것은 수정대(水晶帶)였다. ⑧ 패옥 : 국왕의 패옥과 같다 하였으니, 이는 위의 대삼의 제도에서 설명한 바 그대로이다. 왕세자빈·왕세손빈의 패옥도 이와 같았다.

⑨ 수 : 국왕의 수와 같다고 하였는바, 그것은 홍화금(紅花錦)으로 하고 2개의 쌍금환(雙金環)을 간시(間施)한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여기에 같은 색의 소수(小綬)가 드리워 있었으며 밑에 사망(絲網)이 달려 있었다. 왕세자빈·왕세손빈의 수도 이와 동제의 것이었다.

⑩ 말·석 : 말은 국왕의 것과 같다 하였으니, 비색의 단으로 겉을 하고 초로 안을 하였다. 석도 국왕의 것과 같이 겉을 비색 단으로 하고 안을 백색 증으로 하였으나, 석단(舃端)에 홍록사(紅綠絲)로 된 화문(花文) 3개가 있었다.

왕세자빈·왕세손빈의 말은 흑색 단으로 지었고, 석은 흑색 단으로 겉을 하고 백색 증으로 안을 하였으며 석단의 사화(絲花)는 왕비 적의 석에서와 같았다. ⑪ 규 : 왕비는 백옥규였으며, 왕세자빈·왕세손빈의 것은 청옥규였다. 길이는 명나라 후비의 옥곡규와 같이 7촌이었다.

광무 1년(1897)에 제정한 황후·황태자비 적의제도를 ≪대한예전 大韓禮典≫ 제복도설(祭服圖說)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관 : 황후는 구룡사봉관(九龍四鳳冠)으로, 이것은 칠죽사(漆竹絲)를 가지고 둥글게 만들었고 비취(翡翠)로 덮었다.

위에는 취룡(翠龍) 9마리, 금봉(金鳳) 4마리를 장식하였는데, 가운데에 있는 용 1마리는 대주(大珠)를 물고 있었다. 나머지는 주적(珠滴)을 입에 물고 있었고, 관에는 또한 주결(珠結)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밖에 주취운(珠翠雲) 40편(片), 모란화 두 떨기에 꽃술 2개와 취엽 8잎이 달려 있는 대주화(大珠花) 12수(樹)와 나부끼는 듯한 볏대에 벼꽃 한 떨기, 반쯤 핀 벼꽃 한 떨기, 취엽 9잎이 달려 있는 소주화(小珠花) 12수가 장식되어 있었다.

또 관 좌우에는 주적을 드리운 금룡취운(金龍翠雲)을 장식한 3개의 선(扇)이 달린 박빈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여기에 주보전화(珠寶鈿花)와 취전화(翠전鈿花) 각 12개가 장식된 취구권 1부(副)와 주취면화(珠翠面花) 5개, 주배환(珠琲環) 한짝이 장식된 금구권(金口圈) 1부가 있었다.

조라(早羅)된 액자(額子)에는 용을 묘금하였고 주 21과(顆)를 장식하고 있었다. 황태자비는 구휘사봉관(九翬四鳳冠)으로서, 이것은 칠죽사를 가지고 둥글게 만들었고 비취로 덮었으며, 위에는 취휘(翠翬) 9, 금봉(金鳳) 4마리를 장식하였고 모두 입에 주적을 물고 있었다.

또 주취운 40편, 모란화 한떨기에 꽃술 2개와 취엽이 5잎이 달려 있는 대주화 9수와 나부끼는 듯한 볏대에 벼꽃 한떨기, 반쯤 핀 벼꽃 한떨기, 취엽이 5잎 달려 있는 소주화 9수가 장식되어 있었다. 관 좌우에는 주적을 드리운 난봉(鸞鳳)을 장식한 2개의 선이 달린 박빈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여기에 주보전화와 취전화 각 9개가 장식된 취구권 1부와 주취면화 5개, 주배환 한 짝이 장식된 금구권 1부가 있었으며, 조라로 된 액자에는 봉을 묘금하였고 주 21과를 장식하고 있었다.

② 적의 : 황후의 적의는 심청색 바탕의 저사·사(紗)·나(羅)를 임의로 사용하였으며, 12등분하여 적문 148쌍과 사이사이에 작은 윤화(輪花)를 장식하였고, 홍색 깃에 도련·수구에는 홍색 선을 둘렀으며 운룡문을 직금하였다.

황태자비의 적의는 황후의 적의와 동제인 가운데 적문을 9등분하여 138쌍을 하였고, 깃·도련·수구에 운봉문을 직금하였다. ③ 중단 : 황후의 중단은 옥색 사 또는 선라(線羅)로 지었으며, 홍색 깃에는 불문(黻文) 13개를 직성하였고, 도련·수구에 홍색 선을 둘렀다. 황태자비의 중단도 이와 동제이면서 다만 깃에 불문이 11개가 있었다.

④ 폐슬 : 황후의 폐슬은 저사·사·나를 임의로 사용하되 의색을 따랐으니 그 색은 심청색이었다. 3등분하여 적문과 사이에 작은 윤화 4개를 직성하였으며, 취색(緅色)으로 가에 연을 둘렀고 운룡문을 직금하였다. 황태자비의 폐슬은 이와 동제이면서 2등분하여 적문과 작은 윤화 3개를 직성하였으며, 깃에 운봉문을 직금하였다.

⑤ 혁대 : 황후의 혁대는 청기정(靑綺鞓)에 운룡문을 직금한 옥혁대로서, 이에는 옥장식 10개, 금장식 4개가 장식되어 있었다. 황태자비의 혁대는 이와 동제이면서 운봉문을 묘금하였다. ⑥ 대대: 황후의 대대는 겉과 안 모두 청색과 홍색 반반으로 하였고, 대단(帶端)은 홍색으로 하여 늘어뜨렸다.

위에는 주색 연, 아래는 녹색 연을 둘렀으며 운룡문을 직금하였고, 청기(靑綺)로 된 부대(副帶)가 있어 이로써 약결(約結)하였다. 황태자비의 대대도 이와 동제이면서 운봉문을 직금하였다. ⑦ 옥패 : 황후의 옥패는 좌우에 하나씩 있어, 옥패 하나에 옥형 1, 우 1, 거 2, 충아 1, 황 2개가 있고, 우 밑에 옥화, 옥화 밑에는 또 옥적 2개를 늘였다.

운룡문을 탁식(琢飾) 묘금하였고, 옥형 밑으로 5줄의 계조(繫組)가 있어 옥주를 꿰었는데, 걸으면 충아와 2개의 옥적이 황 2개와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옥패 받침으로 이에는 훈색 바탕에 황·적·백·표·녹의 5채로 짠 소수가 딸려 있었다.

황태자비의 옥패로 이와 동제이면서 옥형 이하에 운봉문을 탁식하였고, 옥패 받침인 소수가 훈색 바탕에 적·백·표·녹의 4채로 짠 것이었다. ⑧ 수 : 황후의 수는 훈색 바탕에 황·적·백·표·녹의 5채로 직성(織成)한 것이었다. 옥환 2개를 간시하였으며, 대수화 같은 색의 소수 3개가 부속되어 있었다.

황태자비의 수는 훈색 바탕에 적·백·표·녹 4채로 직성한 것이었으며, 이와 같은 색의 소수 3개가 부속되어 있었고, 옥환은 황후의 수에서와 같이 2개를 간시하였다. ⑨ 말·석 : 황후의 말은 청색 나(羅)로 지은 청말이었다. 석은 청색 기로 만든 청석으로서 운룡문을 묘금하였고, 조선으로 준을 둘렀으며, 석수에는 주 5과를 장식한 것이었다.

황태자비의 말은 청색 선라로 지었으며, 석은 황후의 것과 같으면서 운봉문을 묘금하고 석수에 주 3과를 장식하고 있었다. ⑩ 규 : 황후의 규는 옥곡규로서 길이 7촌이며, 위는 뾰족하고 이에 곡문(穀文)을 새겼으며, 황기(黃綺)로 밑을 맺고 운룡문이 있는 황기대(黃綺袋)에 쌌다. 황태자비의 규도 이와 동제이면서 밑을 금(錦)으로 맺고 쌌다.

참고문헌

『한국복식사연구』(류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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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유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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