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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토를 틀에다 찍은 다음 건조시키거나 구운 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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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점토를 틀에다 찍은 다음 건조시키거나 구운 벽돌.
내용

중국에서는 은(殷)·주(周) 때에는 없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사용한 듯하다.

조전(條塼)·방전(方塼)·공전(空塼) 등이 있다. 조전은 장방형으로 주로 가옥·성벽·묘실용(墓室用)으로 사용되며, 이따금 측면에 화상(畫像)·나뭇결무늬·제작 연월일·성명을 조각한 것도 있다. 방전은 바닥·벽 등에 사용되며, 표면 또는 측면을 문양으로 장식하는데 당대(唐代)에는 연화문·보상화문이 유행하였다. 공전은 갱전(坑塼)이라고도 하며 묘실용으로 제작된다. 주로 진한대(秦漢代)에 사용되었으며, 1m 내지 2m에 이르는 큰 것도 있고 표면에 화상문을 찍은 것이 많다.

전의 발달은 목재의 부족을 보충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조전에 나뭇결무늬, 즉 제주(題湊)가 나타나는 이유는 그 까닭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전은 틀에서 찍은 것을 구워서 사용하였고, 삼국시대부터 최근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으나 시대에 따라 용도·형태·문양 등에 변화가 생긴다.

① 용도별 분류 : 부전(敷塼)·벽전(壁塼)·묘전(墓塼)·탑전(塔塼) 등으로 구분된다. 부전은 건축물 또는 묘실 바닥에 깔기 위한 것으로 까는 위치에 맞도록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며, 표면과 측면을 문양으로 장식한다. 벽전은 벽을 장식하는 데 사용된다. 큰 것은 1m에 가까운 것도 있고 때로 문양을 조각하며, 조선시대에는 채색을 하기도 하였다.

묘전은 묘실을 축조할 때 사용하며, 전으로 축조한 묘를 전축묘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백제시대의 전축묘가 공주에 2기 있다. 묘전에도 겉으로 나오는 면에 문양이 돋을새김된다. 탑전은 탑을 축조할 때 사용되며, 전으로 축조한 탑을 전탑이라고 한다. 전탑은 삼국시대부터 건립되었으나 현존하는 것으로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이 가장 오랜 예로 남아 있다.

② 형태별 분류 : 방형·장방형·삼각형·사다리형·마름모형·상자형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하다. 방형전 또는 장방형전은 주로 바닥에 까는 부전으로 사용되며, 표면과 측면에는 문양을 조각하거나 유약(釉藥)만 칠하기도 한다. 삼각형전은 방형전을 비스듬히 깔아서 모서리에 생기는 삼각형 공간을 메우는 데 사용되며, 사다리형전은 묘실의 아치형을 만들 때 사용된다. 공주의 백제시대 전축고분에는 사다리형전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방형전이나 장방형전 같이 바닥에 까는 전에 비하면 작고 얇다.

마름모형전은 목침같이 생기고 크기가 비교적 작다. 대칭되는 둔각은 모를 죽이고, 상대하는 예각은 모를 연장시켜 뾰족하게 만들어 상하 좌우로 연결하면 둔각과 예각에서 이가 맞아 일종의 벽전으로 보인다. 출토 예가 매우 적어 지금까지는 경주 부근에서만 발견되었다. 그러나 출토 유적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표면에는 문양이 없이 유약만 칠하였다.

상자형전은 내부가 비어 있는 입방형이고 표면에는 장식이 있다. 출토례가 매우 드물고 출토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한 용도는 알 수 없으며, 지금까지는 부여 부근에서만 출토되었다.

종류·시문(施文)위치 등이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많이 쓰이는 문양은 연화문(蓮花文)과 보상화문(寶相華文)이다. 여러 가지 문양과 함께 쓸 때에도 연화문이나 보상화문은 언제나 주문양으로서 중심되는 위치에 배치된다. 경주 안압지 출토의 보상화문전과 부여 규암리 출토의 연화문전은 대표적 작품이다.

부여에서 발견된 상자형전에는 좌우에 연꽃과 인동을 돋을새김하였는데, 특히 인동은 네 잎이 파문(巴文)을 이루도록 율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와같이 연화문은 어떠한 용도의 전에도 광범위하게 장식되는 가장 보편적인 문양이며, 형태도 여러 가지로 변화시키면서 사용하였다.

다음으로 많이 쓰인 문양은 당초문(唐草文)이다. 당초문은 만초류(蔓草類)이기 때문에 옆으로 긴 공간을 메우기에 적당하며, 현존하는 예로는 부전의 측면 문양과 탑전에서 볼 수 있다. 안동조탑동5층전탑과 여주 신륵사다층전탑의 탑재(塔材)는 그 한 예이다. 방형전 측면에는 당초문과 함께 두 마리의 사슴을 대칭으로 배치하여 벽돌 깔기가 끝나는 측면을 장식하였고, 우각(隅角)에서 끝나는 벽돌에는 측면 두 곳에 새겼다.

방형전 표면에는 네 곳에 4분의 1 팔메트 문양이 있어 네 장을 연결하였을 때 비로소 하나의 문양이 완성되도록 배려한 것도 있으며, 장방형전 표면에 길이로 문양을 찍어서 여러 장을 연결하면 문양대가 형성되도록 한 것도 있다. 방형전이 대형일 때에는 방형 또는 원형의 문양권(紋樣圈)을 설정하기도 한다.

전의 문양 중에는 불교적인 주제가 있다. 점토판에 삼존불(三尊佛) 또는 천불(千佛)을 조각한 이른바 전불(塼佛)이 있고, 이와 유사한 내용인 사천왕상전(四天王像塼) 또는 불상·탑·불각(佛閣) 등을 조각한 것도 있다. 전불은 출토지가 경주라고만 전할 뿐 그밖의 사실은 불분명하며 용도도 분명하지 않다. 사천왕상전은 사천왕사지에서 파편으로 출토되었을 뿐 그 밖의 곳에서는 출토된 일이 없다.

원형(原形)은 악귀를 밟고 앉은 융복(戎服 : 철릭과 주립으로 된 군복의 한 가지)의 모습이고, 표면에는 유약을 칠하였다. 탑상은 탑과 불상, 불상과 불각 등을 교대로 조각하였는데, 전면(塼面)의 크기에 따라 표현방식에 차이가 있다. 이 밖에 불교와 관련이 있거나 불교적 색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문양도 있다.

백제시대 방형전에는 용·봉황·사자·와운(渦雲)·귀면(鬼面)·산경(山景) 등이 조각되었는데 그 수법에는 백제다운 부드러움이 있다. 또 묘전에는 장방형 표면에 전문(錢文)·대각선문·사격자문(斜格子文) 등이 조각된 것도 있다. 고려시대에도 문양을 장식한 전이 사용되었고, 문양의 내용은 단조로우나 여전히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여 연화문이 많이 이용되었으나 새로이 모란문이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문양을 조각한 전이 없다.

우리 나라 전을 시대별로 개관하면 삼국시대에 제작된 전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사용된 유구(遺構)의 원상이 보존된 예는 더욱 적다. 고구려의 영역 안에서 낙랑군시대의 전축분묘가 유행하여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수가 적지 않은데도 고구려에서는 전으로 고분 주체부를 축조한 일이 전혀 없다.

다만, 통구(通溝)지방의 태왕릉(太王陵)과 천추총(千秋塚)에서는 돌더미 속에서 ‘願太王陵 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 안여산고여악)’, ‘天秋萬歲永固(천추만세영고)’, ‘保固乾坤相畢(보고건곤상필)’ 등의 문자가 돋을새김된 전편이 발견된 일이 있는데 어떠한 형태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봉토의 일부에 사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 평양 부근이나 청암리 성터 안에서는 매우 드물게 ‘寒川(한천)’이란 문자명 또는 마름모무늬·사엽(四葉)무늬·고사리무늬 등이 있는 전이 발견되었다.

고신라시대 전의 발견례는 더욱 적다. 선덕여왕 때 양지(良志)가 전으로 작은 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물은 현존하지 않으며, 분묘는 고구려·백제와 달리 현실(玄室)을 마련하지 않은 원시적 구조로 전을 사용할 여지가 없다. 다만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의 일부에서는 무문전(無文塼)이 깔려 있는 유구가 발견된 일이 있다.

마름모형 무문 녹유(綠釉)의 소형 전이 경주 부근에서 발견된 일이 있으나, 유리된 상태여서 사용된 원형을 구명할 수는 없다.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면 백제는 전을 사용한 예가 상당히 많다. 가장 뚜렷한 예는 공주 송산리에 있는 전축분 2기이다. 그 중 1기는 매지권(買地券)에 의하여 백제 무녕왕릉임이 밝혀져 매우 주목되었다.

송산리 제5호분에 사용된 전문에 대각사선을 그은 것과 사릉격문(斜稜格文)의 두 가지 기하문(幾何文)은 중국 난징(南京)에서 발견된 육조시대(六朝時代) 남조(南朝)의 전 문양과 동일하며, 공주에서 출토된 전 중에 측면에 ‘梁良口爲師矣(양량구위사의)’라는 문자가 오목새김되어 있는 예와 아울러 중국 남조, 특히 양(梁)나라와 문화적인 연관이 깊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무령왕릉 전에는 길이모 좌우 끝의 연꽃을 중심으로 대각선을 그은 방형 구획이 있고, 그 사이에 사격자문을 돋을새김한 것, 작은 모에는 반으로 자른 연꽃을 돋을새김하여 두 장을 합하면 하나의 만개한 연꽃이 되도록 고안한 것, 작은 모를 좌우로 양분한 다음 각각 중앙의 연꽃을 중심으로 대각선을 그은 것 등의 문양이 있다.

분묘 천장의 아치에도 단면 사다리꼴의 좁은 작은 모에 문양을 새겼고 이러한 전일수록 ‘急使(급사)’, ‘中方(중방)’ 등의 기호가 찍혀 있어 처음부터 구조 전체에 대한 설계에 따라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는 현실 바닥을 전으로 깔거나 연도(羨道) 입구를 전으로 막는 등 분묘에 전을 사용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백제시대의 특이한 전의 예로는 용도 불명이지만 부여읍 군수리 절터에서 한 면을 좌우로 구분하고, 8엽연화와 사파형(四巴形)의 인동문을 각각 둥글게 돋을새김하고 주위에는 톱니무늬를 새긴 속이 빈 상자 모양의 전이 발견되었다. 또 부여읍 규암리에서는 연화문·사자문·봉황문·와운문, 그리고 귀면문(鬼面文) 2종과 산경문 2종, 합계 8종의 방형전이 발견되었다.

이 전은 한변이 29㎝ 내외로 비교적 크며, 발견 당시의 소견만으로는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으나 표면에 조각된 문양에는 백제의 명쾌하고 율동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전의 사용 범위는 넓어지고 형태와 문양, 제작수법에서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8엽보상화문을 주문양으로 한 방형전이다. 보상화문 자체의 표현방식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으나 방형의 표면 중앙에 8엽으로 된 보상화를 배치하고, 네 귀에도 문양을 배치하는 것이 격식이다. 보상화문은 와전(瓦塼)은 물론 금공(金工)에서도 예외 없이 8엽이 기본형이나 꽃잎의 표현에는 시대에 따라 특징이 나타난다.

8엽보상화문전은 주로 바닥에 깔기 위한 전이다. 네 귀에는 4매가 합쳐져서 하나의 단위가 이루어지도록 4분된 형태의 팔메트문양이 표현되고, 밖으로 나타나는 측면에는 화려한 당초문으로 메웠으며, 사슴이나 드물게는 새를 돋을새김하기도 하였다.

경주 안압지에서는 이와 같은 전형적인 보상화문전에 ‘調露二年(조로 2년)’이라는 연기가 오목새김된 것이 발견되어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보상화 대신 연화를 조각하는 수도 있으나 조각수법은 보상화문이 더 정교하다. 보상화나 연화는 장방형 전에도 시문되는데 이때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두 개를 배치한다.

방형전에는 보상화나 연화를 주문양으로 쓰나 특이한 의장이 가미되기도 한다. 중앙에 큰 연화, 네 귀에 작은 연화를 배치하고 이들 연화를 연결하는 대각선을 친 것, 대형 방형전일 때 중앙의 보상화 주위에 방형 연주문대(聯珠文帶)를 또 하나 설치한 것, 중앙에 작은 방형의 구획선을 돌린 속에 네 개의 연화문을 찍고 가장자리에도 연화문대를 돌린 다음 남은 공간에 네 개의 8엽보상화를 찍고 융기선으로 대각선을 친 것을 十자로 4등분하여 네 개가 모여 한 벌이 되게 만든 특이한 문양 등이 있다.

매우 드물게는 삼각형전이 있는데 거기에는 문양이 없는 것도 있으나 보상화문전을 삼각형으로 자른 것도 있다. 벽전으로는 벽돌 측면에 문양을 찍은 것이 가장 많은데, 상하에 주문대(珠文帶)를 넣고 그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두 개 이상의 보상화문을 배치하여 문양대가 계속되도록 한 것도 있다. 또 끝이 삼각형인 긴 장방형 벽돌의 삼각형 부위에만 문양이 있어 삼각형 끝부분을 어긋나게 맞춰서 배열하면 이 부위에만 문양이 연속되도록 고안된 특수한 것도 있다.

신라시대에도 불교상을 조각한 전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경주 사천왕사지에서는 벽을 장식하던 사천왕상전이 출토되어 크기, 각선의 예리함, 도상(圖像)의 특이함, 녹유(綠釉) 시유 등 7세기 후반의 신라 공예기술을 과시하고 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전탑이 상당수 건립되었는데 그 중에는 문양전을 사용한 예가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5층전탑 초층 옥개부(屋蓋部)에 당초문이 돋을새김된 전이 유일한 현존 예이고,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용산리불령사(佛靈寺) 자리에 있던 전탑은 일찍이 도괴되었던 것을 1965년 현재의 형태로 개축하였는데, 여기 사용되었던 전에는 불상과 탑을 교대로 돋을새김하여 이 문양이 표면이 되어 탑을 장엄하였다.

이와 비슷한 문양전이 울산광역시 울주군 농소면 일대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전에는 구름 위에 불각 또는 불각과 불상을 교대로 배치한 도안이 있어 어느 것이나 매우 정교하며, 불령사 탑의 예로 보아 불탑을 축조하는 데 사용하였으리라고 생각되나 탑 자체는 이미 없어졌다.

또, 소면이나 불령사에서는 비금(飛禽)과 화문(花文), 불각과 용두(龍頭)를 배치한 것 등이 발견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무문녹유전이 상당수 절터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존 사찰의 법당에도 깔려있는 곳이 있다. 또, 무사가 말 위에서 활을 당기면서 동물을 뒤쫓는 수렵문전이 경주에서 발견된 일이 있다.

고려시대에도 전은 여전히 사용되었으나 신라시대의 다양한 형태와 화려한 문양 등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초기에는 신라의 형식을 따른 보상화 또는 연화가 장식된 방형전 또는 녹유전이 간혹 발견되나 초기가 지나면서 대부분 벽전이고, 문양은 신라의 문양이 선적(線的)이어서 화사한 느낌을 주는 데 반하여 고려의 문양은 면을 넓게 살려서 조형감각에 차이가 있다. 때로는 문양의 배경에 횡선 또는 물결무늬를 촘촘히 쳐서 번잡스러운 느낌이 난다.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풍을 따라 문양전으로 축조한 탑이 1기가 남아 있는데, 경기도 여주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이 그것이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는 동안 원형과 많이 달라졌지만, 반원연주문(半圓聯珠文) 안에 당초문을 장식한 문양이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전은 빈약한 듯하면서도 특수한 것이 있다.

1947년에는 개성 부근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대찰인 흥왕사(興旺寺)터에서 연화문 녹유전이 채집된 일이 있으며, 1966년에는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서 청자전의 단편이 발견된 일이 있었다. 이 청자전은 17.5㎝의 한 변만 남아 있어 원형을 알 수 없으나 가장 두꺼운 두께 부위가 2.3㎝이다.

한편, 고려시대 전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청자 벽전이 있는데, 이것은 도판(陶板)·서판(書板) 등으로 불려오던 것으로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요지(窯址)에서는 장방형과 사다리형의 판형(板形) 전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중앙부 두께 0.6㎝ 내외, 주연(周緣) 두께 0.3㎝로 이면은 유약 없이 거칠고 표면에만 상감(象嵌) 혹은 오목새김수법으로 각종 문양을 장식하였다.

상감문양으로는 국화·모란·운학(雲鶴)·유로수금(柳蘆水禽)·당초·물결무늬 등을 주문양으로 하고 여의두문·뇌문(雷文) 등을 곁들였으며, 오목새김문양으로는 용문(龍文)을 썼다. 이 도판의 용도에 대하여는 구구한 설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건축물의 내장을 위한 벽전의 일종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고려 의종 때 청자기와로 양이정(養怡亭)을 덮었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강진요지에서 청자기와가 다수 출토된 점을 생각하면 이 설은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에도 전은 사용되었지만 용도나 장식문양에는 큰 변화가 생긴다. 전으로 바닥을 까는 일은 거의 없어지고 문루나 담을 쌓기도 하나, 여기 사용되는 전에도 문양은 없다. 경복궁에 현존하는 굴뚝(煙家라고 함)에는 각종의 크고 작은 전을 사용하였고, 초화(草花)·솔·국화·학 등 각종 문양을 채색으로 장식하였다. 말하자면 고려시대까지의 불교적인 색채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형태로의 커다란 전환이 보인다.

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한 편이다. 특수한 예가 발견되면 그때그때 자료로서 소개하였을 뿐이다.

체계적인 연구논문으로는 황은신의 <삼국·통일신라시대의 전(塼)에 나타난 문양 연구>(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2), 김여배의 <백제무령왕릉전고 百濟武寧王陵塼考>(백제연구 5, 충남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1974),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의 ≪백제와전도보 百濟瓦塼圖譜≫(1972), 김동현 등의 ≪신라의 기와≫(동산문화사, 1976) 등이 있다. 여기서 보이듯 신라시대 이전이 주가 되고 고려시대 이후의 전에 관한 연구는 부진한 편이다.

참고문헌

『백제와전도록(百濟瓦塼圖錄)』(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3)
『와전특별전(瓦塼特別展)』(동국대학교박물관, 1985)
집필자
진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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