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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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전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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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개념
서로 떨어진 곳에서 전류나 전파를 이용하여 약정된 부호 신호의 방식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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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로 떨어진 곳에서 전류나 전파를 이용하여 약정된 부호 신호의 방식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통신.
내용

전류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유선전신, 전파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무선전신이라고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전신의 원리는 전기의 원리와 함께 일찍부터 연구되어 왔으나, 근대적 의미의 전신 개념에 가까운 방식은 1834년 영국의 쿡(Cook, W. F.)에 의해 이루어진 5침식(針式) 지시전신기의 실용화 실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방식은 5개의 자침을 나란히 배치하여 전류의 강약에 따라 움직이는 침의 조합으로 문자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전기에 매우 흥미가 많았던 모스(Morse, S. F. B.)는 유럽 여행 중 이러한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한 끝에 1839년 9월 뉴욕대학에서 500m의 전선을 깔아 전신의 실험에 성공하였다.

실험에 성공한 모스는 이의 특허권을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팔고자 하였으나 냉대를 받았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수기 신호인 세마포르 통신(semaphore 通信)이 행해지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1841년 다른 방식에 의한 전신 개통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스는 미국 정부와 교섭하여 3만 달러의 건설 자금을 받아 1845년 5월 24일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 전선 가설을 완공하고, 최초의 전건(電鍵)을 두드려 성서의 한 구절인 “What hath God wrought!”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를 모스 전신이라 부른다.

모스 전신은 메시지를 단점(·)과 장점(―) 2종류의 기호 조합으로 바꾸어 보내는 통신 방식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전신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 부호를 모스 부호라 한다. 특히 철도의 안전운행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여 1852년경에는 유럽 전체의 전신망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전신이 확장되면서 그 전까지 비둘기를 이용하던 각국의 통신사들은 전신을 이용한 뉴스 속보를 시도하게 되었으며, 전신 또한 뉴스 속보를 가능하게 하면서 철도 통신으로부터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무선 전신은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마르코니(Marconi, G. M.)에 의하여 고안되었다. 그에 앞서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츠(Hertz, H. R.)가 맥스웰(Maxwell, J. C.)의 전자파 이론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는데, 이를 안 마르코니는 1890년 불꽃 방전으로 전자파(전파)를 발생시키고 이를 2.5㎞ 떨어진 지점에서 모스부호 방식으로 보내 무선 송수신 실험에 성공하였다.

무선전신은 당시의 최대 교통 수단이었던 선박에 있어 중요한 통신 수단이 되었으며, 1901년 12월 대서양 횡단 실험에 성공하였다.

우리 나라에 최초로 전신이 도입된 것은 1885년 9월 28일로, 서울과 인천에 최초의 전신이 가설되고 이를 관할하기 위해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總局)이 개국되면서 전신이 시작되었다.

10월 18일에는 의주까지 전신이 가설되어 인천-서울-의주에 이르는 서로전신선(西路電信線)이 완전 개통되었다. 이를 통하여 청나라를 거쳐 유럽까지 통하는 국제 전신도 연결되었다.

서로전신선 개설 이전에도 우리 정부는 전신 개설을 위해 적극적인 시책을 펴 왔으며, 1882년에는 전신과 우편사무를 관장하는 우정사(郵政司)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전신 도입을 위한 노력을 전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882년 톈진(天津) 유학 후 귀국한 상운(尙雲)이 최초로 전화기를 소개하고, 1883년에는 홍영식(洪英植)이 전신기 8좌를 미국에 주문했으나 갑신정변으로 허사가 되었다.

1884년 가을 우리 정부에서는 김학우(金鶴羽)를 일본에 파견하여 전신에 관해 연구하도록 했으며, 김학우는 국문자모호마타법(國文字母號碼打法)을 고안한 바 있었다.

서로전신선 건설 이후 우리 정부의 자주적 노력으로 1888년 6월 1일 서울과 부산을 잇는 남로전신선(南路電信線)이 개통되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이를 위해 1887년 3월 13일 서로전신선을 운영하는 한성전보총국과는 별도로 조선전보총국을 창설하고, 홍철주(洪澈周)를 초대 총판(오늘날의 체신부 장관)에 임명하여 독자적인 전신 사업을 시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기통신법의 시초인 <전보장정 電報章程>이 제정되고,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국문 전신부호(이는 김학우가 고안한 것과 같다)가 마련되어 전신 사업의 자주적인 발전에 커다란 전기를 이룩하였다.

서로전신선과 남로전신선의 개통으로 우리 나라의 전신망은 남북 양단에서 해외 전신과 연접하게 되었다. 더욱이 3년 뒤인 1891년 6월에는 서울에서 원산에 이르는 이른바 북로전신선(北路電信線)이 개설되었는데, 이는 본래 함경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되도록 계획되었던 것으로, 우리 나라의 전신선을 동양 3국의 주요 간선으로 발전시키려는 웅대한 포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발전 일로에 있던 우리 나라의 전신 사업은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위기에 처하게 되어, 남로전신선만이 우리 관할하에 있게 되었고 서로전신선과 북로전신선은 일본군이 군사용으로 강점하였다.

청일전쟁이 종결된 뒤에도 일본은 강점한 전신 선로를 선뜻 반환하지 않았다. 일차적으로 25년간의 경영권을 소유하고 있음을 주장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통신권을 영구히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삼국간섭과 이에 따른 열강의 압력으로 일제는 그 야욕을 포기하고, 청일전쟁 이후 1896년까지 불법 강점하였던 전신 선로를 반환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리 정부에서는 1896년 7월 전보사 관제를 새로 제정하고 국내 전보 규칙을 보강하는 등 전신 사업의 새로운 출발과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00년 3월에는 독립된 체신 사업 관청으로서 통신원을 창설하였고, 경영 개선에도 힘써 수입 증대를 가져왔으며, 공중 전화 사업도 이 때 시작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신 사업에도 파국의 위기가 닥쳐 왔다. 통신권의 장악이 전쟁의 수행이나 타국의 지배에 절대로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던 일제는 청일전쟁 중에 우리 나라 전신 선로를 불법점거, 사용하고, 그들이 불법으로 가설한 군용 전신권을 철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군대까지 주둔시키고 독자적인 전기통신망도 구성하였다.

일제는 러일전쟁의 발발을 전후하여 이른바 한일의정서를 강요하고 이에 의하여 대한방침과 대한시설강령 등 일련의 한반도 병탄에 관한 기본 정책을 수립하고는 꾸준히 이를 실천해 나갔다.

이러한 큰 테두리 속에서 일찍부터 은밀히 통신권을 강탈하기 위한 공작을 펴고 있었던 일본은 1905년 2월에 이르러 우리 정부에 명목상 위탁 운영이라는 형식으로 통신권 이양을 정식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종을 비롯한 통신원 총판 민상호(閔商鎬) 등 관계 요로와 각 전보사 사장 및 일선 종업원은 물론 전국민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으나, 일본은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협정’을 강제로 체결하고 통신기관을 강탈해갔다. 굴욕적인 을사조약의 체결보다 반 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통신협정 체결 뒤에도 관민의 거센 항쟁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1905년 7월 2일 강계우체사의 접수를 끝으로 우리 나라의 통신기관은 완전히 일본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일본은 통신기관 장악 이후 1907년에서 1910년 사이에 일본의 경비 전화나 군용 전신의 가설에만 주력하여 국권 강탈의 기초 작업이 되는 애국의병 탄압의 도구로 삼았으며, 불행히도 이 때 가설된 전신전화망이 이후 우리 나라 전신전화망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사실은 무선 전신의 실시였다. 우리 나라의 무선 전신은 1910년 하반기 광제호와 월미도 등대무선소 사이에 실시한 것이 그 효시이다. 이 대한제국 최후의 의지는 실현되자마자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한편 1904년 11월 신조군함 광제호에 설치되었던 무선 시설도 대한제국 때 이루어진 것이다.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한 뒤 우리 나라의 전신 사업은 일제의 대륙 침략과 식민지 정책 수행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 전락하여 공공 서비스라는 통신 본래의 기능은 극히 제한되고 말았다.

1945년 광복의 환희가 미처 진정되기도 전에 국토의 분단과 함께 우리 나라의 전신망은 양분되고 말았으며, 6·25동란의 시련이 겹쳐 참담한 파괴를 겪어야 했지만, 1957년 서울∼부산 간에 텔레타이프 통신이 개시되는 등 전신은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텔렉스 전신의 개통 등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고, 1980년대 들어 사회적 변혁과 궤를 같이하면서 전신을 비롯한 전기통신 전분야에서도 혁신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통신 방식의 기술적 진보, 통신 사업의 공사(公社)나 사기업(私企業)으로의 이관 등 정보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으며, 정보화 사회에 발맞추어 전신 방식도 텔렉스에서 다시 데이터 통신으로, 그리고 컴퓨터 통신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전기통신100년사』(체신부, 1985)
The Great Northern Telegraph Company 1869∼1960(F.E.Bording Ltd., Copenhagen,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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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진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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