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

조선시대사
사건
1627년(인조 5) 후금(後金 : 뒤의 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
목차
정의
1627년(인조 5) 후금(後金 : 뒤의 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
역사적 배경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약 2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東亞)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그리하여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판단, 향배(向背)를 달리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명군이 사르후전투(薩爾滸戰鬪)에서 대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이 불가피했음을 해명하였다.

그 결과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설진(設鎭)해 요동 수복을 꾀하는 거북한 사태가 벌어졌지만,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별다른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용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 때의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모문룡을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후금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명나라에 이어 조선과도 경제 교류의 길이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때문에 후금은 무력적인 수단으로 이를 타개할 기회를 노렸다.

한편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었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 주전론을 주장해왔던 청나라 태종은 더욱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1월 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의 주력 부대는 용천·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身彌島)로 패주하였다.

후금군의 침입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근군(勤軍)을 모집하였다. 그 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평산에 포진했던 장만은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자 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 이 사이 인조는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갔다.

한편,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다. 특히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는 데 따르는 후방의 위협을 염려하게 되었고, 조선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상국인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3월 3일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조선과 후금의 화약은 두 나라가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굴욕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더욱이 막대한 세폐(歲幣)와 수시로 강요하는 물자의 조달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에 반발, 배금의 길을 굳히게 되었다.

후금 역시 세폐와 중강(中江)의 개시(開市) 등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공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 경향이 날로 고조되는 데 불안을 느꼈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후금이 더욱 팽창된 세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강압적인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악화일로를 걷게 되어 결국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
『정묘양호의거록(丁卯兩胡義擧錄)』
「조선중기의 대만관계(對滿關係)」(김성균, 『백산학보』23, 1978)
「정묘화의후(丁卯和議後) 후금병적(後金兵的) 철퇴(撤退)」(장존무, 『동방학지』18, 1978)
「정묘호란시의 후금의 출병동기: 후금의 발전과정에서의 사회경제적 제문제와 연관하여」(김종원, 『동양사학연구』12·13합집, 1978)
「정묘병자호란의병고」(이장희, 『건대사학』4, 1974)
「정묘호란시의 후금군의 철병경위」(전해종, 『백산학보』2, 1967)
「정묘호란의 화평교섭에 대하여」(전해종, 『아세아학보』3, 1967)
「광해군의 대후금정책」(이병도, 『국사상의 제문제』1, 국사편찬위원회, 1959)
「光海君時代 鮮滿關係」(稻葉岩吉, 1933)
집필자
정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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