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

피리 부는 소녀/윤승욱
피리 부는 소녀/윤승욱
조각
개념
나무 · 돌 · 금속 등에 사람이나 자연물의 형상ㆍ서화ㆍ추상 형태 · 불상 등을 입체적으로 새기는 조형미술.
정의
나무 · 돌 · 금속 등에 사람이나 자연물의 형상ㆍ서화ㆍ추상 형태 · 불상 등을 입체적으로 새기는 조형미술.
개 설

즉 현실의 공간에 삼차원적인 덩어리[量塊]를 예술적으로 창조하는 미술 분야를 말한다. 따라서 삼차원적 현실 공간을 이차원적인 화면에 재구성하는 것과 달리 시각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조형 예술이다.

이러한 조각은 표현 기법상 돋을새김[浮彫]과 둥근새김[丸彫]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다시 세분할 수 있다. 부조(relief)는 얕은 부조(bas-relief)와 높은 부조(haut-relief)가 있다. 돌[石]·나무[木]·금속(金屬) 등의 바탕에 요철법(凹凸法)으로 높고 낮게 새긴 것이다. 회화 기법과 비슷하게 정면성이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환조는 완전히 삼차원적인 기법으로 앞뒤·좌우를 둥글게 새긴 것이다. 이 역시 돌이나 나무 등의 재료에 직접 새기는 방법과 소조 및 테라코타(terra-cotta), 금속 등의 조각처럼 뼈대에 살을 덧붙여 자유자재로 조형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조각이라는 조형 예술은 인류 문화의 시작인 구석기시대부터 점차 변형, 발전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다. 특히 예배나 숭배를 위한 종교 예술에서는 가장 각광받던 조형 예술로 미술사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우리 나라에도 구석기시대부터 조각 예술이 창작되었으리라 추정되지만 세계 미술사에 남을 만한 걸작들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신석기시대에는 울주 암벽 조각 같은 부조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서 이 시대는 우리 나라 조각사에 새로운 차원의 시대로 간주할 수 있다. 이후 청동기시대에 걸쳐 암벽 조각·선돌 기타 목 조각들이 계속 발전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조각사상 가장 획기적인 변혁이 일어난 시대는 불교 수용이 이루어진 4세기경의 삼국시대이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조각사가 전개되었다고 하겠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불교 조각은 전무후무하게 걸작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 조각이 세계 조각사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선사 시대 암벽 조각과 선돌[立石]·고인돌 그리고 특히 역사 시대의 불교 조각이다. 특징은 시대·지역·유파에 따라서 제각기 달라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양식적인 면과 형식적인 면에서 북방적 요소, 중국·서역·인도 내지 서구적인 요소까지 모두 수용하여 우리 나름대로의 예술적 조형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중국이나 일본에도 전파하는 등 세계 조각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역 사

선사시대의 조각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의 연구나 발굴은 이제 시작 단계에서 그 전모를 밝히는 데에는 다소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구석기시대의 조각도 미술사적으로 논의할 만한 걸작품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 무엇이라고 단정적으로 언급할 단계는 아니지만 다른 나라 구석기시대의 조각 못지 않은 대표작들이 반드시 출현하리라 기대된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신석기시대의 바위 조각, 즉 암벽 조각들이 이를 잘 증명하여 주고 있다.

신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의 장구한 세월 동안 식량을 채집하던 원시적 경제 단계(food-gathering)를 뛰어넘어 식량을 생산한 새로운 경제 단계(food-production)를 달성한 획기적 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식물을 길러 여기서 결실을 거두고 동물을 길들여 이들을 양식으로 삼게 되었다는 사실은 야생 동물과 야생 식물을 찾아 산야를 헤매던 때와는 현격한 차이를 가져왔을 것이다.

마을을 만들어 정착하게 된 이들은 노동을 관리하고, 식량을 저장하며, 노동 기구나 저장 그릇을 만드는 수공업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을과 농지를 관리하고 지켜야 하는 새로운 사회 패턴이 이루어졌다. 분업이 생기고 관리하는 사람, 관리받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는 보다 집단적이고 보다 복잡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식물을 기르는 데에는 여러 가지의 어려움이 있다. 비와 바람, 햇볕과 일기 등이 항상 고르지 않으면 당장 막심한 피해가 오게 된다. 이러한 온갖 자연현상들이 그들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고목나무, 큰 바위, 높은 산, 깊은 물은 물론, 호랑이 같은 무서운 짐승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외경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현상을 움직이는 배후에는 어떤 신비스러운 힘이 있어서 이 힘이 온갖 자연의 조화를 만들어 내며, 모든 자연현상 하나하나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두렵고도 무서운 깊은 물, 높은 산, 호랑이 등에게도 각기 정령이 있으며, 인간들을 무섭게 만든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물신 숭배 신앙, 즉 애니미즘(animism)이라 하여 고등 종교의 전 단계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물신 숭배 신앙은 곧 영혼 신앙과도 직결되어 각 자연현상에 있는 정령은 그것이 죽더라도 정령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나왔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무덤이 생겨나고 신앙 의식이 발생하며, 신에게 바치는 상징이나 우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인간은 이제 생각이 깊어지고 상상력이 풍부하여졌으며, 보다 이지적으로 되어갔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물에 대한 개념을 정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과 산, 사슴과 호랑이, 태양과 달 등 필요한 모든 사물은 이제 마음속으로 그것의 형체·속성·특징 등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인간 만사나 온갖 자연현상까지도 그 특징을 간단히 개념화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구체적인 모습 등을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그 속성이나 특징 등의 개념을 기호나 암호로 상징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은 갖가지 기호로 된 기하학적 형태로 나타나게 되며, 동물 같은 것도 과장과 왜곡의 추상화된 형태로 표현하게 된다. 인간의 모습 역시 몇 개의 선으로 머리·몸뚱이·팔·다리를 묘사하는데 그치고 만다. 이제 미술은 자연주의적 경향이 물러나고 기하학적으로 양식화된 추상주의가 전면적으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신석기시대 내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조각은 바위 조각[巖壁彫刻 또는 巖壁刻畫]들이다. 바위 조각들은 동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이 1970년 12월 25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의 냇가 암벽의 기하학적 무늬와 기타 동물 조각(제1 암벽조각)들을 발견하면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71년에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양면 대곡리의 절벽에 새겨진 동물 그림들(사냥 미술)도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대곡리의 조각들은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조각으로 손꼽아도 좋을 것이다.

절벽 아랫부분에 판판한 암면이 형성된 곳에 물고기·새·사냥 장면·고기잡이 광경 등 수많은 장면들이 일대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가장 많이 그려진 동물로는 사슴·호랑이·멧돼지 순이고 물고기는 고래이다. 주목되는 장면은 사슴 사냥하는 장면과 고래잡이 장면인데 창 같은 무기를 든 사람이 사슴을 잡는 포즈를 묘사하였다. 그리고 배를 탄 사람들이 뒤집어진 고래를 끌어당기는 광경을 새긴 것이다.

사람을 다양하게 그리고 있는데, 남근(男根)과 꼬리가 달린 사람이 춤추는 모습, 얼굴만 그로테스크하게 그린 탈 등이 있다. 이들 사람들은 신체의 움직임과 그 율동적인 몸짓이 유난히 강조되며 신체의 비례가 의도적으로 왜곡된다. 막대기 같은 동체, 턱이 없는 큰 손발, 희화적으로 긴 다리나 비뚤어진 팔 등 과장과 왜곡이 강조된 표현주의적 양식에 가깝다.

더구나 부산 동삼동 출토의 패면(貝面) 같은 것은 조개껍데기에 두 눈구멍과 커다란 입 구멍 등을 뚫어 놓았을 뿐인 극도의 추상화를 보여 주고 있다. 동물 등도 단순화된 선, 호랑이나 사슴의 과장된 몸짓, 표피나 내장을 표현한 도식적 묘사 등에서 표현주의적인 양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표현주의는 구석기시대의 자연주의와 본질적으로 차이 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먹이를 보고 으르렁거리는 호랑이나 표범, 요동치는 고래, 주위를 살피는 듯한 사슴의 포즈 등은 몇 가닥의 선이나 점으로 구성하였지만, 놀랍게도 살아 약동하는 듯한 묘사력을 마음껏 구사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들 그림들은 단순화된 형상이나 강조된 과장, 도식화된 표피나 내장 무늬 등에서 양식화와 기하학적 추상주의의 대두를 실감나게 느끼게 한다.

여기서 대두된 기하학적 추상주의는 천전리 제1 암벽 조각에서 완전히 정착하고 있다. 갖가지 원과 마름모꼴 물결과 직선, 온갖 식물의 상징, 연속 마름모꼴이나 남녀 성의 상징, 갖가지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묘사는 신석기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념화된 사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기하학적 미술이며, 인간의 사유를 기초화한 문자이자 추상주의 양식의 미술인 셈이다. 이러한 기하학적 무늬들은 신석기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무늬 토기[有文土器]의 무늬들과 유사한 형태와 기법을 보여 주고 있어서, 적어도 신석기 후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페킹 스타일(pecking style)이라는 기법, 즉 쪼아서 안을 돌이나 나무로 연마한 수법 등은 스칸디나비아 쪽에서는 신석기 말기부터 나타난 수법인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적어도 신석기 말기부터는 기하학적 추상 양식의 미술이 전면적으로 진출하여 이후 청동기시대까지 장구한 세월 동안 계승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신석기시대의 무늬 토기 내지 선돌이나 고인돌 같은 지석 미술과 청동기와 청동기에 새겨진 갖가지 무늬 등도 이 시대 조각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고구려의 조각

고구려는 7세기(서기전 37∼서기 668년)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만주와 한반도의 북부를 차지하는 강대국이었다.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4세기였고,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 때에는 그 전성기였다.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사상과 문화 면에도 혁명적인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불교의 수용이었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372년(소수림왕 2년)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전부터 불교는 상당히 전파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를 공인한 것은 물론 고구려가 정복 국가로 성장하면서 국가 통치 이념과 복잡다단한 민족을 융합시키는데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불교 미술의 수용은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불교 삼보(三寶)의 하나인 불보(佛寶), 즉 불상은 불교의 수용에는 가장 먼저 따라오기 마련이다. 최초로 수입된 불상이 인도 불상인지 중국 불상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4세기 당시의 중국에는 인도의 영향이 절대적인 인도적 불상이 유행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사원이 만들어진 375년이나 광개토대왕 당시 많은 절을 지었을 때인 393년경에 고구려에서 국산제 불상이 만들어졌다면, 아마도 인도적인 중국 불상을 모방하였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은 1959년 서울 뚝섬에서 발견된 조그마한 금동불상이 잘 입증하여 준다. 선정인(禪定印 : 두 손을 가지런히 배 앞에 모은 손 모양)을 짓고 있는 이 불상은 400년경의 중국제 불상, 가령 승광2년명소금동불(勝光二年銘小金銅佛, 429년, 높이 19㎝) 같은 금동불상들과 흡사하다. 그래서 중국 불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불상 양식이 4, 5세기의 고구려 불상 양식과 비슷하였을 것임이 분명한 것으로 고구려 제1기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대의 불상은 뚝섬 불상 외에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의 발견에 기대하여 볼 수밖에 없다.

6세기의 불상들은 다소 발견되고 있다. 6세기의 불상은 대개 제2기로 양식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6세기의 제1기(전반기) 양식은 고구려의 제2기 양식인데 550년경 이전이며, 제2기는 550년 이후를 말한다. 1기의 작품은 중국의 북위 양식(北魏樣式)이 농후하면서 고구려의 북방적 경향이 강한 역강(力强)한 불상 양식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은 연가7년명금동불입상(延嘉七年銘金銅佛立像)에서 증명되고 있다.

아마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의 남으로 죽령(竹嶺)과 북으로 요동(遼東) 일대까지의 광활한 영토의 정복과 막강한 국력이 문자왕·인장왕·안원왕·양원왕에 이르기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강성한 국력을 배경으로 한 찬란하고 발랄한 불교 문화에서 이러한 역강한 불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6세기의 제2기(후반기) 양식은 고구려 제3기 양식인데 오랜 기간 한반도에서의 농경 생활과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절충 양식, 즉 화화 양식(華化樣式) 영향으로 세련되고 원만한 양식이 성립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황해도 곡산 출토 금동무량수상(金銅無量壽像)을 들 수 있다.

이 변화는 고구려 사회의 변화와도 밀접히 관련된다. 550년경을 전후하여서부터 고구려에는 다소의 변화가 일어난다. 외부적으로는 중국 쪽에서는 북위에서 갈라진 동위와 서위가 557년에는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된다. 577년에는 수(隋)가 북조(北朝)를 통일한다. 그리고 589년에는 남조(南朝)까지도 멸망시켜 오랜만에 중국 천하가 통일된다.

이 중국 천하의 통일은 고구려로 하여금 중국 대륙 쪽에 신경을 곤두서게 하였다. 그래서 남으로 신라와 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다시 빼앗기게 되며, 대내적으로는 중국과의 대결에 대비하는 전시 체제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제4기는 600년경부터 668년 고구려 멸망 때까지이다. 100만 대군을 거느린 수나라의 2차에 걸친 공격을 물리친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는 중국 쪽의 수·당간의 왕조 교체로 인하여 나타난 중화 양식(中華樣式)의 현실적 조각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대내적으로는 안정을 추구하는 분위기 때문에 현실주의 조각 양식이 대두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현재는 당대의 명확한 조각 작품이 발견되지 않았다.

백제의 조각

백제의 첫 수도 서울 부근에서 두 번째 수도인 공주로 갈수록 산은 점점 올망졸망한 구릉에 가까워지고, 들은 차차 질펀하여지며, 이러한 산야를 관통하면서 흐르고 있는 강물은 더욱 유유하여진다. 공주를 지나 마지막 수도인 부여로 가다 보면 이러한 특징이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어쨌든 우리 국토의 서남부 지방은 서울에서 남으로 갈수록 점점 더 완만하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백제의 역사는 이 경로를 따라 전개되고 백제 조각 또한 이 길을 따라 변천되고 있다.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서울 지역인 한산(漢山) 시절이었다. 즉,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 동진(東晉)을 거쳐 온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하여서 공식적으로 불교가 수용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385년에는 한산에 절을 짓고 10명의 승려를 배출하였다.

마라난타는 다른 전도(傳道) 승려의 예에 따라 불상과 불경을 가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385년에 절을 짓고 불상을 본격적으로 봉안, 예배하였다면 다분히 백제의 불상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만약 당시의 불상이 국산제였다면 백제 조각의 시원은 385년경부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정복 국가의 완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정복 국가를 완성한 확고한 때는 근초고왕 때이었다고 생각되지만 그 다음 왕인 근구수왕을 지나면서 정복 국가를 움직일 원리나 고도한 문화가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어쨌든 백제의 불교 수용 당시인 400년 전후에 국산제 불상을 조성하였다면 어떤 불상이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역시 뚝섬불좌상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흔히 뚝섬불상을 중국제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 불상이 발견된 뚝섬은 400년경 전후 광개토대왕이 백제로부터 한강 이북을 빼앗았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뚝섬이 국경선 근처이므로 이 불상의 귀속 국가 문제는 잘 알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중국제인지 고구려제 또는 백제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더라도, 당시 수입 불상의 주류이던 중국 불상과 동일한 양식인 뚝섬불상 양식이 지배적인 양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양식은 정신성이 강하게 작용한 역강한 아름다움이 표현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475년(개로왕 21년)에 고구려에게 수도 한산(漢山)을 빼앗긴 채 웅진(熊津 : 지금의 공주)으로 쫓겨 내려가 나라의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였다. 그러나 동성왕·무령왕을 지나면서 안정과 중흥의 시대가 되었으니 바로 공주 시대이다. 공주의 천도로 안정을 되찾은 백제는 63년만인 538년(성왕 16년)에 다시 비약적인 국력을 배양하고자 사비(泗沘 : 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였다.

이 사비시대는 가장 불교가 융성한 시대로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불교 문화의 융성과 불상 조각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 예는 보원사지금동불입상·정림사불상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시대의 양식적 특징은 우아하고 세련된 귀족적 취향의 양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로 내치에 힘을 쏟던 위덕왕 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사회 안정을 바탕으로 한 불교 문화의 융성으로 불상들도 대량 조성된다. 군수리불보살상·신리보살상·서산마애불 등이 대표작으로 중국 북제·북주 내지 수나라 초기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보다 백제화되고 보다 조소성이 풍부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백제 불상 양식의 절정이자 마지막을 장식한 시대로 중국의 수나라 내지 초기 당나라 양식의 영향도 받았다. 그러므로 익산연동리불상·부여규암금동보살입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다소 감각적이며 사실적인 아름다움도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백제 조각 양식은 백제 멸망 이후에도 이 지역에 계속 전승되고 있어서 우리 나라 조각사에 큰 의의를 지닌다.

고신라의 조각

신라는 여러 사정으로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하였다. 물론 눌지왕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가 소지왕 때의 탄압으로 일거에 소멸되었던 것이 527년(법흥왕 14년)에 정식으로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공인으로 불교는 급속히 신라 사회에 전파되었다. 불교가 급속하게 팽창하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불상 조각을 대대적으로 조성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신라의 불상 조각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게 조성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고구려나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고구려 양식의 불상 내지 백제 양식에 가까운 불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10∼20년 뒤에는 신라 자체의 작품을 일본에 수출할 만큼 격조 높은 신라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후 신라의 조각 수준은 급속히 신장하여서 600년 전후부터는 고구려나 백제를 한 걸음 앞질러 간 느낌이 짙다. 이러한 신라의 불상 조각은 대개 3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불교 공인 직후인 527년부터 6세기 중엽까지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당시의 고구려나 백제 조각과 마찬가지로 중국 북위 양식을 받아 조성된 매우 역강한 추상 조각 양식의 불상이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 시기 불상의 대표작은 535년에 착공되어 544년(진흥왕 4년)에 완성을 본 흥륜사(興輪寺)의 불상들이다. 흥륜사불상은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그 잔영은 황룡사(皇龍寺) 출토 금동불입상에서 얼마간 찾아볼 수 있다.

6세기 중엽부터 말까지인데 진흥왕의 패기 찬 활동 시기로 불교의 성세(盛勢)와 함께 불상 조각은 이제 완전히 신라화되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574년에 황룡사의 거대한 장륙상(丈六像)을 일거에 주조(鑄造)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나 579년(진평왕 1년)에 왜국(倭國)에 불상을 보냈다는 데서도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각의 특징은 초기에는 중국 동위·서위 양식의 영향을 받아 역강한 추상 조각을 다소 완화시켜 세련되고 귀족적인 이상주의적 불상 양식을 만들어내다가, 후기에는 북제·북주의 영향도 있고 하여 추상 표현주의 작품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당대의 대표적인 걸작품은 금동장륙존상(金銅丈六尊像)이지만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고 후기 작품으로 거창 출토 금동보살입상 등이 있다.

7세기 전반기의 이 시기는 삼국간의 소규모 전투가 계속된 삼국 통일의 전 단계로서 복잡다단한 시기이다. 하지만 선덕여왕 치세 기간의 활발한 조형 활동으로 걸작의 불상 조각이 많이 조성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초기에는 중국 북제·북주 내지 수나라 초의 영향을 받은 추상 표현주의적 작품이 유행하다가, 후기에는 중국 수나라 말 내지 당나라 초기의 영향을 받은 반사실 양식(半寫實樣式)의 불상이 유행한 것이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선방사삼존불상(禪房寺三尊佛像)인 이른바 삼체석불(三體石佛)과 삼화령미륵세존(三花嶺彌勒世尊) 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중대신라

5.1.1. 새로운 조각 양식의 대두

통일신라시대는 조각사에 있어서 중기 신라와 말기 신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중기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부터 혜공왕 때까지인 신라의 최극성기를 말하고 있다. 조각도 이 시기에 가장 발달하게 되지만 조각 양식은 좀더 세분하여 제1기와 제2기로 나눌 수 있다.

중기 신라 제1기 양식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자 적극 공세를 펴기 시작하는 650년경부터 삼국통일이 완전히 성취된 때인 700년경까지의 약 반세기 동안의 조각 양식을 말한다. 이 시기의 조각은 아마도 태종무열왕의 적극적인 친당 정책(親唐政策)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무열왕은 왕이 되기 이전인 648년 당나라에 가서 원병을 청하였다.

653년에 왕위에 오르고 난 뒤부터는 보다 적극적으로 당나라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여 결국 당나라의 원병에 힘입어 660년에는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던 당나라군을 무력으로 몰아내는 데에도 성공하여 676년에는 명실상부하게 신라 통일 제국을 수립하게 된다. 이 통일 전쟁 기간 중 당나라와의 긴밀한 관계에 따라 공식 사절이나 의상(義湘) 등 유학 승려들의 귀국과 함께 당나라 양식의 불상들을 활발히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중국 당나라 조각 양식은 인도 굽타(Gupta) 및 성당(盛唐)의 사실주의 양식을 받아들여 신라에서도 새로운 양식의 조각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사실주의는 불상이나 기타 불상을 인체나 그 대상 자체와 비슷한 형상으로 만들고, 그래서 보다 세련되고 능숙하면서도 육감적이기까지 한 양식이다.

이러한 양식은 중기 신라를 연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龜趺)나 이수(螭首)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김유신묘(金庾信墓)의 12지상(十二支像)이나 감은사사리기(感恩寺舍利器)의 사천왕상(四天王像), 사천왕사(四天王寺)의 소조신장상(塑造神將像),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상(金銅三尊像) 등 일련의 조각 양식에 잘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진보적 조각 양식은 경주 지방의 궁정 조각(宮廷彫刻)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사실주의 계열 조각이 대두되고 있었지만,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에 의하여서 그들의 옛 양식이 재생되기도 하고 또한 신라의 보수주의적 조각가들에 의하여 전 시대(前時代)의 추상 표현주의 특징이 짙게 남아 있는 작품들도 계속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소 새로운 사실주의 양식을 받아들인 절충 양식의 작품들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조각들은 경주보다는 지방에서 우세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영주가흥리마애불(榮州可興里磨崖佛)·봉화북지리마애불(奉化北枝里磨崖佛)·경주선도산마애불(慶州仙桃山磨崖佛)은 보수적 조각의 대표적인 작품의 예이며, 군위삼존불(軍威三尊佛)은 절충 양식의 대표작이고, 연기(燕岐) 비상 계열(碑像系列)은 백제 양식의 재생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진보적 사실주의 조각이 대두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보수적 추상 표현주의 작품들도 잔존하고 있고 이 두 양식의 절충 양식도 만들어지는 등 복잡한 조각 경향들이 혼재하고 있다. 그러나 대세는 진보적 사실주의 양식이 점차 확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700년경부터는 사실주의 조각이 완전히 정착되는 것으로 귀착을 보게 된다.

이 시기는 이렇게 다양한 양식의 혼재와 더불어 새로운 조각 양식의 완성을 지향한 특징 있는 시대이다. 당대의 조각가로 명성을 떨친 명장(名匠)은 양지(良志)였고, 그의 기량과 같이 당대에서는 흙으로 만든 소작(塑作)들이 즐겨 만들어진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닌가 한다.

5.1.2. 사실 조각의 극치

중기 신라 제2기는 신라의 황금기로 대체로 8세기인 성덕왕대부터 혜공왕대까지로 잡고 있으며, 그 절정기는 경덕왕대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통일 사업이 일단락되어 영토가 안정되었고 왕권이 확고하여져 전제 왕권이 확립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국력이 크게 신장되어 당당한 국제적인 왕족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 문화는 당나라의 국제적인 화려한 문화와 서역 내지 인도의 찬란한 문화, 멀리 페르시아 같은 서방의 호화로운 문화 등도 수용하여 국제적인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당시 신라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불교였기 때문에 이 극성기의 문화는 본질적으로는 불교 문화이다. 당시의 불교는 종파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즉,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신인종(神印宗)·계율종(戒律宗) 같은 여러 종파가 제각기 그 번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들 종파는 불교 가운데 특정한 하나의 경전이나 이론을 중심으로 삼아 다른 경전이나 이론을 포섭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당시 전제 왕권의 성격과 일치하여 더욱 번성하게 된다. 이들 종파는 서로 다른 성격의 불교 이론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배하는 부처는 제각기 달랐다.

가령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이나 아미타불을 숭상, 예배하는가 하면, 법상종에서는 미륵존상과 아미타상 등을 예배하는 등 주존불이 각기 달랐으며, 시대에 따라서도 이들 종파는 그 주존불을 달리 봉안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각 종파에서는 서로 다른 주존불상을 다투어 조성함으로써 불교 조각은 더욱 그 번성을 자랑하게 된다.

당대의 수많은 불상들은 모두 인체의 형태로 이상화시킨 사실주의적 불상을 조성하였다. 세련된 터치, 정치한 기법, 부풀고 탄력적인 부피감, 긴장된 선 등의 사실주의적 작풍이며, 심지어 육체적인 굴곡을 그대로 묘사한 일종의 육감주의 또는 관능주의적인 묘사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보살상이나 천인상(天人像)에 가장 잘 포현되고 있다. 가령 중국의 경우 보살상이나 천인상은 당대의 최고 미희들인 기생들을 모델로 제작하여 시비가 일어났던 예도 있다시피 육체미를 자랑하는 여성적인 매력까지도 표현하고자 하였다고 생각된다.

하여튼 이러한 사실주의 양식은 성당 양식(盛唐樣式)과 인도 굽타 양식을 기반으로 하여 보다 신라화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는 당대의 조각들이 우리 나라 역사상 최고의 걸작들로서 감산사(甘山寺)·굴불사(掘佛寺)·칠불암(七佛庵)·용장사(茸長寺)·석굴암의 불상 등 훌륭한 걸작들이 많았다.

하대신라

5.2.1. 제1기

776년에서 850년경까지로 잡을 수 있는데 통일신라는 경덕왕을 고비로 이른바 중기 신라는 사라지고, 말기 신라가 등장하게 된다. 즉, 말기 신라의 시작은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이 776년에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김양상은 결국 780년 왕위에 즉위하여 선덕왕이 되고,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한 김경신(金敬信)이 원성왕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말기 신라가 시작된다.

이들 말기의 왕들은 태종무열왕계가 아니라 내물왕계로서 율령 체제(律令體制)에 의한 중기의 왕권 강화에 대한 반대파들의 연합 세력에 의하여 추대된 왕들인 것이다. 800년경을 전후하여서부터는 다소 안정되었던 사회가 중앙 귀족은 중앙 귀족끼리 지방 호족은 그들끼리 서로 쟁투하며, 때로는 강성한 중앙 귀족이나 지방 귀족들이 왕권에 도전하여 이를 탈취하는 등 신라는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갔다.

이 시대 조각 작품들로서 연대가 명확한 작품들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방어산마애불(防禦山磨崖佛)·김유신묘12지상(778년)·인양사비상(仁陽寺碑像, 810년) 등의 예에서 보면, 전대의 신라 황금기의 불상 양식인 이상화된 사실주의 양식이 일면 상당히 남아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경향인 현실적인 또는 도식적인 작품 경향도 새롭게 대두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5.2.2. 제2기

이 시기는 850년경부터 900년경까지의 약 50년간을 말한다. 초기에는 4년 동안(836∼840년) 4명의 왕이 교체되던 극도의 혼란이 중앙과 지방 귀족들 사이에 일시적인 휴전이 이루어져 일단 안정을 찾게 된다. 이와 함께 842년 중국 당나라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을 전후하여 대거 귀국한 선종(禪宗) 승려들의 활약과 함께 선종이 일세를 풍미하고, 이 선종은 이 시대를 주도하는 세력인 지방 호족과 연합하여 신라 문화를 이끌어갔다.

당시의 선종은 기본적으로 화엄종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봉안하였다. 따라서 당대 불상의 주류는 일단 비로자나불이 차지하게 되고, 현재도 비로자나불들이 현저하게 많이 남아 있다. 이와 더불어 화엄종도 또한 유행하여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이 당대 불상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이들 불상과 함께 쌍벽을 이룬 당대 미술의 현저한 특징은 선종 조사(禪宗祖師)들의 잇따른 입적(入寂)에 따라 크게 조성된 승려의 묘탑(墓塔)으로 이른바 부도(浮屠)이다. 이러한 불상들은 당대 선사들을 모델로 조성하였던 듯 이상적인 면은 후퇴하고 현실적인 특징이 강한 사실주의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조각에는 장식성·섬세함 그리고 말기에는 일종의 추상성도 가미되는 특징으로 중기의 신라 불상들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고려시대의 조각

고려 조각은 크게 전기와 후기 양식으로 나눌 수 있다. 무신란(1170년)을 전후로 크게 나눌 수 있고, 두 시기도 각각 2기씩 나눌 수 있다. 고려 태조가 궁예(弓裔)의 후고구려를 없애고 새로운 고려 왕국을 건국한 해가 918년이고,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 936년이다. 그러나 고려가 고려적인 성격을 세운 것은 광종 때라고 할 수 있다.

고려는 지방의 세력가들인 호족들의 연합에 의하여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고, 이러한 상태는 광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면서 중앙 집권화를 강력히 추진하던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왕인 성종 때에는 이러한 중앙 집권화가 완전히 성취되었고, 이때부터 고려에는 본격적인 관료적 귀족 사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관료적 귀족사회는 여기에 알맞은 귀족 문화를 창조하기 마련이다.

유교에 의하여 현실적 정치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한문학 같은 유교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문화를 포괄하면서 보다 심오한 정신 문화인 불교 문화를 발달시켰다. 우리 역사상 불교에 의하여서 나라가 세워지고 이러한 전통이 끝까지 지켜진 유일한 나라는 고려뿐이다. 말하자면 고려는 철두철미한 불교 국가였다. 당시의 불교는 초기에는 교종과 선종이 백중세를 이루었지만 점차 귀족 사회에 알맞은 교종이 대세를 잡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화엄종과 천태종(天台宗)·법상종 등이 극성하였다.

이 시기의 조각 양식은 다양하지만 크게 두 양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양식은 신라의 고전 양식 전통을 이어받아 사실적이면서 이상적인 특징이 표현된 광주철불상·한송사보살상 등이다. 둘째 양식은 거대하면서 다소 도식적인 추상성이 강조된 관촉사보살상·미륵당석불상 등이 있다.

오랜 귀족 사회의 지속은 여러 가지 폐단을 몰고 왔다. 문벌 귀족들의 지나친 세력 팽창과 광대한 토지의 겸병(兼幷)으로 인한 경제 구조의 파탄 등으로 고려 사회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 가운데 무신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의 격하가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1170년에는 결국 이러한 모순이 무신란이라는 혁명을 초래하였다. 힘이 사회의 척도였던 당대 사회에서 무신들은 전대(前代)보다 더 막대한 장원(莊園)을 소유하는 노골적인 문벌 사회가 전개된다.

이 무인 시대의 사상은 전대의 교종에 대신하여 선종이 대세를 잡는다.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조계종(曹溪宗)이 득세하게 된다. 몽고의 침입에 항거하여 오랜 세월 동안 투쟁하던 고려는 1270년부터 몽고의 속국화로 전락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원나라의 영향이 대단히 컸다.

원나라의 선종인 임제종(臨濟宗)의 유행과 함께 신유학(新儒學)인 성리학이 서서히 대두하기 시작하여 사회의 엘리트로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이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 신진 사대부 계층의 득세로 마침내 고려는 망하고, 조선 왕조가 개창되었다.

이러한 불교 국가 시대였던 고려에는 수많은 사원이 건립되었고, 여기에는 질과 양 모든 면에서 뛰어난 불상들이 조성되어 고려시대 역시 조각계는 불상이 주종을 이룬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시기의 양식은 몽고의 영향이 강하여진 1276년을 전후로 나눌 수 있지만, 현재는 뒷시대의 불상들만 남아 있기 때문에 우선 이 시대 양식을 고려 후기 양식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 시대의 주류적인 양식은 봉림사불상·문수사불상·장곡사불상 등에서 보이듯이 단아하고 귀족적인 특징이 표현된 이른바 단아한 신사실적 양식이다. 이와 함께 원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금강산 출토 금동보살상계통도 약간 보이며, 전대의 추상적 특징의 전통이 계승된 석불상들도 보이고 있어서 다양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의 조각

조선 태조가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이라는 쿠데타를 기점으로 마침내 1392년에 고려를 없애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의 성립에는 이처럼 군사적인 쿠데타가 크게 작용하였지만, 그러나 군사력만으로 나라가 쉽게 교체되는 것이 아닌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보다 새로운 왕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조직적인 세력이 무엇보다도 필수적인 일이다. 이 조직이 말하자면 신유교인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대부 계층인 것이다.

이 사대부 계층이 조선사회의 사상·정치·경제·문화를 움직여 나간 주역들이 되었다. 이들을 흔히 양반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이상이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 등의 관리로 등용되어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계층을 양반 사대부라 한다.

양반 사대부 사회에는 여기에 알맞은 문화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성리학적인 유교 문화였으니 전 시대의 불교 문화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덕치 국가라는 이상 사회의 실현을 지상의 목표로 삼은 조선은 문화 면에서 이 점을 여실히 반영하였으니, 문인화(文人畫)나 화원화(畫院畫) 등 회화에서나 양반 사회의 지주인 제사용(祭祀用)의 도자 공예·문방사우 등 목공예 등의 미술에서 소박과 생략, 절제와 이상의 미를 실현시킨 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세종·세조·중종 때의 왕실이나 사대부들의 개인적인 신앙과 대다수 민중들의 열렬한 믿음에 힘입어 한정된 사원에서나마 불사(佛事)들이 때때로 이루어져 불상 조각이 다소 유행하였던 점은 조선 조각사의 광명이었다. 여기에 역대 왕릉 내지 사대부 분묘의 무덤 조각들도 당대 조각계의 중요한 구심점이 되기도 하였다.

양반 사대부 사회의 지나친 문치주의로 결국 1592년의 임진왜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 같은 대대적인 침략을 당하였다. 이러한 격전을 겪으면서 현실 사회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움터 실학이 성행하게 된다. 말하자면 정치·경제·사상 등 조선 사회의 모든 면에서 실용적인 면을 중시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가 조선 후기 사회의 전개이다. 더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발언권이 신장된 불교계에는 사회가 안정된 숙종에서 영조·정조시대의 문예 부흥기 때부터 불사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전쟁에 의하여서 파괴된 절들의 대대적인 중수와 억불 정책 때문에 폐사된 절들의 복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불상·불화(佛畫)의 조성이 일대 붐을 일으켰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각 사원들의 수많은 불상 조각들은 모두 이 문예 부흥기 때 조성된 것들이다.

조선시대의 조각은 크게 전기와 후기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전기는 1392년부터 1591년까지로, 이 시기는 앞 시대인 고려 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 아울러 명나라 양식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불교의 억압으로 조상 활동은 그렇게 활발하지 못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 역시 15세기 중엽까지 고려 후기 양식이 거의 그대로 계승된 전기와 그 이후 조선 조각이 정립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장육사보살상은 전자에 속하며, 강진 무위사(無爲寺)불상, 양수리 수종사(水鐘寺)불상 등은 조선 양식으로 정립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기림사건칠보살상(祗林寺乾漆菩薩像)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후기는 1592년부터 1910년까지로 역시 앞 시대 양식 또는 다소간 청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각 활동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물론 이 시기도 1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부여 무량사(無量寺) 불상, 예천 용문사(龍門寺) 불상 등이 그 대표작이다. 앞 시대부터 나타나던 평판적이고 도식적인 특징도 나타나지만 아직도 불(佛)의 이상성이 꽤 나타나고 있는 편이다.

안양 삼막사(三幕寺) 마애불상을 비롯하여 법주사불상·통도사불상·운문사불상 등 수많은 조선 후기 불상들의 예에서 보이듯이 평판적인 특징이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대의 목조 불상은 조선적인 투박성이 묘사되어 우리의 정감을 크게 자극하고 있다.

근대·현대의 조각

불교 미술의 불상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까지의 한국 조각 예술의 전통적인 흐름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시대적 양상을 보게 되었다. 19세기 말엽의 개화기 이후 급속히 이루어진 서양 문화의 폭넓은 수용과 그 정착의 일환으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주의 형식의 양풍 조각이 1920년대 이후 양화와 더불어 신미술로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 여러 형태의 전통 조각은 신문화의 위세에 눌리며 위축과 단절을 나타냈다.

새로운 시대적 양상으로 서양의 사실주의 기법을 본받은 순수한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조각 예술 형식을 한국에 정착시킨 선구자는 1925년에 일본의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국내 최초의 양풍 조각가로 활약한 김복진(金復鎭)이었다. 그는 당시 유일한 조각 작품 발표장이던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 여인상·나부상 등을 출품하면서 각광을 받는 한편, 후배 양성과 사회의 인식 계도에도 많이 공헌하였다.

1925년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한 자각상(自刻像)인 <3년 전>과 다른 입선작 <나체 습작>이 사회적으로 처음 공개 접촉된 한인 조각가의 신미술 조각 작품이었다. 이듬해부터는 서울에서 그의 지도를 받은 양희문(梁熙文)과 장기남(張基男) 등의 습작들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기 시작하면서 민족 사회에 근대적인 조각계가 형성되어 갔다.

김복진 등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일제의 식민지 상황이던 한반도에 진출하여 정착해 있던 소수의 일본인 조각가들의 조선미술전람회 참가 등의 활동이 선행되었고 조각 학도들도 있었다.

김복진은 미술학교를 졸업한 직후 서울의 YMCA에 신설되었던 미술과에 나가 신미술 조각에 관심을 보인 학도들을 지도하였다. 국내에 전문 과정이나 대학 과정의 미술 학교가 없었던 당시 실정에서 새로운 조각 예술을 뜻하려면 양화 분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미술 학교에 유학하거나 김복진 같은 선구자에게 개인적으로 사사 또는 독학하는 길을 택해야 하였다.

그렇게 태동되던 조각계의 형성은 그 구심점이던 김복진이 민족적인 의식으로 조선공산당에 가담하였다가 1928년에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33년 말까지 약 5년간 감옥에 갇히게 됨에 따라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931년과 1932년에는 평양 태생의 김두일(金斗一)과 문석오(文錫五)가 김복진의 후배로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비롯한 제작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서울과 평양 중심의 조각계 형성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수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김복진은 1935년부터 서울에서 이념적 경향색은 없이 순수하게 정력적인 조각가 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뒤에 가서 일본의 여러 미술 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 윤효중(尹孝重)·이국전(李國銓)·이성화(李聖華) 등을 제자로 삼아 키우기도 하며 조각계 발전에 거듭 기여하다가 1940년에 40세로 죽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해서는 윤승욱(尹承旭)·김경승(金景承)·김종영(金鍾瑛)·조규봉(曹圭奉)·김정수(金丁秀) 등이 일본의 미술 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한 신진 조각가로서 잇따라 부각되면서 그간의 조각계 기반을 가일층 확고히 하게 되었다. 그 무렵까지 그들의 작품형태는 해마다 간행된 ≪조선미술전람회도록≫의 조각부 도판들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명료하게 확인된다.

거의가 사실주의 경향이었고, 주제는 대체로 소녀의 얼굴 또는 소년상·여인상·나부상·초상 등이었고, 재료는 석고를 이용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목조(木彫)와 청동상도 더러 있었다. 석고 재료의 조소는 보존에 약하고 한계가 있는 것이어서 광복 이전에 조선미술전람회 등에 출품되었던 김복진을 비롯한 한국 근대 조각 개척자들의 석고 재료 작품들은 거의 보존되지 못하였다.

김복진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던 <나부>(1937년)·<백화 白花>(여인상, 1938년)·<소년>(1940년) 등은 6·25 전쟁 중에 파괴되어 버렸다. 오늘날까지 기적적으로 보존되고 있는 1940년대 이전의 석고 재료 작품은 윤승욱의 <피리부는 소녀>(1941년)와 김경승의 <소년 입상>(1942년) 정도이다. 이 두 석고상은 1971∼1973년 사이에 청동으로 주조되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극히 드물게 앞 시기의 원작(原作)이 잘 보존되고 있는 예로는 윤효중의 목조 작품 <아침>(물동이를 인 한복의 여인상, 1940, 개인 소장)과 <현명 弦鳴>(활을 쏘는 한복의 여인상, 1944,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다. 앞에 언급한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중심의 작품 내막과는 달리 사회적인 요청을 받아 청동으로 제작되었던 특정 인물의 사실적인 흉상 또는 전신상의 사례도 적지 않게 있었다.

동상 조각의 시초적인 사례는 김복진이 1935년부터 계속 요청을 받아 제작하게 되었던 <최송설당여사상 崔松雪堂女士像>과 <정봉현선생상 鄭鳳鉉先生像>을 비롯한 전국 10여 곳의 기념 동상, 그리고 문석오가 제작한 <백선행여사상 白善行女士像>(1932년)과 <김기중선생상 金棋中先生像>(1934년) 등이었다. 그러나 초창기의 그 동상 조각들은 태평양 전쟁 때 일제에게 모두 강제 탈취되어 전쟁 수행의 무기 소용으로 용해되는 참변을 당하였다.

1945년의 광복과 더불어 비로소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그리고 홍익대학교에 미술전공 학부가 생기게 되면서 그 과정을 졸업한 신진 조각가의 배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윤승욱과 김종영이 교수가 되어 지도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는 1950년 이후 김세중(金世中)·백문기(白文基)·김영학(金永學)·전상범(田相範)·강태성(姜泰成)·최의순(崔義淳)·최만린(崔滿麟)·최종태(崔鍾泰) 등을 배출하였다.

윤효중과 김경승이 지도한 홍익대학에서는 최초의 여성 조각가인 김정숙(金貞淑)·윤영자(尹英子)를 비롯하여 김영중(金泳仲)·전뇌진(田礌鎭)·민복진(閔福鎭)·김찬식(金燦植)·최기원(崔起源) 등이 배출되어 조각계의 기반을 급속히 확대시켜 갔다.

그 시기에 윤효중은 특히 1951년 유네스코국제예술가회의에 참가하면서 이탈리아에서 만났던 세계적인 조각가 마리니 등의 감화를 반영한 역동적이며 상징적인 형상의 <납치>(1953년)·<피리>(1954년)·<풍신 風神>(1955년) 등을 국전에 발표하여 새로운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1950년대의 윤효중의 역작들은 재료가 석고였던 탓에 제대로 간수되지 못하고 여러 원인으로 거의 파괴되어 없어졌다.

반면, 김종영은 1958년부터 구미의 새로운 조형 미학을 수용하려고 한 순수 형상의 철조·목조를 지향하며 추상주의 조각 개척에 기여한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젊은 조각가들 사이에 국제적인 경향의 추상주의와 현대적 형식의 구상 추구가 전향적인 창조성을 나타내면서 한국 현대 조각의 다양한 성립을 보게 하였다.

앞에 열거한 새 세대 외에 권진규(權鎭圭)는 일본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1959년에 귀국하여 그때까지 국내에서는 정상적 정착이 이루어져 있지 않던 테라코타 소조의 특출한 작품 활동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본래 양화가로 1980년까지 두 번에 걸쳐 약 15년간 파리에서 제작 생활을 보낸 문신(文信)은 조각에 더욱 전념하여 국제적인 성가의 특이한 생물적인 조형 세계를 실현시켰다.

한편, 앞에서 언급하지 못한 광복 후 북한의 조각 양상을 부언하면, 조규봉과 김정수가 1947년에 월북하여 평양미술학교 조각과 교원이 된 뒤로 본래 평양에서 활약하던 문석오와 더불어 공산주의 체제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일변도로 북한의 현대 조각계 형성에 역할하였다. 6·25 전쟁 때에는 이국전 등이 북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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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각도의 방향」(김부진, 『동아일보』, 1940)
「한국조각의 근대적 과정」(이경성, 『홍대논총』 2,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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