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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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재료 · 토목재료 · 물 또는 조형물을 이용하여 쾌적한 생활공간을 조성하는 기술.
내용 요약

조경은 식물재료·토목재료·물 또는 조형물을 이용하여 쾌적한 생활공간을 조성하는 기술이다. 조경으로 이루어진 4차원적인 공간을 경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4세기 말부터 조경문화가 발달했다. 고려 시대는 궁궐 안이나 지방의 산수경관이 수려한 곳에 정자를 짓고 노는 일이 많았던 정자문화의 전성시대이다. 조선 시대에는 직선적인 못과 계단식 후원을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조경문화가 탄생했다. 21세기의 조경공간은 쉬고 즐기는 생활공간임과 동시에 과학과 자연히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생각하는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차
정의
식물재료 · 토목재료 · 물 또는 조형물을 이용하여 쾌적한 생활공간을 조성하는 기술.
내용

이러한 기법에 의해 이루어진 4차원적인 공간을 경원(景園)이라고 한다. 정원(庭園)이라는 일본식 용어는 담으로 둘러싸인 주거의 뜰에 이루어진 조경공간을 일컫는 말로, 포괄적인 뜻을 지닌 ‘경원’의 한 부분이다. 한편, 자연 속에 꾸민 경원은 원림(苑林)이라고 부른다. 특정한 조경문화의 발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자연환경과 신앙 또는 종교, 민족성, 그리고 시대적인 사조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조경문화가 처음으로 싹텄던 이집트는 강수량이 연간 50㎜에도 이르지 못하는 사막국가로서 식물이 자연스럽게 싹트고 자라기에는 힘이 들어 숲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 가운데 하나는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쉬며 넘치는 맑은 물에 손과 발을 담가 보는 것이었다.

그러한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나일강가에 집터를 잡고, 뜰에 못을 파고 물고기를 길렀으며, 녹음수를 심어 그늘 아래에서 쉬었다. 조경식물은 될 수 있으면 보기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열리는 것을 골랐다.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1,500여 년의 일이다.

여름철에 비가 거의 내리지 않으며 대부분 사막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이나 아라비아지방도 풍성한 나무숲을 이룰 수 없으며 식량 생산이 어려워 살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었다. 이러한 지방에서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나타난 종교가 기독교와 회교였으며, 이들 종교가 약속하고 있는 천국이 바로 나무숲이 우거지고 온갖 꽃이 만발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다. 그 천국을 현실화한 것이 기독교의 수도원에 꾸며진 클로이스터(cloister)이며, 회교 사원에 꾸며진 파티오(patio)로 모두 물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동양에서 중국의 경우는 고대국가의 수도권이 형성된 황하 상류지방에서 조경문화가 싹텄는데, 이 지방은 고원지대이고 자연경관이 빈약하며 농업생산 기반이 열악하여 인간의 생활환경으로는 적당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지방에서 나타난 신앙이 불로장생을 약속한다는 신선사상이었으며, 그것을 현실화한 것이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경원으로, 못 안에 방장(方丈) · 봉래(蓬萊) · 영주(瀛州) 등 선산(仙山)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으며, 못가에는 불로장생한다는 고래와 거북의 상을 배치하였다. 또, 남쪽지방에 있는 수려한 산이나 호수를 모방한 경원을 꾸미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이 깊고 강수량이 많아 식물이 무성하며, 자연경관이 수려하기 때문에 특별히 조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정학적인 조건 때문에 중국 조경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신선사상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배경으로 송나라의 성리학자인 주1가 설파한 주2이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정원문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조경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록에서 볼 때 백제의 조경문화는 4세기 말로 올라가지만 보다 구체적인 기록은 사비시대인 제30대 634년(무왕 35)에서 볼 수 있다. 즉, 무왕은 궁궐 남쪽에 네모난 ‘궁남지(宮南池)’라는 못을 파고 주3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으며,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바로 직선을 도입한,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조경양식이다. 부여에 있는 백제시대 정림사(定林寺)터에서도 직선적인 쌍지(雙池)가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는 427년(장수왕 15)부터 평양의 대성산성 시대에 만든 듯한 진주지(眞珠池)라는 못이 평안남도 중화군에 있었는데, 한 변이 약 100m 되는 네모의 못 안에 네 개의 섬이 만들어져 있었다. 형태로 볼 때 부여에 있는 궁남지와 비슷하다. 이 진주지는 동명왕릉 서쪽 400m 되는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동명왕릉과 서로 관계가 있는 듯하다.

한편, 500년대에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안학궁(安鶴宮)의 남궁 서쪽에는 자연스러운 못과 축산으로 이루어진 경원이 만들어져 있다. 3개의 섬이 있고, 못의 윤곽선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며, 바닷가의 풍경을 본떠 만든 경원인 듯하다.

통일신라시대인 600년대에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 경주의 임해전 월지원(月池苑)은 못의 윤곽선과 축산이 자연스러우며, 더구나 3개의 섬이 있다는 면에서 안학궁 남궁원(南宮苑)과는 형태적인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이들 경원은 윤곽선을 처리하는 데 자연 곡선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직선을 쓰고 있는 백제의 못이나 고구려의 진주지와는 특징을 달리하고 있다.

한편, 경주지방의 남산 기슭에는 800년대에 만든 포석정터가 있다. 이곳에는 술잔을 띄우며 시를 읊고 놀기 위한 곡수도랑〔曲水渠〕이 만들어져 있다. 동진(東晋)의 주4가 353년 3월 3일 난정(蘭亭)에서 친지들과 함께 놀았던 곡수놀이를 모방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는 중국의 조경기법을 모방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도 중국의 송나라와 원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시대지만,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관련된 문헌도 빈약하여 당시의 특징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국에서 진기한 애완동물이나 관상식물을 많이 들여왔으며, 괴석으로 주5을 꾸미는 일이 많았다는 기록에서 볼 때, 관상을 위한 조경이 이루어졌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궁궐에 마련된 대표적인 유락공간으로는 구령각(龜齡閣) 서지원(西池苑)을 들 수 있다. 구령각에서는 임금이 참석하여 문관과 무관의 선발시험을 치르고 활쏘는 것을 검열하며, 무사를 사열하는 공식적인 행사가 있었고, 술자리를 베풀고 시를 읊으며 놀기도 하였다. 못에서는 뱃놀이와 물놀이를 하였으며, 동산에는 학 · 거위 · 오리 · 산양 등을 길렀다. 그러나 경원의 구체적인 구성이나 못의 형태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아마도 백제의 망해루원(望海樓苑:궁남지)이나 신라의 임해전원(臨海殿苑)과 비슷한 기능을 갖는 경원으로 생각된다.

한편, 고려시대는 궁궐 안이나 지방의 산수경관이 수려한 곳에 정자를 짓고 노는 일이 많았던 정자문화의 전성시대이기도 하다.

(1) 궁궐의 조경

정궁인 경복궁은 평지에 터를 잡은 데 대하여 동궐인 창덕궁은 구릉지에 터를 잡고 있다. 경복궁에서의 대표적인 경원은 제3대 태종 때 창설한 경회루지원(慶會樓池園)이다. 널따란 큰 못을 파고 그 동쪽에 축조한 네모의 큰 섬에 정면 7칸, 측면 5칸에 이르는 경회루라는 건물을 세웠다.

또한 이 누 건물 서쪽에는 장방향의 조그마한 섬 2개를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소나무를 심었다. 못에는 부분적으로 연꽃을 심었지만 뱃놀이도 하였다. 누 건물은 잔치를 베풀고 놀거나 사방의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경회루지원은 직선적인 윤곽선 처리와 섬의 기하학적인 배치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창덕궁은 1404년(태종 4)에 창건되었지만 본격적인 조경은 1600년대와 1800년대에 이루어졌고, 큰 후원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옥류천(玉流川) 지역의 조경은 인조 때 이루어졌다. 옥류천 지역에는 다섯 채의 정자가 있다. 청의정이라는 모정은 네모의 못 안에 있는 네모의 섬에 세워졌으며, 낚시질을 하면서 즐기는 곳이다. 소요정은 큰 바위를 깎아서 만든 폭포를 바라다보며 즐기는 곳이며, 또 바위에는 술잔을 띄우며 노는 곡수도랑도 만들어졌다. 생수를 마실 수 있는 어정(御井)도 있다.

옥류천원(玉流川苑)은 깊은 자연의 숲 속에 있기 때문에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큰 후원의 궁궐 가까운 곳에 숙종정종대에 걸쳐 네모의 못을 중심으로 하는 경원을 이루었다. 못에는 연을 심었고, 둥근 섬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못의 동쪽 언덕에는 영화당(映花堂)이, 남쪽 못 가에는 다각형의 정자인 부용정(芙蓉亭)이 세워졌으며, 북쪽 언덕은 계단으로 처리하여 소나무와 단풍나무를 심었고, 정상에는 주합루(宙合樓)라고 하는 누정을 세웠다. 이 공간은 방지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이 구릉과 건축물로 둘러싸여 있어 오붓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1800년대에는 계단식 후원이 경복궁과 창덕궁에 만들어졌다. 경복궁의 교태전 후원은 일명 아미산이라고도 하는데, 인공적으로 축조한 계단식 화계(花階)에 관상식물을 심고 장식성의 굴뚝과 각종 석지(石池), 그리고 괴석을 배치하여 시각적인 쾌감을 주도록 하였다.

창덕궁에서는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 그리고 연경당(演慶堂)의 선향재(善香齋)에 각각 계단식 후원이 만들어졌는데, 정상에는 정자나 당을 세웠다. 이러한 계단식 후원에는 일반적으로 관상가치가 있는 식물을 심고 여러 가지 장식성의 첨경물(添景物)을 배치하고 있다.

(2) 민간의 조경

대표적인 경원으로는 전라남도 담양군에 있는 소쇄원(瀟灑園, 1500년대), 완도군의 보길도에 있는 부용동원림(芙蓉洞苑林, 1600년대), 화순군에 있는 임대정원림(臨對亭苑林, 1862), 그리고 서울의 삼청동에 있었던 옥호정원림(玉壺亭苑林, 1815)을 들 수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가 자연과 벗하며 숨어 살기 위하여 무등산 북쪽 기슭에 터를 잡고 꾸민 후원이다. 작은 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비탈면을 몇 개의 단으로 만들고, 여기에 애양단(愛陽壇) · 대봉대(待鳳臺) · 매대(梅臺) · 도오(桃塢) 등의 구역을 두어 각기 적절한 조경을 하였다. 이곳에는 건축물로 제월당 · 광풍각 · 초정 등이 있으며, 방지(方池) · 물레방아 · 석가산 등의 시설물도 배치하였다.

골짜기의 물은 담장 아래에 뚫린 구멍을 통해 들어와 암반 위를 갈지자〔之字〕 모양으로 굽이치다가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광풍각 앞을 지나 흘러간다. 조경식물로는 소나무 · 측백나무 · 대나무 · 단풍나무 · 벽오동나무 · 매화나무 · 살구나무 · 배롱나무 · 국화 등을 심었다. 이 경원은 신선사상과 유교사상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부용동원림은 윤선도(尹善道)병자호란 후에 은거하기 위해 꾸민 것으로, 원시림을 개척하여 자연 속에 정자를 짓고 못을 만들었으며 화계를 축조하고, 첨경시설로 석가산과 인공폭포인 비래폭(飛來瀑)을 만들었으며, 휴식을 위하여 돌정자〔石亭〕를 세웠다. 특히, 세연정(洗然亭) 지역에서는 네모의 못 안에 네모의 섬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은 것이 각별히 주목된다.

임대정원림은 1862년(철종 13) 민주현(閔胄顯)이 꾸민 것으로, 구릉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언덕 위에는 임대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주변에 못을 만들어 소나무 · 대나무 · 측백나무 · 갈참나무 · 은행나무 · 매화나무 · 살구나무 · 단풍나무 등을 심었다. 언덕 아래는 지형에 따라 ‘ㄱ’ 자형으로 상지(上池) · 하지(下池)를 만들고, 섬에는 괴석을 배치하고 배롱나무를 심었으며, 못에는 흰 연꽃과 붉은 연꽃을 심었다.

정자의 명칭이나 못의 명칭〔挹凊塘 · 披香池〕, 그리고 연꽃 등에서 송나라의 유학자인 주돈이의 유학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임대정의 ‘임대’는 주돈이가 읊은 시구 “아침 내내 물가에 서서 여산을 바라본다(終朝臨水對廬山).”에서, 파향지의 향(香)과 읍청당의 청(淸)은 애련설에 나오는 “연꽃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은 향기를 전한다〔香遠益淸〕.”에서 딴 것이다.

옥호정은 김조순(金祖淳)의 별장이다. 비탈면을 몇 개의 계단으로 처리하고, 주거와 휴식을 위한 각종 건축물을 지었다. 주위에는 수반과 화분과 괴석을 배치했으며 갖가지 조경식물을 심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직선적인 못과 계단식 후원을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조경문화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신선사상과 도의를 존중하는 유교사상을 조경의 바탕으로 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일본 문화가 침투하면서 전통문화가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새로 나타난 것은 공원문화와 서양식 조경문화였다.

공원은 대부분 서울에 창설된 것으로, 탑골공원(1897) · 장충단공원(1934) · 효창공원(1924) · 삼청공원(1934) · 남산공원(1930년대) 등이다. 지방에는 1940년대에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의 나환자촌에 만든 중앙공원이 있는데, 조경기법은 일본색이 짙다.

서양식 조경은 1906년에 덕수궁의 석조전 앞에 만든 침상경원(沈床景園)에서 볼 수 있다. 공간을 평면보다 낮게 처리하고 분수대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구획하였다. 그 동서남북에는 물개분수를 배치했고 남쪽 언덕에는 등나무 시렁(퍼고라)을, 서쪽 언덕에는 청동제의 서양식 해시계를 배치하였다. 또, 창경궁에는 난대 및 열대 식물을 재배하기 위한 입체적인 유리온실을 짓고 그 앞에는 매듭화단을 만들었다.

20세기 후반기는 일본식 조경기법을 무원칙하게 도입했던 혼란기를 거치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계기로 하여 차차 시대의 조류에 걸맞게 발전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요소를 접목하는 데도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21세기는 지구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조경도 개인 중심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대중을 위한 공공적인 조경으로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며, 조형물과 함께 전통적인 요소를 더욱 살릴 것이며, 바닥 포장에도 관심을 갖되 디지털시대에 걸맞는 예술성도 고려될 것이다. 따라서 조경공간은 쉬고 즐기는 생활공간임과 동시에 과학과 자연히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생각하는 공간으로 변모되어야 갈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정원』(정동오, 민음사, 1986)
『동양조경문화사』(정동오, 전남대학교 출판부, 1990)
주석
주1

중국 북송의 유학자(1017~1073).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 당대(唐代)의 경전 주석의 경향에서 벗어나 불교와 도교의 이치를 응용한 유교 철학을 창시하였다. 저서에 ≪태극도설≫, ≪통서≫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2

중국 송나라의 주돈이가 지은 글. 연꽃을 군자에 비유하였다. 우리말샘

주3

부여 궁남지의 가운데에 있는 인공적으로 만든 섬.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말샘

주4

중국 진(晉)나라의 서예가(307~365). 자는 일소(逸少). 우군 장군(右軍將軍)을 지냈으며 해서ㆍ행서ㆍ초서의 3체를 예술적 완성의 영역까지 끌어올려 서성(書聖)이라고 불린다. 작품에 〈난정서(蘭亭序)〉, 〈상란첩(喪亂帖)〉, 〈황정경(黃庭經)〉, 〈악의론(樂毅論)〉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5

정원 따위에 돌을 모아 쌓아서 조그마하게 만든 산.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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