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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정치단체

 1925년 경성부에서 조직된 사회주의운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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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경성부에서 조직된 사회주의운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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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 일제하 경성부 황금정 아서원에서 조직된 사회주의운동 단체로 1928년 12월 해체되었다가, 1945년 8월 해방 후 박헌영 등이 재조직하였으나 1946년 11월 남조선로동당(남로당)으로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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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4월 이동휘(李東輝) 등이 중심이 되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생한 이후 한인사회당의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부임하여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상해파)을 창립하였다. 또한 1920년 1월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현 위원회 산하에 한인공산당이 창립되었고, 이들도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을 창립하였다.
1922년 10월 코민테른은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두 고려공산당의 통합대회를 개최하도록 하였으나, 대회가 무산되자 코민테른은 원동부(遠東部) 산하에 꼬르뷰로(Корбюро, 高麗部)를 설치하고 두 고려공산당을 해체하였다. 1923년 5월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창건할 목적으로 꼬르뷰로 국내부가 서울에서 결성되었다. 1924년 2월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는 꼬르뷰로 해산, 통일된 조선공산당 결성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조선문제결성서'를 채택했다. 그 결과 1924년 4월 꼬르뷰로 내지부는 해산되었다. 국제공산당은 꼬르뷰로를 대신해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위한 오르그뷰로를 조직하였다. 오르그뷰로는 화요회를 통해 여러 사회주의단체와 교섭하여 조선공산당 조직을 준비하였다.
1925년 4월 17일 황금정 아서원에서 김재봉(金在鳳), 김낙준(金洛俊, 이명 金燦), 김약수(金若水), 주종건(朱鍾建), 윤덕병(尹德炳), 진병기(陳秉基), 조동호(趙東祜), 조봉암(曺奉岩), 송봉우(宋奉瑀), 김상주(金尙珠), 유진희(兪鎭熙), 독고전(獨孤佺), 정운해(鄭雲海), 최원택(崔元澤), 이봉수(李鳳洙), 김기수(金基洙), 신동호(申東浩), 박헌영(朴憲永), 홍덕유(洪悳裕) 등 19인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조선공산당 창당대회(1차당 대회)는 사상단체(思想團體)인 화요회(화요파)와 북풍회 등이 주도하였고, 김사국(金思國), 이영(李英) 등 서울청년회 계열의 사회주의자(서울파)들은 배제되었다. 1차 당대회에서는 책임비서에 김재봉을 선출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조직부, 정치경제부, 간부국, 조사부, 선전부, 노농부 등을 조직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조선공산당의 창건을 알리고 승인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에 조동호와 조봉암을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1차당 대회에서는 조선혁명의 과제가 심의되었고 그것을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창립 당시 강령(綱領)을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1926년 6월 7일에 상해에서 발행된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불꽃』에 수록된 「조선공산당선언」에 따르면 조선공산당은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되 국가의 최고 및 일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조직한 직접, 비밀(무기명 투표), 보통 및 평등의 선거로 성립한다. 또한 직업조합의 조직 및 동맹파업의 자유, 야간노동 금지, 아동노동 금지, 산모의 산전 2주 산후 4주간 노동금지, 대토지 소유자와 회사 및 은행이 점유한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의 토지와 함께 농민에게 교부할 일, 소작료를 3할 이내로 할 일, 농민조합을 법률로 승인할 일 등 40개 항에 이르는 강령을 내걸었다.
조선공산당은 을축년(乙丑年, 1925) 대홍수를 겪으면서 수해 이재민에 대해 모금과 상황 조사를 하는 등 홍수 이재민들을 돕기 위한 전국적인 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전국 각지를 순회하여 농민, 노동자 등에게 강연을 벌이고 일본인 사회주의자를 초대하여 강연회를 여는 등 선전사업을 벌였다. 또한 조선공산당은 서울에 있는 인쇄공 조합, 철공조합, 구두직공조합, 양말직공조합, 물장수조합 등의 각 직업별 노동조합의 창설에 관여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출판물로서 『조선지광(朝鮮之光)』과 『신흥청년(新興靑年)』을 발행하였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민중봉기를 계획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인 권오설의 주도하에 조선공산당은 ‘6·10투쟁특별위원회’를 두고 「격고문(檄告文)」, 「복상(服喪) 통곡(慟哭)하는 민중에게 격(檄)함!」등의 전단을 배포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조선공산당은 1백여 명의 당원이 체포되었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과 1926년 6·10만세운동사건 등 ‘1·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조직에 치명적 손실을 받았지만 파괴된 조직을 정리하고 ‘서울파 사회주의그룹’인 고려공산동맹을 가입시켜 당세의 확장을 이루어 1926년 12월 6일 조선공산당 2차 당대회를 개최하였다.
2차당 대회는 「민족운동(民族運動)에 관(關)한 방침(方針)」을 통해 ‘민족주의자의 정당을 형성’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1927년 2월 신간회의 결성으로 구체화되었다. 대회는 또한 조선노농총동맹을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맹할 것과 노동쟁의 및 소작쟁의에 대한 구체적 전술을 세울 것을 결정하였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에서 검거를 피한 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1928년 2월 27~28일 조선공산당의 마지막 당대회였던 3차 당대회를 열었다. 대회는 노동자 출신 차금봉을 책임비서로 선출했다. 1928년 3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조선민족해방운동 관한 테제(정치논강)」에서 당시 조선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파악하면서, “조선의 장래 권력형태는 조선사회의 정세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이어야 한다. 조선에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좌익소아병적 견해이고 부르조아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우경적 견해”라고 하였다.
조선공산당은 1928년 7월~10월 일제의 검거로 책임비서 차금봉이 구속되는 등 조직이 와해되었고, 코민테른의 「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결의(12월테제)」의 지침에 따라 노동자와 빈농에 기초한 당 재건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에서 결의한 「12월테제」는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주요방침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운동을 강화하여 소부르주아지의 민족혁명운동에 대해서는 그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한편, 민족혁명운동에 계급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민족혁명운동을 강화해야 함”을 제시했다. 또한 조선공산당이 지식인과 학생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년간의 파쟁이 그들의 발전을 지연시켰기 때문에 공장노동자와 빈농에 기초한 강철 같은 당조직의 복구·강화를 지시하였다. 이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에 따라 1930년 3월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1931년 10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이 각각 해체되었다.
1929년 세계자본주의가 대공황을 겪는 등 위기적 상황에 처하자 코민테른은 「12월테제」와 프로핀테른의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임무에 관한 테제(9월테제)」, 범태평양노동조합의 「조선의 범태평양 노동조합 비서부 지지자에 대한 동비서부의 서신(10월서신)」 등에 의거하여 노동자·농민에 기초한 대중적 당재건운동을 지시하였다.
코민테른의 당재건운동 지침에 의거하여 김규열, 이동휘, 김철수, 윤자영, 김영만 등 과거 서울파와 상해파 그룹들은 1929년 3월 만주 길림성(吉林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발기회를 조직하고 『볼세비키』, 『노력자신문』을 발행하며 당재건운동을 벌였다.
1931년 2월 양명, 한위건 등 ‘ML파’ 사회주의자 그룹은 상해에서 기관지 『계급투쟁(階級鬪爭)』을 발행하고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화요파’ 출신인 김단야, 권오직 등은 1929년 11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단야 등은 1931년 3월 박헌영과 『콤뮤니스트』창간호를 발간하여 조선공산당재건 방침을 시도하였다.
또한 1933년 8월 서울에서 이재유를 중심으로 경성트로이카그룹이 결성되어 1934년 11월 경성재건그룹, 1935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경성준비그룹 등을 거치면서 조선공산당재건을 위해 투쟁하였다. 한편 1930년대 들어와 혁명적 노동조합, 혁명적 농민조합 결성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 전국적으로 수만명에 달하는 검거자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당재건 방침에 따라 ‘아래로부터 위로의’ 전국적 조직건설을 통해 당을 재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와같이 1925년 4월 창건되어 1928년 12월 해체된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각 분파들의 당재건운동은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했지만 1920년대 말부터 1940년 초에 이르는 당재건 운동의 결과는 1945년 8월 해방 직후 박헌영 등 과거 화요파가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통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해방이 되고 가장 먼저 조선공산당을 선포한 세력은 ‘장안파’였다. 서울파 출신인 이영과 정백, 화요파 출신인 이승엽·조동호·조두원, 상해파의 서중석, ML파의 하필원, 최익한 등은 1945년 8월 15일 밤 덕성여자실업학교 자리에서 재경혁명자대회를 열었다. 소련군이 서울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있자 회의를 중단했다가 16일 아침 장안빌딩에서 회의를 속개하고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한편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이현상 등 경성콤그룹(화요파) 계열은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945년 9월 8일 열성자대회에서 장안파 공산당은 자체해산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중심의 당 재건을 결의하여 사실상 조선공산당의 창립대회가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테제)」를 통해 ① 조선의 해방이 소·영·미·중 등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에 의해 실현됨으로써 평화적으로 혁명의 성공이 가능함을 보여주었고 ② 조선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에 있으므로 민족적 완전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고 ③ 진보적 민주주의 정치를 실시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이 중심이 되고 도시소시민과 인텔리켄차의 대표와 기타 모든 진보적 요소가 정견과 계급과 단체 여하를 막론하고 참여하는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대중이 지지하는 혁명적 인민정권을 수립해야한다는 등 정치노선을 제시하였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소공위의 결렬과 조선정판사사건 등 미군정의 탄압강화, 우익의 테러, 미소 간의 평화국면 퇴조 등 정세 변화에 따른 통합적 지도력 강화의 필요에 따라,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3당합당을 하여 남조선로동당으로 해소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김창순
개정 (2012년)
전명혁(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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