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년연합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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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소년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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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7년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소년운동단체.
개설

1923년 4월 방정환(方定煥) · 조철호(趙喆鎬) 등이 조직한 소년운동협회(少年運動協會)와, 1925년 5월 정홍교(丁洪敎) · 박준표(朴俊杓) · 이원규(李元珪) 등이 조직한 오월회(五月會)로 양분된 한국의 소년운동계를 통합하기 위해 1927년 전국의 소년운동단체 대표들이 결성한 단체이다.

연원 및 변천

1927년 10월 16일 전국의 100개 이상의 소년단체의 가입 신청을 받아, 52개 단체 대표 96명이 참가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과 강령을 발표하였다.

선언은 “이산(離散)으로부터 통일집중에, 기분적 운동에서 조직적 운동으로, 우리 소년운동은 방향을 전환할 절대 필연에 당면하였다. 이 중대한 시기에 선 우리는 오늘날까지의 온갖 사정과 장애를 초월하여 일치상응 전운동의 통일을 기하고, 이어 조선소년연합회를 창립한다”라는 내용으로 되었다.

그리고 강령은 “① 본회는 조선소년운동의 통일적 조직과 충실한 발달을 꾀함, ② 본회는 조선소년운동에 관한 연구와 그 실현을 꾀함”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방정환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중앙상무서기에 고장환(高長煥) · 연성흠(延星欽)을 선임하였으며, 25명의 중앙집행위원과 5명의 중앙검사원을 두었다. 그리고 선전조직부 부장 정홍교, 조사연구부 부장 추병환(秋秉桓), 교양부 부장 전백(全柏), 출판부 부장 김병욱(金炳旭), 체육부 부장 서겸순(徐謙淳), 재정부 부장 최청곡(崔靑谷) 등을 각 부서에 임명하였다.

연합회는 가맹단체로부터 매년 일정액의 회비를 징수하여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종래 5월 1일로 ‘어린이날’로 정하였던 것을 일제당국이 ‘메이데이(May Day)’를 빌미로 어린이 행사를 탄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5월 첫째 일요일로 변경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변경한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즉, 일제가 어린이들이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학교에 수업을 강행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연합회에서는 소년단체 가입 연령을 18세 이하로 제한하고, 어린이의 자율적 운영을 위해 지도자는 발언권과 피선거권만을 주기로 하였다. 또한 어린이날 노래를 제정하기 위해 각 지방단체로부터 곡목을 추천 받았다.

그리고 감상적인 동요나 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소년잡지는 배격하고, 과학과 건전한 문학을 다루는 잡지를 후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소년운동의 통일을 목적으로 발족하였지만, 당시 우리 사회에 유입된 사회주의사상이 소년운동계에 침투하여 주도권 장악을 기도함으로써 다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1928년 3월 천도교기념관에서 개최된 제2회 정기총회에서 무산소년운동을 주장하는 좌익계가 주동이 되어 조직체를 조선소년총동맹(朝鮮少年總同盟)으로 개편함으로써, 연합회는 자연 해소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일제하(日帝下)에서의 조선소년운동고(朝鮮少年運動考)」(신재홍, 『사학연구(史學硏究)』 33, 1981)
『동아일보(東亞日報)』(1927.7.1. 8.1. 9.29.)
집필자
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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