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정부 ()

근대사
단체
1934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행정조직인 국민부(國民府)와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기능을 통합한 군정부.
정의
1934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행정조직인 국민부(國民府)와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기능을 통합한 군정부.
개설

1934년 만주사변 등 정세변동으로 인해 유명무실해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및 국민부(國民府)를 대신해 수립된 군정부로서, 1938년 9월까지 존속하였다.

설립목적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남만 일대의 독립운동 환경의 변화 및 영도정당(조선혁명당)·자치정부(국민부)·독립군(조선혁명군)으로 구분되었던 권력과 기능의 분담체제를 해소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연원 및 변천

1927년 초 만주의 주요 민족주의 단체로는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 등의 3개 단체가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분화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김희산(金希山)의 참의부는 세력이 미약하였고, 김좌진(金佐鎭)의 신민부도 점차 세력이 부진해 흩어짐으로써 북만연선(北滿沿線)에 쇠잔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동진(吳東振)의 정의부는 1927년부터 급진파와 온건파가 분립하였다. 정의부의 온건파는 참의부·신민부의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1929년 4월 현익철(玄益哲)을 중심으로 국민부(國民府)를 발족하였다. 정의부의 본거지는 길림(吉林)이었으나 흥경현(興京縣) 왕성변문(汪盛邊門)으로 이전하여 흥경·통화(通化)·환인(桓仁) 일대를 그 주된 지역으로 삼았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만 군경의 검거에 대항해 국민부는 1932년 이후 한중합작을 내걸면서 반만(反滿) 항일군과 연락을 계획하였다. 같은 해 탕취우(唐聚五)가 반란을 일으켜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을 조직하고 동변도(東邊道) 일대에서 활동을 개시하자 국민부는 이들과 먼저 제휴하였다.

탕취우의 반란군 사령부는 특무대를 조직했는데, 이때 양세봉(梁世奉)을 사령으로 김호석(金浩石)을 참모장으로 명령하여 행동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일만군(日滿軍)의 토벌로 자위군은 궤멸하고, 특무대도 통화에서 흥경현 홍묘(紅廟)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렇게 재기를 도모하던 국민부는 1934년 일만군의 공격을 피해 이동함으로써 큰 피해는 예방할 수 있었다. 재건에 착수한 양세봉·김호석 등은 남은 병력을 모아 특무대를 조선혁명군총사령부(朝鮮革命軍總司令部)로 바꾸고 7개 중대 규모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구성하였다.

총사령 양세봉은 김학규(金學奎)를 베이징(北京)에 파견하여 탕취우와 제휴하게 하였다. 1934년 가을 대공격 때 총사령 양세봉이 사망하자 김호석이 총사령으로 추대되어 다시 세력을 만회하였다.

당시의 조직은 조선혁명당[당수 고이허(高而虛)]을 지도기관으로 하고 그 아래 행정기관으로 국민부(수령 김동삼)를, 수장기관으로 조선혁명군(총사령 양세봉)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또한 조선혁명당은 정치부·조직부·조사부·국제부·교양부·재정부 등을 두었고, 군사위원회(조선혁명군)·자치위원회(국민부)·노농위원회·선전위원회 등이 편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1931년 9월 만주사변과 그에 따른 ‘만주국’의 수립, 그리고 이후에 지속된 일제의 항일투쟁세력에 대한 일대 탄압은 만주지역 각지에서 봉기한 여러 계통의 중국인 항일의용군은 물론이며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의 투쟁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다. 따라서 1934년 말에 이르면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의 각 지부조직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명무실해진 반면, 조선혁명군은 압록강 건너편의 남만주 산악지대를 기반으로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혁명군의 역할과 비중은 상대적으로 커지게 된 반면 조선혁명당과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거나 첩보를 제공하는 기관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4년 11월 11일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조선혁명군의 주요 지도자들이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행정조직인 국민부와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을 통합하여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라는 통합기관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기능과 역할

조선혁명군정부는 해체될 때까지 정부를 표방하며 민족 해방을 위한 무장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1935년 초에 발표된 선언서에 따르면, 출범 목적으로 ‘일제와 항쟁해온 전쟁세력의 강대화를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조선혁명전쟁 세력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국제주의에 입각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조에 맞춰 조선혁명군정부는 자치(군정)의 실시와 한인 교민의 보호, 항일무장투쟁의 수행과 국내 침투공작, 그리고 의무금·군자금·식량의 징수와 같은 사업을 추진하였다. 또 공동전선을 구체화하지 못했던 중국공산당의 홍군(紅軍) 유격대와의 연대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혁명군정부를 비롯한 재만한인들의 이러한 투쟁은 적지 않은 일본 및 만주국 군경과 관헌을 살상하고 일제의 중국 동북지역 통치를 교란하는 상당한 실적을 거두었다. 따라서 남만주 지역에 대한 일제의 수탈을 상당부분 저지하고 강대한 일본 군경과 만주국 관헌 등을 만주지역에 묶어둠으로써 일제의 중국 본토 및 소련에 대한 침략을 일정하게 견제·완화하는 실질적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중국 동북지역과 관내지역은 물론 국내의 민족운동과도 연계되고 서로 각 지역의 운동을 고조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참고문헌

『한민족광복투쟁사』(이현희, 정음문화사, 1990)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한국독립운동사』5(국사편찬위원회, 1969)
『조선독립운동』Ⅱ(김정명, 원서방, 1969)
「조선혁명군정부」(장세윤,『한국독립운동사사전』6, 2004)
「조선혁명군정부 연구」(장세윤,『한국독립운동사연구』11, 1997)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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